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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참관기
지방에 내려가서 여러 날 머물렀다. 주일 오후에 설교가 있어서 주말을 계속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주일 오전예배를 어디에 가서 드릴까 생각하다가 이번 기회에 타교단의 어떤 교회를 가 보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타교단 교회를 바로 알고 나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우리 교단 교회와 무엇이 다른지도 궁금했다.
3부 예배에 맞춰 좀 일찍 갔는데 교회 주위는 자동차로 혼잡하고 사람들이 주차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 좀 떨어진 곳에 겨우 주차하고서 본당에 들어서니 곧 예배가 시작된다. 필자는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면서 이 교회 목사의 설교는 어떠한가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들었다. 우선 설교자의 모습이 중후하고 진지해서 좋다. 또한 또박또박 원고를 봐 가면서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강해설교를 계속한다는 사실이었다. 성경의 한 권을 택하여 연속해서 설교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교 내용도 본문의 내용을 충실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 날 본문의 내용은 '술'과 '우상숭배'에 관한 것이었는데, 설교자는 본문을 따라 설명하면서 술의 폐해와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 성경 곳곳에서 관련된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쉽게 잘 설명해 주었다. 설교 시간 40여분 중에서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사람들은 재미있게 듣고 점점 설교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달변은 아니지만 성경 자체의 내용이 주는 능력에 점점 빨려들어감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강해설교의 위력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 시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이곳으로 몰려온다고 생각되었다.
이 교회 목사의 설교는 또한 적용이 풍부하고 좋았다. 처음에는 '술'에 대해 성경의 여러 가르침을 설명하다가 오늘날 현실의 문제도 지적하였으며, 특히 '우상숭배' 부분에 대해서는 적용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성경 강해가 충실하고 또한 적용이 잘 되었다. 역시 대교회 목사의 설교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대교회 목사들의 설교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이분의 설교는 급하지 않게 또박 또박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용이 있는 진지한 설교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아주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런데 이 설교의 단점이랄까 문제점도 말을 하고 마쳐야 할 것 같다. 그냥 좋은 것만 말하고 마치면 더 나은 설교를 위한 자극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제자들과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게 해 주기 위해 좀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신학자인 나의 사명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을 느꼈다. 문제점이라기보다 개선했으면 좋겠다는 점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침묵'에 대한 강조이다.
물론 오늘날 너무 말이 많고 말 때문에 문제가 많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오늘 설교 본문의 제일 마지막 구절이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구절의 의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 피조물이 겸비해야 할 것을 말한 것인데, 이것을 기도에 적용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것을 말하고 침묵기도를 강조한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도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할 때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청구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며 하나님께 나아와 말하는 것이다. 감사와 찬양, 자백과 회개, 그리고 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의 말들을 하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침묵이다. 침묵은 침묵이지 기도가 아니다.
물론 중세 수도원에서 '침묵'을 강조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중세 수도원의 '침묵' 강조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다분히 플라톤 철학, 특히 후기 플라톤 철학(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곧, 참 신은 순수한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더러운 육체로 나아가기보다는 영혼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보는 헬라의 이원론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중세 교회는 입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보다, 그런 것이 없이 고요히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다(cf. P. W.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in: Hellenism-Judaism-Christianity, Leuven: Peeters, 1998, pp.293-315).
후기 플라톤주의자들은 신적 존재를 비물질적이고 순수히 영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침묵기도(silent prayer)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합당한 수단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주후 3세기의 플로티누스(Plotinu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먼저 신 자신을 부르는데, 큰 소리로써가 아니라 항상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그런 기도의 방식으로 부른다. 곧, 홀로이신 분에게 외로이 영혼으로 그를 향하여 갈망하는 것이다."(Ennead V 1, 6) 그의 제자인 포르피리(Porphyr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당한 방식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자. 곧, 다른 능력들에게 다른 희생 제사를 드리자. 만물 위에 계신 신에게는, 어떤 현자(賢者)가 말했듯이, 감각의 세계에 속한 어떤 것으로도 제물을 드리지도 말고 바치지도 말자. 왜냐하면 비물질적인 본성에 비추어 볼 때 즉각적으로 부정(不淨)하지 않은 어떤 물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신에게는 목소리도, 내적 언어도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충동에 의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수한 영혼과 신에 대한 순수한 개념들을 가지고 심오한 침묵으로 그를 경배해야 한다."(De abstinentia II 34, 2) (이 본문들은 Van der Horst, 앞의 논문, p.303f.에서 참조하였음). 이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중세 가톨릭 교회는 영성의 요소로서 oratio(기도), meditatio(묵상), contemplatio(관조)를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에서도 이런 침묵기도 또는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다(빌 4:6). 바울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했다(롬 1:9; cf. 빌 1:4; 엡 1:16 등).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옥중에서 소리 내어 기도하고 찬송했기 때문에 주위의 죄수들이 들었다(행 16:25).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다(행 4:24). 그렇게 기도하기를 마치자 모인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한다(행 4:31). 오늘날 서양 학자들도 초대 교회는 소리 내어 기도하였다고 인정한다(cf. J. van Eck,Handelingen, Kampen: Kok, 2003, p.44). 이것은 유대인들의 기도 전통이었다. 다윗은 환난 중에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시 3:4; 5:2; 16:2; 17:1; 18:6 등 많은 곳). 다윗의 기도는 대부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였다.
