돈봉투
새 아파트로 이사 왔다. 이삿짐을 대충 옮겨놓고 바로 외국 출장길에 올랐다. 구마모토현, 허베이성 등 자매 교류단체를 방문하여 교류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홍콩, 방콕, 호찌민 등 여러 도시에서 무역전시회를 여느라 바빴다.
“결혼반지 어디다 치웠어요?”
낯선 이국땅에서 다급한 아내의 목소리에 놀랐다. 내게는 잊어버린 결혼반지다. 오래전 그녀가 살림이 어려울 때 그것을 팔아서 쓰겠다고 해서다. 새집으로 이사 와서 온갖 잡다한 상념의 부스러기가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삿짐을 잘못 쌌는지, 운반하는 과정에서 손이 탔는지, 아니면 내가 없는 사이에 도둑이 들었는지 등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일정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 적막강산이다. 아무도 없는 빈집 같다. 이곳저곳을 살피다 기겁했다. 그녀가 방 한구석에 말없이 누워서 눈만 껌뻑거려서다. 아마 결혼반지를 잊어버려서 상심한 듯하다. 부랴부랴 구조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는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나를 탓한다. 다행히 의료진의 정성으로 빨리 회복되었다. 얼굴에서 생기가 돈다.
그녀의 첫마디다. 지인의 청첩장을 받고 예식장에 가려고 반지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서 당황했단다. 그녀와 결혼반지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그녀가 말한 대로 팔았다면 잃어버릴 반지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결혼반지가 몇 개 되는 양 어지러웠다. 어쨌든 반지의 행방이 묘연하다.
탐정처럼 따져 보았다. 가족은 셋이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뿐이다. 셋 중 나와 그녀를 빼면 아들만 남는다. 아들은 의심해 볼 여지가 없다. 평소 돈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외부 사람에 의해 손이 탓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없는 동안에 우리 집에 들어왔던 사람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일전에 전기설비 하는 이가 각 방을 돌아다녔단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설치된 CCTV를 살펴보기로 했다. 누가 집에 들어왔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관리사무소에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확인을 요청하자 관련 화면이 파악되는 대로 알려 주겠다는 답이다.
다음 날 연락이 왔다. 관리사무소에서 CCTV를 확인한 결과 전기를 점검하는 이 외에는 출입한 사람이 없다는 게다. 그러면서 관리사무소 직원이 그 회사 전화번호를 내게 알려왔다. 그 전화번호로 걸자 사장이 받는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토 달지 않고 사과의 말을 건넨다. 손버릇이 나쁜 직원이 있었는데 요즘 출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부터도 귀금속을 도난당했다는 제보를 몇 군데 받았다며 직원의 소행임을 자인한다. 돈에 눈이 먼 이 같으면 발뺌할 텐데 전액 보상하겠다는 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귀금속을 간수 하지 못한 책임이 부끄러웠다.
그와 통화한 내용을 아내에게 전하며 직접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야근하고 있는데 그 사장의 연락이다. 그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큰 걱정이다. 그녀가 잃어버린 게 결혼반지뿐만이 아니었다. 간간이 선물해 준 팔찌, 목걸이, 행운의 열쇠 등 금붙이를 몽땅 도난당한 게다. 보상할 돈을 마련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해를 구한다. 연말이라 경황이 없어서 대충 답변하고 까맣게 잊고 지냈다.
짙은 어둠의 적막이 스며들고 있었다. 여러 날 야근해서인지 몸이 피곤하여 모처럼 일찍 퇴근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선 젊은 남자가 집안에 들어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잠시 머뭇거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다. 일전에 통화했던 이라며 두툼한 돈봉투를 내민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이라고 하나 정직한 젊은 사장을 보고 감복했다.
“돈봉투 다시 가지고 가세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내는 깜짝 놀란 기색이다.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삶의 결이 사람마다 다르듯 매듭을 푸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면, 자신도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고통이 고통을 만든다.’ 아내는 어려운 살림에 한 푼이라도 받아서 보태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하나 그는 돈을 마련하느라 여기저기서 빚을 냈다는 뒷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주머니 깊숙이 돈봉투를 넣어 보냈다. 아내는 무척 서운했던가 보다. 다른 날은 매일 늦게 들어오더니 그날따라 왜 일찍 들어왔느냐고 지청구다. 사실 그 돈봉투를 그에게 돌려준 건 내 마음의 자유를 갖고 싶었을 뿐이다. 만약 그것을 받았더라면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거다.
돈은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이다. 요즘 정직하지 못하게 남을 등쳐먹는 이들의 소식을 자주 접하며 지난날 그의 기억이 머리를 헤집고 나온다. 돈의 허상을 잡느라 이전투구 하는 군상 속에서 정직한 그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창밖에 가로등 불빛이 밝다. 가로등은 하늘과 땅의 모든 걸 품어 안은듯하다. 우리네 인생사 어디서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따라 그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