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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이적의 의미
본문: 마 14:13-21
요절: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11:2부터 16:20까지는 이스라엘의 각 계층의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고자 끊임없이 애쓰고 투쟁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이 가운데에는 종교 지도자들과의 살벌한 논쟁도 보도됩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담긴 이 긴 단락은 제자들의 아름다운 메시아 고백으로 끝맺습니다. 이 고백 사건은 인류 역사 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있자마자 예수님은 메시아가 가야 할 고난의 길을 예고하십니다. 16:20에서 고백 사건이 끝나고 21절에서 바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그 후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로써 16:21부터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투쟁 시기(11:2-16:20)의 중간 지점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 공동체, 갈릴리 도시들, 바리새인들, 그의 가족, 땅의 사람들, 헤롯의 가족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의심하거나 거부했습니다. 겉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선교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과 사랑을 올바로 이해도 못 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은 이제 힘이 소진되어 위기에 빠지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오병이어 사건부터 시작하여 사천 명 먹이신 사건으로 끝나는 14:13-15:39의 단락에서 일곱 개 사건이 보도되는데, 이들은 죄인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매우 인상 깊게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영적 지도자들의 악함과 백성들의 무관심 때문에 무너지시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분의 메시아적 사랑과 자비함도 전혀 소진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이기적이고 연약하여 진리와 사랑의 실천을 쉽게 포기하는 우리에게 깊은 충격을 줍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불신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 이스라엘의 죄를 감당하시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그 터전 위에 새 언약의 공동체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 사명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십자가에서의 화해의 기반 위에 세워진 종말론적인 공동체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예수님은 조금도 피곤해하지 않으시고,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핏값으로 세우신 공동체를 우리가 계속 일구어나가고, 이미 너무나도 더러워진 교회를 순결한 고백 공동체로 만들고자 얼마나 애써야 하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셨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오병이어 기적 사건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변화된 자가 되어 예수님의 집을 세우는 동역자가 되기 위해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헤롯이 예수님 사역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1-2절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까지 위험 인물로 보고 있으므로, 예수님은 그를 피해 조용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눅 13:31에 따르면 나중에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고 보도합니다. 아직까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의 시간이 오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전에 불필요하게 헤롯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홀로 계실 수 있도록 외진 곳을 찾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헤롯 안디바에게 속하지 않는 지역을 찾으셨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실제로 동쪽 해안은, 한 부분은 분봉 왕 빌립에게(참조: 눅 9:10), 다른 부분은 그리스 열 도시 동맹에 속하는데, 구체적으로는 히포스라는 도시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도 피하신 것입니다. 그리스 땅은 갈릴리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골란 고원으로부터 게네사렛 호수까지 경사진 호수의 동쪽 해안에서는 쉽게 „적막한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은 계획과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쪽 해안으로부터 동쪽으로 배를 타고 가신다는 것을 „무리가 들었습니다.“ 무리는 걸어서 예수님 일행이 가실 만한 곳을 알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무리의 마음에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컸을까요? 이것이 아니라면 이들 마음에는 무언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하나님의 다스림(하나님 나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예수님 말씀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말씀의 소비자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만족하지만,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므로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도 없으나, 계속 예수님을 찾아다니기만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탄성을 지릅니다: 정말 기가 막한 말씀이구나! 그러나 정작 실천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상태가 이러하므로 이들은 예수님이 이들을 피해가시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사실 이들은 뻔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말씀의 소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통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무레하게 보시기 않고 달리 보셨습니다. 이들을 보시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분을 엄습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상대방의 처지를 보고 자기 마음에 고통을 느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고 또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료는 거짓 치료자와 부흥사들의 치료와는 전혀 다릅니다. 한명 한명씩 인격적으로 치료하십니다. 치료받는 자는 분명히 낫습니다! 거짓 약속을 하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치료 사역은 남의 고통을 자기가 짊어지시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17). 단순히 입술만 움직여서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병을 자신이 대신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갈릴리 여러 도시들을 심판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11:20 이하).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들에게 메시아적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 메시아는 이런 분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순결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녀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제자들이 나아와 이른“ 것은 이성적이고 인간적으로도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이 순간에 잠언의 진리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더 높고, 그분의 눈은 더 멀리 보십니다(참조: 왕하 6:16 이하).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는 제안은 동쪽 해안과 골란 고원이 인접한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절에는 우리가 „열 도시 동맹“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즉, 그곳까지 가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좋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더 좋은 길을 보고 계십니다.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그들이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우선 15절의 제자들의 태도에 대한 간접적인 꾸짖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나름대로 현명한 충고를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입니다. 둘째로, „무리가 우리에게 부담되니 이제 보내자“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자질 문제가 됩니다. 양이 가지 않는 한 그들을 쫓아내서는 안 됩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양을 끝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너희가 그들을 책임지라는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먹을 것을 줄 수 있습니까? 그들 스스로는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곤궁한 형제를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자기들 곁에 계시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의뢰하면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리를 보내자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이들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제자가 할 일입니다. 양들을 어려운 상황에 그대로 두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러한 깊은 뜻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순종해서 먹을 것을 찾아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나와서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고 이것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예수님은 이것을 받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가지고 이적을 일으키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온 바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는 비록 능력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양을 먹일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예수님의 목자의 마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갖고 예수님께 나온다(기도)
예수님께서 그가 가지고 온 작은 것을 가지고 기적으로 양을 먹이신다.
