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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순비기꽃☆]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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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비기꽃]
한기팔 시집 / 서정시학시선 078 / 서정시학사(2013.06.10) / 값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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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비기꽃
한기팔
너는 지금
무엇이고 싶은 것이냐.
호이 호오이…
먼 바다 숨비소리*
한 소절일 때마다
피맺히듯 꽃을 피운다는
순비기꽃.
그 꽃을 훑고 가는 바람 자락에는
지워도 남는 혈흔처럼
고샅길 돌담 너머
귀에 익은 이웃집 봉심이 누나
목소리도 들리리.
물질 갔다 혼백魂魄이 되어버린
거친 바다 소금기에 절은,
봉심이 누나 귀밑 볼
그 박가분 냄새가 난다.
* 숨비소리 : 제주 해녀들이 숨을 참고 물속을 자맥질로 들어가 작업을 하다가 수면 위로 솟구쳐 나오면서 숨을 토해내는 소리.
사월四月
한기팔
어디서 비좁 나온 아이들처럼
오종종히 모여 앉은 햇살 아래
막 달거리를 시작한
내 누이의 젖 몽우리 같은
꽃망울들
휘파람새 맑은 울음소리에
봄이 자글거리니
어린 날
눈물 나는 일 많았다
가슴 아픈 일 많았다.
밤2시四月
- 병후病後
한기팔
먼 마을 불빛들
추위에 지친 듯 졸고
얼어붙은 하늘
매 맞는 바람소리
지상은 이제
분별없는 차단遮斷
마을의 집들도
은하수도 길들도
모든 경계는 이미 지워졌다.
밤 2시
불을 켜지 않아도
이 겨울 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눈은 내리니
내리는 눈발 속
마음 젖지 않으려고
일회용 커피를 마시며
잠이 오지 않은
나는 몇 번이고
흐린 창에 이마를 대고…
만월滿月
한기팔
바다 속으로 지는 해
고요히 잠들기 전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먼 길 함께 걷고 싶다.
창을 바르며
한기팔
아내는 마실 가고
혼자 집에 남아
창을 바른다.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 있어
가만히 귀기우려 엿듣고 있자니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는데
하르르 하르르 지는 꽃잎.
이 봄날,
나의 하루는
팔할八割이 바람이 몫이다.
*마실 : 잠간 볼일이 있어 가는 바깥 나들이.
바다가 보이는 산길에서
한기팔
하루쯤
이 맑은 바람과
햇빛과 함께 지냈으면 좋겠네,
비다가 보이는 산길에서
하루 종일 바다를 보며
다람쥐를 만나면 다람쥐와 놀고
노루를 만나면 노루와 놀고…
바위틈을 흐르는 물소리
바람 소리에 마음을 씻고
산속의 산이 되어
산의 마음이 되어
하루쯤
순한 짐승이 되어
이 맑은 새 소리와
함께 지냈으면 좋겠네.
그날 이후
한기팔
1
이 하루도
마음 붙일 곳 없어
먼 산 바라보고 앉아 있노라니]
손들어 표할 아무도 없는
하늘 아래
구름 그림자만
호젓이 산을 넘네.
2
노을 속으로 빨려간
새처럼
꽃을 흔들고 간 바람의
뒷모습처럼
비어 있어
꽉 찬
저곳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있다가 없는 것
이 모든 것이
너와 나 사이
허공을 만들고 있다.
비오다 갠 날 아침
한기팔
비 오다 갠 날 아침
이 작은 돌조각에
햇살 반짝 비추니
영혼의 눈을 달아주고 싶다.
귀가歸家
한기팔
먼 곳에 집이 있어
창유리에
햇살 반짝 비추니
구름이 밟고 간
하얀 발자국이 눈부시다.
먼 곳에 사람이 있어
산 그림자 길어지니
앉았다 섰다
콩밭 이란에
내 어머니 같다.
