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에는 머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멋이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머리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우리 시대에는 ‘상고머리’라고 해서 옆머리와 뒷머리 아래는 짧게 깎고 윗머리는 예쁘게 다듬는 머리가 유행이었다. 대개 눈을 찌를 듯이 앞머리는 일자로 정리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이발소 의자에 컬터 앉자 이발사가 흰 가운을 덮어주며 묻는다. “머리를 어떻게 잘라줄까?” “예, 제가 다음 주에 중학교에 들어갑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발사는 바리깡으로 무자비하게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눈앞에 떨어지는 길다란 머리칼을 보며 ‘울컥’ 눈물이 솟았다. 13년 동안 길러온 머리칼이 힘없이 나뒹구는 그때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하나 더, 이발사는 어디서 고기 한 점을 드셨는지 ‘쩝쩝’거리며 머리를 깎아댔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으면 문득 그 이발사 아저씨가 생각난다. 그 시절에 학생들은 머리를 기르는 자유가 없었다. 아마 일제 잔해가 남아있었기 때문이고 군사정권 시대라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빡빡”머리를 하고 중학시절이 시작되었고 무려 6년 동안 우리는 머리 기르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고교시절에는 두발 단속이 더 심했다. 가끔 급시에 ‘용의복장검사’를 실시하였다. 손톱의 청결 상태로부터 복장을 넘어 두발까지 훑어내는 검사였다. 이게 좀 심해서 머리가 길다 싶으면 아예 선생님이 머리 한복판에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를 내버렸다. 누군가는 그 검사를 피하려고 교실 밖 난간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다가 추락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나도 고 2때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그 일을 당하고 말았다.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그것도 평소 신뢰하던 선생님에게 당한 터라 후유증이 심했다. 해서 설악산 수학여행 사진을 보면 ‘까까머리’ 일색이다.
고교 졸업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얼굴이 변해있었다. 3년 동안 입은 교복은 낡아져 죄어오기까지 해 ‘짝’ 달라붙었고 무엇보다 머리모양이 완전한 변신을 유도했다. 길어봐야 스포츠형 정도였는데 길게 늘어뜨린 하이칼라가 아이들의 인물을 살게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아이들은 신사가 되어있었다. 거기다가 교문을 나서며 피워 문 담배는 이제 성인이 된 우리를 인증시켜주는 듯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더디 가던 시간은 속도를 내더니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 만나는 동창생들. 먼저 머리가 거의 없다. ‘속알머리’가 없든지 ‘주변머리’가 없다. 그 많던 머리가 어디로 갔는지? 유전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이미 훤하다. 20대에 우리는 만나면 머리를 흔들기 바빴다. 자꾸 앞으로 쏠리는 머리를 바로세우기 위해서였다. 내가 전도사 시절에는 강대상에서 머리를 흔들며 설교를 해야 했다. 때로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흔들 머리조차 없다.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젊었을 때에는 자유자재로 머리모양을 바꾸어 가며 멋을 내지만 나이가 들면 머리숱도 적어지고 얇아져서 대부분 ‘파마’로 커버할 수밖에 없다. 남자들은 ‘커트’만 하면 되지만 여성들은 머리에 들이는 정성이 대단하다. 여성들에게는 머리칼이 생명인 것 같다. 모양도 칼라도 다양하다. 해서 오늘도 여성들의 머리는 피곤하다. 머리모양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일단 머리숱이 많으면 젊어 보인다. 거기다가 염색을 적당히 해주면 동안을 유지하는 비결이 된다. 이제는 만나면 사람의 머리부터 본다. 머리가 건재한 사람은 별개지만 잠을 자고나면 자꾸 빠지는 머리는 스트레스가 된다.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머리가 자존심인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우탁’의 “탄로가”(嘆老歌)가 생각난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지금 그대로가 아름다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