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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문화 >
중도(中道)를 향한 길,
두 번째 부처(The Second Buddha)
루빈 미술관 외경
(The Rubin Musem of Art)
전시회 관람기
(한국언론진흥재단 장기해외연수자)
루빈 미술관 내부 전경
2011년 6월 4일, 필자는 미주현대불교 김형근 발행인의 배려로 업스테이트 뉴욕에 위치한 백림사에서 열린, 뉴욕한국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선(Zen) 워크샵에 취재를 겸해 참가할 수 있었다.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북쪽으로 달려가면 캣스킬(Catskill)이라는 거대한 숲 지대에 다다른다. 이 지역에는 많은 캠핑장과 더불어 중국, 티벳, 한국, 일본 등 각 나라의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다. 뉴욕의 백림사는 캣스킬(Catskill) 산 안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이다.
이 날 이곳에서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인 문화, 예술인들을 위한 선과 명상에 관한 워크샵이 열렸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 무교 등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예술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명상과 선에 대해 배우고 서로의 예술 세계를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그 날 저녁 3시간에 걸쳐 30여명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자리였다. 서로 다른 개성과 무공(武功)을 지닌 무림(武林)의 고수들이 펼치는 향연을 보듯 큰 감화를 받았던 기억이 7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예술인들의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백림사의 혜성스님께서 예술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화선지에 붓글씨로 화두(話頭)를 손수 써서 나누어 주셨다. 당시 나에게 던져진 화두는 ‘중도(中道)’. 나는 당시 그 화두를 받고 공영방송의 언론인으로서 이명박 정권의 언론탄압에 문제제기를 하며 이런 때에는 중도가 아닌 반대 진영의 논리에서 논지를 이끌고 나가 싸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며 혜성스님과 약간의 논쟁을 벌였다. 큰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내 말씀을 이어가셨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은 쾌락과 고행의 양쪽을 겨냥해서 양극단이라 칭했다고 하셨다. 당시의 인도의 중생들도 양극단에 서있었다. 세속의 보통 사람들은 고통을 멀리하고 물질, 애욕 등 감각적 쾌락(快樂)을 추구했고, 출가해서 수행자가 된 사람들은 반대로 절대적 고행(苦行)을 추구했다고. 부처는 수행지인 녹야원(鹿野苑)에서 양극단을 바라보며 둘 다 아니라고 했다. 쾌락도 아니고 고행도 아닌 다른 길. 그 길로 함께 가자고 중생들을 이끌었다. 그래서 그 길의 이름이 ‘중도(中道)’이다. 그 길로 가야한다고 하셨다. 중도에는 집착도 애욕도 그리고 고집도 없다고. 당시에는 큰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말씀의 깊은 뜻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혜성 스님은 필자와의 논쟁을 마무리하며 “중도(中道)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 질 겁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캣스킬의 장대한 숲 너머로 무수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보통 불도 수행자들은 화두를 안고 깨달음을 위해 3개월 동안 씨름을 한다고 했다. 나의 화두는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나 거대했고 지금도 그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평생을 두고 씨름을 해야할 지도 모르는 화두인지 모르겠다.
미술관 전시실 2층
더 세컨 붓다
7년이 지난 2018년 3월 28일 오후, 루빈 미술관(The Rubin Museum of Art)을 방문한 필자는 한 전시회를 보며 다시금 ‘중도(中道)’에 대한 화두를 떠올릴 수 있었다. 루빈 미술관은 뉴욕 맨해튼의 첼시(Chelsea)에 위치한 불교 미술관으로 히말라야와 인근 아시아 지역의 불교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지난 2004년 개관한 이래 불교 관련 예술품전시뿐만 아니라 영상, 콘서트, 미디어 설치 작품, 무대 위에서의 토론 등 다방면의 창구를 통해 불교문화를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번에 루빈 미술관에서 힘을 주어 전시하고 있는 것은 미술관 6층에서 열리고 있는 ‘The Second Buddha: Mater of Time전(展)’이다. 제 2의 부처라고 칭해지는 ‘파드마 삼바바(Padmasambhava, 연화생(蓮華生))’라는 고승(高僧)을 조명하는 전시회이다. 파드마 삼바바는 8세기 인도의 종교가로 불교를 티벳에 포교한 고승이다. 그가 전한 불교가 미래 세대를 통해 계승되어 인도후기밀교(Tantric Buddhism)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후에 라마교(Lamaism)로 계승되어 현재의 티벳 지역에서 널리 믿고 있는 중심적인 불교의 종파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파드마 삼바바는 미래 세대를 위해 인도의 불교를 티벳 지역에 전했고, 그 과정에서 티벳 지역의 다양한 변덕스러운 신들과 악마들을 불교의 기치 아래 복속시켰다고 한다. 