이 한 없는 평화로움의
저녁 한때
오늘도 무사하냐고
세상은
눈물겹도록 아름답기만 하다고
이 하루도 잘 지냈냐고
노을 속의 새들은
저렇게 울어쌓는데
돌아보면
먼 곳
저녁연기 피어오르니
돌아갈 집이 있어
얼마나 좋은가.
돌아가 저녁상을 마주할
가족이 있어
얼마나 행복한가.
목련꽃 그늘 아래서
한기팔
내가 아, 하고
옷깃을 여미는 사이
꽃가지를 흔들고 가는
작은 바람 한 점에도
마음이 병인 양하여
목련木蓮꽃 그늘에 앉으면
목련꽃 환히 핀 가지 사이로
찬 하늘 물소리 청명淸明하니
댓돌 아래
그림자를 벗어 놓고
묵언默言으로 날아가 앉는
꽃잎,
그 꽃잎
헐벗은 영혼 하나
실눈을 뜨고
저승 밖에 나앉듯
이 봄날엔…
빨래를 말리며
한기팔
손톱에서 웃자란 내 삶의 얼개,
내 삶의 흔적,
오늘은 나를 펴 말려야 하고
나를 짜 널어야 하므로
딱히 갈 곳이 없는
나는, 밤새 비에 젖은
꽃나무 아래서
허밍을 하며
낡은 의자에 앉아
빨래를 말린다.
이웃집 담장 너머로
바람 한 필 펴 말리고
구름 한 벌 짜 널고…
섬, 동백
한기팔
1.
문 밖은 눈 내려
긴 그림자로
벽壁에 기대 선
섬 동백冬柏 하나가
온 섬을 밝힌다.
저 순결한
꽃 중의 꽃
초경初經을 지낸
내 어린 것의 사타구니에 묻은
지난 밤 달빛 같은…
2.
뱃고동 소리 한 소절
울 때마다
피는 꽃
혹은 지는 꽃
누군가의 발소리 들으며
피는 꽃
혹은 지는 꽃
훗시집 간
내 누이의 눈물 같은 꽃
섬, 동백꽃.
찔레
한기팔
더는 물러설 수도
다가설 수도 없는 벼랑 끝
줄기 하나로 낮게 뻗으며
이 산 속까지 와서
오직 정신精神 하나로
송이송이 하얀 꽃 피어
모든 시름
뜬 구름 흐르는 산길에
꽃잎으로 날리니
어느새 나는 고개 숙여
그 산을 오른다.
낙엽을 밟으며
한기팔
낙엽을 밟으면
잊혀진 일 생각날까.
내 삶의 멍 자국 같은
일상이
새록새록 낙엽 되어 밟히는
이 작은 생멸生滅의 몸짓
날빛에 남은
내 그림자와 겹쳐서
아름다운 저녁을 만들고 있다.
이제 바람이 불면
마른 잎으로 구르는
가을의 시 몇 줄 쓰고 싶다.
져야 할 것이면
마침표를 찍고 싶다.
나도 지고 싶다.
이 자리에 묻혀
살도 뼈도 다 삭은 후엔
하얀 눈이 내리면
그 눈발 속에 잊혀진 나목裸木처럼
겨울나무로 서서
나는 다만
너의 배경이 되고 싶다.
가을꽃자리
한기팔
시를 읽다가
시를 생각하다가
창문을 여니
돌을 두드리며 우는 빗소리.
현실의 꿈
현실의 삶까지도
비에 젖고 있다
너를 생각하다가
너의 그림자를 생각하다가
비 그치자
목백일홍木百日紅 그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면
저기 저 꽃 진 자리
네가 앉았던 그 자리
빗소리 붉은…
그믐달
한기팔
그믐달은
마을의 상여喪輿가 떠나기를 기다려
동구洞口 밖에
어둠을 기대고 섰다.
종소리도 얼어붙은
새벽,
누군가의 이 세상 마지막 얼굴 같은
누군가의 이 세상 마지막 눈빛 같은
그 고요한 야성野性.
