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2023.6.5.
모든 물건에 모든 일에 가격이 매겨지는 시대다. 적어도 거래할 용의가 있는 이는 이 가격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만한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결국 가격이란 가치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가치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가치(가격)를 논하는 경제학에서 가치의 척도는 시대에 맞춰 바뀌어 왔다. 먼저, 중농주의자들은 농업을 부의 원천으로 보았기에 땅을 경제적 가치의 원천으로 여겼다. 반면, 리카르도, 마르크스 등은 재화와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는 투여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된다고 보고, 투입된 노동의 양으로 가격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신고전 경제학은 주관적 만족도가 가치를 결정한다고 본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기꺼이 지불하려는 가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는 경제학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현대의 경제학은 이 주관적 가치를 중시한다.
어쨌든 가치는 물건에, 용역에 고유한 것이 아니다. 가치란 사람이 부여하고, 인정하는 소중함, 필요성이다. 원시 사회는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만을 자연에서 취득하고 이용했다. 생존에 제일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식품이니 식품이 제일 가치 있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잠을 자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중요했다. 그리고, 인류가 더운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퍼져 나가면서 입는 옷이 필요했다. 이들을 얻고 가공하는 데 필요한 도구도 소중한 물건이었다. 아무튼, 원시 시대에는 인간의 생명 유지에 긴요한 것들만이 가치를 가졌다.
불과 1만 년도 안 되는 과거에 시작된 정착 생활은 농업, 어업, 축산업을 기반으로 하니 이와 관련된 것들이 새로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비로소 정착민의 생활 터전이자 식량의 원천인 땅이 소유해야 할 소중한 재산이 된다. 비옥한 땅, 물고기가 많은 어장은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이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역사상 지속되었다. 또, 정착 사회는 신분 사회이니, 주로 지배층에 한정된 일이겠지만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새로 중요한 가치를 획득했다.
근현대에는 산업 혁명과 기술 발달로 생산 단가가 하락하고, 품목이 다양해졌다. 즉,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일반인도 과거의 생필품 위주의 삶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차별화와 취향에 따른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과거에 없던 물품에 수요가 생기고, 대상에 따라 소중히 여기는 주관적 가치가 달라지고,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바뀌게 되었다. 생존에 필요한 기본 물품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부유한 사회일수록 식료품 같은 생필품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한다. 반면, 사치품, 기호품 또는 과시나 전시용 소비의 가치는 증대한다. 소비자는 광고와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서 이런 고가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높은 가격을 지불할 만하다고 세뇌당한다.
그러면 왜 갈수록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질까? 이는 광범위한 화폐의 사용과 더불어 갈수록 늘어나는 재화와 서비스의 상품화 때문이다. 과거에는 돈이 흔하지도 않았고, 돈으로 할 수 있는 일, 살 수 있는 상품도 많지 않았다. 현대 사회는 육아도, 간병도, 가정일도, 심지어 연인 관계 대행도 금전으로 살 수 있는 시대이니 거의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지는 게 자연스럽다. 이 대가를 우리는 돈으로 지불하니 돈이 최고라고 여기게 된다. 더구나, 소비는 우리의 삶의 자유를 입증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돈은 이 자유와 사회적 지위를 지탱하는 제일의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거의 모두가, 개인이던, 기관이던, 돈을 더 벌고, 더 갖기 위해 애쓴다. 부문별로 살펴보자
20세기 후반부터 은행 등 금융 부문은 예금을 받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생산 활동 등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본연의 역할에 매이지 않고 있다. 대출을 통한 신용 창조를 넘어, 단기 이익을 중시해 산업을 금융화하고 있다. 또, 주식, 채권, 부채의 증권화와 파생상품 거래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비생산적 활동으로 경제에서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고, 세계 금융 위기 같은 경제 위기를 부른다. 그럼에도, 금융 부문은 갈수록 산업 전체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면서 부유층의 부를 크게 늘리는 데 기여해 빈부 격차를 확대하기도 한다.
기업은 장기간의 이익을 추구하고, 근로자, 소비자, 사회 전체 등 모든 이해 집단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산업의 금융화로 수많은 경영자는 자사주 매입, 종업원 대량 해고, 우량 부문 분리 매각 등으로 단기간의 주주 이익(주가) 극대화, 경영자 보수의 지나친 인상, STOCK OPTION 행사에 골몰한다.
현대의 가계는 광고와 타인과의 비교로 늘어나는 소비욕에 허덕인다. 반면, 빈부 격차 속에 실질 소득은 정체 또는 감소해서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가계 부채를 늘려 소비를 지탱한다.
우리는 코로나 위기 때 생필품, 긴급 의료용품의 부족을 겪었다. 그랬으면서도 가장 필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많은 분들이 여전히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을 받고 있다. 극소수에 부가 집중되는 이런 경제 운용은 무언가 우리의 가치 부여와 분배 체계가 온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각각의 재화와 서비스에 왜 현재와 같은 가치를 부여하고 받아들이는가? 이는 우리가 각각의 재화와 서비스를 그만큼 필요하다고, 소중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인식은 주관적이다. 하지만, 이 주관은 개개인이 독자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지인과 사회의 영향 속에 생겨난다. 부가 거의 유일한 지위와 신분의 상징인 자본주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다수가 상호작용하는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을 받아들이게 된다. 산업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보다 귀금속이 비싼 것처럼, 생필품보다 사치품에, 명품과 유명 브랜드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흔쾌히 지불할 용의가 있는 것도 이런 외부 영향의 결과이다. 생계유지 수준을 넘어 늘어나는 부를 통해 성형, 사치품, 호화 여행 같은 과시적 소비에 비합리적인 가격을 매긴다. 이런 왜곡된 가격 체계는 삶에 긴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안정적으로 저가에 공급될 수 있기에 가능하다. 대다수가 생존을 걱정하지 않는 풍요로운 사회이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문제는 이런 가치의 왜곡이 중요하지(필수적이지) 않은 분야로 부를 집중시킴으로써 일어나는 불평등이다. 소비를 조장하는 풍조에 길들어 생존의 필요를 넘어 타인과의 차별을 위해, 과시를 위해 불필요하고 과도한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점이다. 이런 가치 왜곡 속에서 지나치게 소비와 돈을 추구하다 역사상 최고 수준인 불평등과 더불어 문명과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과 기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무엇이 진정 우리 삶에 소중한지, 꼭 필요한지 깊이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전통적인 가치와 공동체 정신이 사라지고, 물질과 금전이 우리의 사유 체계 전체를 좌우하는 것은 아닌가? 돈은 그 자체가 가치가 되어, 우리의 삶과 대인관계, 그리고 공동체를 지배한다. 이런 성찰을 통해 지금껏 당연히 받아들였던 시장의 가격에 의문을 품고, 무엇이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가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기초해 사물에 활동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바람직한 사회(공동체)와 지속 가능한 세계를 지향해야 하지 않겠는가?
**참고문헌
<<The Value of Everything: Making and Taking in the Global Economy>> by Mariana Mazzuca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