그러므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일이며, 이것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은사가 보잘것 없이 보여도, 우리가 이것을 사용하여 믿음과 신뢰로 예수님의 양을 섬기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양을 변화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손안에 있는 우리의 오병이어는 얼마나 큰 것입니까? 이것으로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는 오병이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야말로 문자 그대로 오병이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숫자적으로 오병이어입니다. 칠병이어도 되지 않습니다. 어제 이 설교를 작성하면서 우리 교인 평균 연령을 계산해 보니 85세 되는 분을 제외하고도 만으로 63세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무언가 할 수 있는 나이는 지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께 믿음으로 우리를 온전히 드린다면,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를 통해서도 자신의 양들을 먹이시리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면서 믿음으로 역사해야 하겠습니다.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을 이미 다루었으므로 지금은 다른 측면에 관심을 가지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나누어 주시고 이들이 먹는 과정은, 이에 사용되는 표현과 순서를 볼 때 성찬을 기억나게 합니다. 우리는 19절을 마 26:26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이 두 구절을 잘 보시면 이 짧은 구절에 사용된 중요한 단어가 거의 같습니다: „가지사“, „떡“,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 떡을 나누어주시는 행위는 성찬식과 같이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식을 통해 분명히 무언가를 가르치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만 말한다면,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이러한 배경을 모른다면 왜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서 먼저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이것을 무리에게 전달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혼자서 떡 오천 개를 일일이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광주리에서 떡을 하나 꺼내 이것을 반으로 쪼개서 제자들에게 주는 시간이 최소한으로 잡아서 3초 걸린다고 한다고 해도, 오천 개라면 모두 15,000초가 걸립니다. 그렇다면 모두 약 4시간이 걸립니다.
만약 예수님의 기도로 떡 다섯 개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오천 개로 변했다면 여러 제자들이 금방 나누어주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지금 바로 자신을 부수어서 나누어주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떡을 먹은 무리가, 자기들에게 떡을 계속 줄 것을 요구하자, 예수님이 자기가 바로 이 떡이며, 생명의 떡이라고 가르치신 것을 볼 때, 이러한 추측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보살피는 사랑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가르치는 하나의 표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이적을 통해 생명의 떡인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적은 또한 광야에서의 모세의 급식 이적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세 시절에 일어났던 가장 큰 기적 중의 하나는 메추라기와 특히 만나로 먹이신 것입니다(참조: 출 16). 모세는 임종 전에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그렇다면 이 말세의 메시아적 선지자도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해야 합니다. 이 기적을 아버지께서 지금 급식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 선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분명한 하나의 표적입니다. 그 결과 요 6:14을 보면, 무리는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제 예수님도 모세처럼, 그리고 오병이어 기적처럼 그들의 빵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요 6:22-25). 그리고 예수님께서 빵을 주실 것을 기다렸습니다(요 6:26).
그런데 70년대 초부터 한국 교인들에게 바로 빵을 약속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믿으면 빵이 나온다! 믿으면 범사가 잘 된다! 믿으면 집안이 잘 된다! 믿으면 병 고치고 팔자까지 고친다! 믿으면 아이들이 취직한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참 생명을 버리고 떡만 찾는 더러운 짐승과 같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국 교회 대부분은 이 사람의 복음에 지배당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순복음의 암세포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는 생명을 잃어버린 지가 오래됩니다. 교회는 마치 더러운 돼지우리와 같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떡과 영생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는 떡과 영생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 떡을 찾는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4-35). 이 대답을 듣자 무리는 점차로 화를 내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떡을 찾는 무리는 이렇게 떼를 지어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겨 정결하게 된 교회는 그들이 있을 곳이 못됩니다. 그들이 떠나야 교회에서 악취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뿌려주신 것은, 앞으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 백성에게 진정한 생명을 나누어주신다는 것의 상징이요 예표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자신이 바로 그 선지자임을 분명히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자신이 이 생명의 떡임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약 일 년 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이 기적 시에 일어난 행동을 그대로 보이시면서 성찬식을 거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떡은 나의 몸이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 사건 – 오병이어 이적 – 성찬식“이라는 연결선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이적을 통해, 죄와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과 앞으로 올 새언약을 예시하십니다. 따라서 급식 기적은 하나의 예언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떡이 쪼개지듯이 예수님의 몸도 찢기며, 포도주가 나누어지듯이 예수님의 피도 나뉘어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순복음도 완전한 복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몸이 찢기며 피를 나누십니까? 이곳에 온 유대인만 보더라고 좋은 밭은 거의 없고, 거의 다 길가나 돌밭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들에게 끝까지 말씀을 전하시고, 그들의 회심을 위해 일하시고, 메시아적인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 몸을 나누시고 피를 흘리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표방하는 개혁주의 교회(특히 한국)에서 이러한 것이 많이 부족한 것을 보고 자주 한계를 느낍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과 양보, 겸손, 너그러움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진리가 없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러므로 적지 않은 한국 개혁주의 교회가 이단화되지 않았나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오병이어를 찾아 이것을 예수님께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것을 받아서 그분의 사역에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영생을 얻으며 성장합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마음속에 영접하시면 그 안에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그러면 그분과 함께 메시아적 식탁에서 영원토록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이 종말론적 공동체(교회)에 초대합니다! 이미 이곳에 들어오신 분은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어, 마음을 다해 교회를 일구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생명의 떡과 영생의 음료인 예수님의 피를 매일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