그믐달은
마을의 행상行喪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상엿소리 끝난
먼 길,
팽나무 가지 사이로
파랗게 얼굴을 내밀고
새벽별 앞세우고
하늘 길을 열고 있다.
한라산 섬잔대
한기팔
피는 꽃 아니라
지는 꽃으로
한 삼십 년 더 살아서
내 죽어진다면
제주 4 · 3 때 죽은
몽달귀신 무덤가에
대낮에도
파랗게 혼불을 켜는
한라산 섬잔대 되리.
밤이면
백약이오름 산자락에
가만히 내리는
별빛으로 몸을 씻고
몸 밖의 마음처럼
마음 밖의 몸처럼…
그길
한기팔
억새밭 사이로
억새밭 사이로
바람은 달아나며
킬킬킬 웃고,
산 위에
구름이 혼자 외로운 날은
바람의 아들이요
구름의 연인인
나는
바람길 구름길 쫓다가
한라산 꽂자왈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가서는 돌아올 수 없는 길
망아지도 노루도 오지 않은
그 길
문득 지나쳐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이야.
돌하르방
한기팔
혼자 외로우면 바람과 함께 논다.
혼자 쓸쓸하면 구름을 부른다.
죽어서
오히려 산자를 지키는
제주 돌하르방.
주먹코에 왕방울 눈
벙거지 쓰고
뒤뚱뒤뚱 어디를 다녀오시나
바깥세상일 알고 싶어
마을 안팎을 휘둘러보고 오시는가.
돌아서면 행여
그림자라도 밟을세라
몇 걸음 발치로 물러서면
형체는 없고
형상만 있는,
죽어서 사는 유령幽靈같이
밤이면 올레길 어귀에 앉아
온 몸에 천개의 창을 열어
밤하늘 별빛을 모은다.
여일餘日
한기팔
산비알 토담집
담장 밖에
흙바람 종일 불고
지푸라기 날리는
봄날,
새떼 사뿐히 내리는
청보리밭
이랑 너머
먼 산
바라보고 앉아 있노라니
설핏한 저녁 햇살이
건너가며 그려내는
구름 한 점
한가로운…
달이 기우는 서쪽으로 날아간 새
한기팔
달이 기우는 서쪽으로 날아간 새
어둠이 되어 울고 간 새
어디를 보나 세상은
뿌연 모래바람
그 바람 속에서 길을 잃은 새
촘촘히 엮은
하늘의 그물 속으로 사라진 새
울음소리만 밤하늘에 두고 간 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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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여덟 번째 시집을 묶는다.
내가 사는 이 바닷가
하늘 한 귀퉁이
휑하게 뚫린 구멍 하나
너무 커서
나는 밤마다
물떼새 소리로 잠이 깹니다.
2013년 여름
한기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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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팔 詩集 [※순바기꽃※]
[ 시인의 산문 ] -
내가 때때로 수평선이 되어 선 하나로 뜰 때
― 한기팔
1. 등단登壇 무렵
내가『심상心象』지誌에 작품을 투고한 것은 1974년 8월이다. 목월 선생님께서 세미나 차 제주에 오셨다가 나의 시작 노트를 보시고는 연필로 하나하나 동그라미를 그려주셨는데 그 작품 중에서 열 편을 골라 묶어 보내 놓고 당선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에 그해 9월호에「시작詩作의 지도指導와 첨삭添削」의 특집을 실었는데「내면內面을 투시透視하는 눈」이란 제목으로 정한모 선생님께서 내가 투고해 놓고 소식 있기만을 기다리던 작품 가운데「가을 햇살」을 뽑아 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싣고 있었다.