따라서 가능한 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이며 성경적인 기도임을 알 수 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서 부득이한 경우에만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는 경우들이 있었다(느 2:4). 또는 한나의 기도처럼,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내용이거나 사적인 내용인 경우에도 속으로 조용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한나는 아무 말도 안 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말하였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삼상 1:13). 즉, 한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기도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아무 말도 없고 생각도 없는 절대적인 침묵인 '관조' 또는 '관상기도'와는 다르다.
어쨌든 기도는 부족한 인간이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아뢰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그런 것은 묵상이고 명상이며, 이방종교에서 하는 참선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 이방종교에서는 인격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모든 말을 끊고서 자기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혼자서 조용히 명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나님이 기꺼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인격적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하고 우리의 사정을 아뢰며 또한 필요한 것들에 대해 도움을 청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침묵하고 있으면,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이방종교에서 참선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온갖 인간적인 잡념이 떠오르고, 자칫 영적으로 이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 세상이 번잡하고 문제가 많은 것은 잘못된 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치료하는 방법은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말을 하는 것이다. 곧, 감사의 말을 하며 참된 말을 하며 은혜로운 말을 하는 것이다(엡 4:29). 이런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 많이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급한 마음으로 말들을 늘어 놓지 말고(전 5:2), 침착하고 차근차근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며 또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또 여러 가지로 간구해야 한다. 자기 자신만 위해 기도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물론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잘못된 말들은 참된 말들로 대체해야 하며 침묵으로 대체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또다른 악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우상을 제거하면 참 하나님께로 돌아와야지(살전 1:9), 우상만 제거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결국 구원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는 잘 말했지만, "...으로의 자유"(Freedom to ...)는 말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는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라는 좋은 질문을 던졌지만, 그러나 '존재'(to be)라는 것은 모호하고 막연한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데에서 벗어나서 해방되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계속 광야에 머물러 있으면 결국 죽음밖에는 없다. 그렇게 되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보다 더 못하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올바른 질문은 "소유냐? 존재냐?"가 아니라 "소유냐? 소속이냐?"(To have or to belong?)가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 속할 때 우리에게 참 자유가 있는 것이다. 참 자유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속할 때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참된 기도는 세상의 잘못된 말들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올바른 말을 아뢰는 것이지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말, 참된 말의 모범은 시편에서 찾을 수 있고 나아가서 성경 전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도는 물론 '마음'으로 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하나님이 주신 '입'을 사용해서 한다. 그리고 시편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육체를 사용해서 기도하는 것은 결코 부정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케 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한 입술로 드리는 기도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플라톤 철학과 중세 수도원에서처럼 영혼의 기도가 가장 깨끗하고 좋다는 생각은 이방 철학의 이원론 사상이다.
물론 위 설교자는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평범하게 요즘 사람들은 너무 쓸데없는 말들이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좋게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유행하는 침묵, 침묵기도, 관상기도 배후에는 이런 배경이 있음을 우리가 알고서 조심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에 대해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이 얼마나 옳고 참되며 좋은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 지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는 말이다.
요즘 성도들이 이런 말들을 많이 하지만, 이것은 사실 위험하고 잘못된 말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벗어나서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주관적이며 신비주의적이며 따라서 위험한 것이다. 물론 기도 중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도 한다. 이를 위해서는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구하기만 하지 말고 때로는 기도 중에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기도 중에 내가 하는 생각이지 또는 내게 떠오르는 생각이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다. 내 생각은 잘못될 수도 있고 수정될 수도 있고 변경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것이며, 그것만이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면 신비주의가 되고 심하면 이단이 될 수 있다. 이단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성경 외의 직통계시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이런 위험한 표현을 너무 많이 쓰며, 목회자들도 그런 표현을 너무 쉽게 쓰는 것 같다. 물론 위 설교자도 신학적으로 그런 정도는 아닌 줄로 생각하지만, 설교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한 표현이 요구된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두 가지만 제외한다면 지난 주일의 이 설교는 좋은 모범적인 설교였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를 순서대로 강해해 내려가면서 오늘날 삶에 적용하는 것이 좋았다. 이런 류의 강해설교가 앞으로 한국 교회 강단에 퍼져가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를 기원한다.
원제 : 교회 참관기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첫댓글 긴급-전혀 후원이 안되네요... 카페도 운영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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