「가을 햇살」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눈’이다. 움직이지 않은 눈동자가 어느 한 점을 응시하고 있는 조용한 ‘눈’이다. 그럼으로써 시력視力은 이미 사물의 내면을 투시할 줄 안다. 릴케의 눈이라고 할까. 사물을 투시하여 그 속에 보다 깊고 넓은 ‘내면 공간’을 찾아내준 ‘릴케’의 눈을 닮으려 하고 있다. 전편에서 그런 눈을 느끼지만 특히 마지막 3행에서 더욱 그런 눈과 자세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눈과 자세만 보더라도 이 작품을 쓴 사람은 벌써 시가 어떠한 것인가를 충분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디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표현해야 하는가를 이미 익히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첫째 관문을 무난히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가을 햇살이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는 속에
꽃과 바람의 길이 있다
한 점 그늘로 서서
바라보는 나의 길 위에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의
秩序를 위한
마지막 빛이 있다
약간의 첨삭添削을 곁들여 원시原詩와 비교하면서 삭제자의 의도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라고 적고 있다. 기대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얼마쯤 지나노라니까 다시『심상』에서 연락이 왔다. 작품을 더 보내라는 것이다. 목월木月 선생님께서 동그라미를 표를 해 주신 작품들 가운데서 다시 열 편을 골라 묶어 보냈다. 12월이 되어 당선 소감과 사진을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1975년 1월호『심상』에는 필자의「원경遠景」「노을」「꽃」이 신인작품으로 뽑혀 당선소감과 함께 게재가 되어 있었다.
둑 위에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염천의 바다가
갈대꽃을 날리고 있다
갈대꽃
날아간 자리
타다 남은 불티 하나
꺼질 듯이
서西쪽 하늘로
날고 있다
「원경遠景」의 전문이다. 서른아홉의 늦깎이 시인으로 시단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기념패記念牌 수여식이 그달 20일 관철동에 있는 심상사에서 있었다. 박남수, 정한모, 김종길, 이형기, 김광림, 시인과 이건청, 김종해, 시인도 뵌 것 같다. 겨울 추위가 관철동 지물 상가의 좁은 골목길을 꽁꽁 얼려놓고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2.「신감각新感覺」동인同人
등단 기념패 수여가 끝나고 목월 선생님께서는 등단 작품에 대한 약간의 언급의 말씀이 있었는데 “한시인韓詩人의 시에서는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동양적인 선과 여백미 또는 언어의 뉘앙스에서 오는 이미지의 표현이 매우 신선하고 감각적인 사고가 과거 우리들 기성들이 보여준 그것과는 또 다른 면을 깊이있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가까운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고량주를 시켜 조촐한 연회를 가진 다음 한광구, 윤석산尹錫山, 조정권 시인 등과 함께 몇몇 젊은 시인들은 무교동의 허름한 술집을 찾아들었다.
그것은 내가 그 가까운 쪽이 여관에 여장을 풀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무교동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술값이 싼, 가난한 문인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낭만적이고도 운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마침 1975년 신춘문예 팀들과도 합류되어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지면서 동인지에 대한 의견들이 오고 갔는데 주로 목월 선생님이 월간지나 신춘문예를 심사했거나『심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들이었다.
다음날 오후, 동인에 뜻을 둔, 신예 시인들은 목월 선생님 댁을 찾았다. 1970년 사이 신춘이나 문예지를 망라한, 말하자면 목월 선생님께서 등단시킨 신예들을 중심으로 동인 활동을 할 것에 의견을 모았다.
나는 그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낙향을 했다. 그 후의 동인활동은 ‘심상사’가 중심이 되었다. 목월 선생님께서 손수 ‘신감각新感覺’이라는 제호와 제자를 써 주셨다. 동인으로는 심상출신인 권달웅, 김성춘, 김용범, 이명수, 이준관, 이진호, 조우성, 한광구, 한기팔, 신춘문예 출신인 윤석산, 현대시학 출신인 조정권 시인이 동조하게 되면서 11명의 동인으로 그해 10월에 첫 동인지 가을호를 냈다.
그 후『신감각新感覺』1978년 제3집을 내면서 목월 선생님이 타계하시자, 일부 시인들은 동인에서 물러나고, 다음 해 제4집이 출간되면서는『심상』의 새로운 신예들에 의해 꽤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시단에는 몇몇 동인지가 있었으나 새로운 바람으로 시단에 주목을 끌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3. 형兄은 손짓만 하고…
내가 처음으로 용래龍來 선생을 뵌 것은 1975년 겨울, 전주에서의 한국시인협회 세미나 때이다. 목월 선생님이 한국시인협회 회장이었는데 당시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어 10시가 지나면 문밖 출입이 마음대로 허락되지 않았다. 전국에서 몰려든 시인들은 전주시장의 배려로 가슴에 명찰을 달아 통행증을 대신했는데 그 명찰을 보고 시인의 이름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용래 선생님은 이내 나를 알아보셨다. 서귀포라고 하는 지역적 특수성이 나를 쉽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털모자에 허름하고 두툼한 검은색 오바코트를 입고 신발은 아예 농구화 끈으로 발 전체를 동여매고 있었다. 매우 순수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는 이내 친해졌고, 어느 허름한 술집을 찾아들게 되었다.
용래 선생께서는 거의 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무슨 말을 하기는 하는데 그 말의 속뜻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술을 들다가도 몇 번이고 호주머니로 손이 갔다. 원고료를 받았는데 우편환이어서 술을 사기는 사야 할 터인데 이를 어쩌나 하는 눈치다. 음식을 먹을 때도 반쯤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말끝마다 “한 형 반갑다. 아이고 이를 어쩔꼬?” 하고 운다. 연신 무엇이 미안하고 송구스러운지 죄지은 사람마냥 손을 자꾸 어루만지며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눈물, 마음이 어찌나 여린지 말끝마다 “아이, 이를 어째?” 하고는 운다. 일단 사람을 만나면 속을 다 털어내고야 술자리도 끝을 낸다. 그래도 다 못 털어내면 편지로 쓴다. 헤어지면서도 몇 번이고 손을 만지고 또 돌아보면서 손을 흔든다. 그날 밤 용래 선생님과 나는 덕진공원 근처의 논밭에 있는 허름한 술집을 찾아들어 밤을 새웠다.
두 번째의 만남은 대전에서였다. 1978년 이른 봄, 교육청의 일로 대구에 갔다가 서울로 일행을 보내고 나는 대전으로 발을 돌렸다. 대전에는 용래 선생님과 오세영 시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세영 시인도 전주에서 뵌 적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만남이었기 때문에 대전에 들러 만나보기로 했다. 용래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대번에 알아보신다. 대전역 공중전화 박스라고 말씀드렸더니 한 20여 분 남짓 걸릴 터이니 그냥 그 자리에 있으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두툼한 오바코트에 털실로 짠 빵모자와 농구화를 끈으로 잔뜩 동여매고 20여 분 후에 불쑥 나타났다. 집 볼 사람이 없어 하다가 몰래 빠져나왔다면서 연신 잘 왔다는 소리를 연발한다. 또 몇 번이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꺼냈다 한다. 그 알량한 원고료로 받은 우편환이 있으니 술값은 안심하라는 뜻이리라. 우리는 이내 술집으로 찾아들었다. 조금 늦게 오세영 시인이 도착했다. 그날 밤 나는 별명 하나를 얻었다. 말하자면 용래의 머리글자와 내 이름 기팔箕八의 끝 글자를 따서 용팔龍八 형제로 하자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용래 선생을 용래 형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용래 형님과 여관에서 나와 비가 오는 길을 질척거리며 대전역까지 걸어 나왔다.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쳐보고하다가 헤어졌다. 그 후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전략前略하옵고,
한 그루 무화과無花果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손바닥만 한 우리 집 뜰, 더구나 에덴의 동산도 아닌데 능금 빛으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뜻밖에 받은 장거리 전화電話, 인형仁兄의 음성音聲, 당황할 수밖에요. 그날 밤은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 가만히 눈을 감을 수밖에, 서귀포西歸浦는 먼 곳, 더 좀 가까운 곳이라면 훌훌 털고 날아갔으련만, 먼 곳이라서 兄은 손짓만 하고, 부디 안녕
1978년 잔서殘暑 박용래朴龍來
4. 뭐락하노, 바람에 불려서
목월 선생님의 타계他界의 비보는 큰 충격이었다. 1978년 3월 24일. ‘구름에 달 가리듯’ 숨어버린 우리 시단詩壇의 거목巨木. 또 하나의 고전적 의미로 한국시사韓國詩史에 한획을 마무리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목월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시 한 편을 신문사로 넘기고는 곧바로 상경했다. 원효로 4가 로터리 근처 여관에는 알 만한 시인들이 모여들었다. 빈소에 분향을 한 다음 용래 형님과 나는 가까운 술집을 찾았다. 시골 주막집 비슷한 막걸리 집이었다. 이미 용래 형님을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나를 만나자마자 손수건을 꺼내어 연신 눈물을 훔쳤다.
“내 서럽다. 한 형 서러워 죽겠다” “내사 애닯은 꿈꾸는 사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이게 정말이가?”
횡설수설이다. 막걸리 사발을 앞에 놓고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아예 울음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고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 삭아 내리는데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용래 선생의 격해진 울음은 차라리 독백처럼 번졌다. “어찌 갔나, 어찌 갔나?” 북에 소월 남에 목월이 아니냐. 4일 전에 목월을 만났는데 어찌 갔나. 어느덧 우리는 이마를 맞대고 말았다. 고만고만하게 취기를 가눌 수 없게 돼서야 여관으로 돌아왔다. 김광협金光協 시인이 우리를 기다리다 못해 안주용 오징어와 술 한 되를 놓고 갔다. 메모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간다는 짤막한 글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꼬박 밤을 샜다. 이튿날 아침 목월 선생님의 영구차는 용인에 있는 장지로 떠났다. 대절 버스에 몸을 기대니 지난밤의 피로와 취기가 일시에 몸을 덮쳐 나른했다. 이른 봄 날씨답게 먼 산의 아지랑이와 길 둔덕에 핀 개나리가 햇살을 받아 눈이 부셨다. 봄기운에 물이 오른 듯 키 작은 싸리나무들이 들판 가득 바람에 사운대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오르막길을 숨이 찬 듯 힘겨운 소리를 내며 기어올랐다. 멀리 산마루에는 뗏장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었다. ‘구름의 시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기나 하려는 듯 뗏장구름이 예사롭지가 않게 띄엄띄엄 떠 있었다. 열시쯤 되어 하관을 끝내고 일꾼들에 의해 봉분이 만들어지는 동안 용래 형님과 나는 볕바른 싸리나무 그늘에 누웠다. 격해진 감정도 조용히 가라앉히고 이내 코를 골았다. 어젯밤을 밝힌 졸음이 일시에 몸을 덮친 때문일까.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점심때가 되었다. 한 시간 가량의 수면으로 한결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목월 선생님의 묘소墓所가 깨끗이 단장되어 조문객들의 참배가 한창이었다. 용래 선생님과 나는 참배를 끝내고 그날 오후 선생님은 호남선 열차로, 나는 비행기로 서울을 떠났다.
5. 꽃이 지고 있겠죠, 물 위에
한기팔韓箕八 사형詩兄
꽃이 지고 있겠죠. 물 위에 하얀 동백冬柏꽃도 지고 있겠죠. 물 위에, 兄은 굽어보고 있겠죠. 무사히 귀향했습니까. 나는 그날 호남선湖南線 막차를 타고 왔어요. 인적人跡이 드문 밤 역두驛頭에 내리니 슬픔이 여분처럼 보슬비가 오고 있더군요. 허다한 말씀 줄이압고 앞으로 오직 좋은 시詩를 쓰는 길만이 작고作故하신 목월木月 선생님에 대한 예절禮節이라 믿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전주全州 이래以來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邂逅, 형兄의 뜨거운 우정友情을 잊지 않겠습니다. 변함없는 우정友情 감사합니다. 때때로 생각나시면 글월 주십시오. 부디 제주도의 춘한春寒에 몸 건승하소서.
1978년 조춘早春 박용래朴龍來
나는 「서귀포西歸浦」라는 시詩 한 편을 띄웠다.
마당귀에
바람을 놓고
귤橘꽃 흐드러져
하얀 날
파도소리 들으며
긴 편지를 쓴다
용래 선생님은 나에게 또「여우비」란 詩 한 편을 예쁜 엽서에 담아 보내 왔다.
오락가락
여우비
박쥐우산
주막집에
맡기고
비틀걸음
비
틀
걸
음
삼십리
또 몇 리
쪽도리꽃
보고지고
쪽도리꽃
보고지고
그것이 용래 형님과의 마지막 교우였다.
6. 미나리강 건너 굽은 꽃대궁
1980년 11월 21일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용래 선생님의 타계를 알리는 비보였다. 마침 나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으므로 선뜻 달려갈 수가 없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급작스런 운명이었다. 자세한 원인을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목월 선생님의 죽음을 같이 슬퍼하고 괴로워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태 만의 일이었다.
『제주신문사』와『현대시학』으로 애도의시 시詩를 보냈다. 이 두 분의 타계他界는 나에게는 크나큰 고통이었다. 그것은 그 분들의 시와 인간적人間的인 모습들이 어떤 의미에서건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적 풍토와 전통적 나의 시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용래龍來님 가시면
미나리江 건너 굽은 꽃대궁
그늘 디루고 살까
얼추얼추 춤도 못 추고
꽃대궁에 앉은
눈 먼 영혼靈魂
밤이면
무덤 속 드나들며 곰방대 털고
다 못 산한 恨
무덤가에
그늘 디루고 살까
옷을 입어도 오소소 추워오느니
낮은 바지울
빗소리 디루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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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그 두툼한 오바코트에 털실로 짠 빵모자와 농구화를 끈으로 잔뜩 동여매고 20여 분 후에 불쑥 나타났다. 집 볼 사람이 없어 하다가 몰래 빠져나왔다면서 연신 잘 왔다는 소리를 연발한다. 또 몇 번이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꺼냈다 한다. 그 알량한 원고료로 받은 우편환이 있으니 술값은 안심하라는 뜻이리라. 우리는 이내 술집으로 찾아들었다. 조금 늦게 오세영 시인이 도착했다. 그날 밤 나는 별명 하나를 얻었다. 말하자면 용래의 머리글자와 내 이름 기팔箕八의 끝 글자를 따서 용팔龍八형제로 하자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용래 선생을 용래 형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용래 형님과 여관에서 나와 비가 오는 길을 질척거리며 대전역까지 걸어나왔다.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쳐보고하다가 헤어졌다. 그 후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 시인의 산문에서
여덟 번째 시집을 묶는다.
내가 사는 이 바닷가
하늘 한 귀퉁이
휑하게 뚫린 구멍 하나
너무 커서
나는 밤마다
물떼새 소리로 잠이 깹니다.
― 시인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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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팔 시인
∙1937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
∙1975년『심상』1월호에 시「원경」외 2편이 신인상 당선
∙시집으로『서귀포(심상사,1078)』『불을 지피며(심상사.1983)』
『마라도(문학세계사.1988)』『풀잎소리 서러운 날(시와시학사.1994)』
『바람의 초상(시와시학,1999)』『말과 침묵 사이(모아드림.2002)』
『별의 방목(서정시학, 2008)』『순비기꽃(서정시학.2013)』등
여덟 권의 시집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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