이는 아마 비유적인 이야기로 파드마 삼바바가 인도의 불교를 전하면서 당시 티벳 지역에서 널리 믿어지던 다양한 토속 신들을 받아들이고 미신을 타파하며 부처를 중심으로 불교신앙이 이루어지게 노력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티벳의 고유한 토속 신앙, 샤머니즘적인 숭배 대상을 말살한 것이 아니라, 중도(中道)적인 입장에서 대승불교의 장점과 소승불교의 장점을 티벳의 중생들에게 전하고 또 이것이 티벳의 토속 신앙과 문화와 혼합이 되어 지금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교의 형태가 되어 그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번 전시회가 주제로 하는 것은 바로 그 ‘중도(中道)’의 정신, 그리고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축에 대한 화두이다. ‘과거’라고 함은 깨달음을 얻고 열반의 경지로 들어간 부처가 설법을 하던 시기이고 ‘현재’는 바로 파드마 삼바바(Padmasambhava)라는 고승이 부처의 가르침을 티벳에 전하는 시간, 그리고 ‘미래’는 부처의 가르침이 이어져 티벳과 인근 지역에 인도후기밀교(Tantric Buddhism)와 라마교(Lamaism)가 탄생하는 시간을 칭하는 것이다. 불교가 전 세계에 맥동치는 2018년을 ‘미래’라는 축으로 놓고 보았을 때 ‘현재’는 티벳이 토속 신앙을 벗어나 불교의 땅으로 변모해가는 시기가 될 것이고, ‘과거’는 바로 파드마 삼바바가 8세기 중엽 이 지역에 불교 포교의 씨앗을 뿌리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 행한 나의 행동이 인(因)이 되어 현재와 미래에서 과(果)로 되어 나타나는 불교의 기본 법리인 ‘인과(因果)의 법칙’을 시간의 축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시간의 축을 통한 ‘과거-현재-미래’의 순환은 이번 전시회 자체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다. 티벳과 히말라야 지역에서 전해지는 ‘과거’의 유물들이 전시관에 전시되어 지금의 이 시대, 즉 ‘현재’를 살아가는 관람객들에게 보여 지고 있고, 현재를 단순히 현세대에게만 보여주는 것이 아닌, ‘미래’의 테크놀로지를 적극 활용하여 ‘미래’의 세대에게 불교 미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유물들이 현대 작가들의 불교 미술품과 함께 놓여 있어 관람객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불교 미술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루빈 미술관에서는 미술품들을 2차원적인 평면적 공간에 단순하게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과 더불어 미래의 주요 테크놀로지 중 하나인 증강현실체험(AR, Augmented Reality)을 통해 다양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술품과 더불어 주변에 설치된 기계 장치를 통하여 관람객이 전시품들과 직접 상호 교감을 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한 방식을 도입해 불교 미술품을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술 전시품 앞에 있는 테이블에 태블릿PC가 놓여있어 관람객이 태블릿PC를 들고 화면을 들여다보면 미술품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나고 관련 정보들이 화면에 뜨는 증강 현실 체험을 할 수 있다. 영상 미디어 전시의 경우에는 히말라야 트레킹 장면이 나오는 화면 옆에 놓여있는 헤드폰을 사용해 그 장소의 소리를 직접 들으며 마치 내가 히말라야의 고산이나 오래된 사찰에 들어와 있는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불교 미술관이라고 해서 과거의 고답적인 방식의 일차원적 전시 방법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다른 미술관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입체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미술품 증강현실 체험
미술관 가이드
특별 전시장
루빈 미술관을 둘러보던 중 오후 1시와 3시에 가이드가 함께하는 미술관 투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오후 3시 투어에 합류하기로 했다. 로비에서 기다리자 테스(Tess)라는 키가 훌쩍 큰 중년의 여성 가이드가 관람객을 불러 모으고 안내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2층에서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테스는 투어에 참가하는 관람객들을 데리고 나선형 계단을 올라 2층에 위치한 불화 앞으로 향했다. 우리들 눈앞에 거대한 수레바퀴가 부처를 둘러싼 그림이 펼쳐진다. “이 그림은 ‘윤회의 고리(The Wheel of Life)’입니다. 보다시피 탄생(birth)에서 죽음(death)으로 시간이 이어지고 다시 환생(rebirth)하는 끝없는 숙명의 고리를 보여주는 그림이죠. 부처가 수행을 통해 숙명의 고리를 끊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죠. 우리가 쌓는 업보(Karma)가 씨앗이 되어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결정하고 그것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그림을 통해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저희의 특별 전시회인 ‘The Second Buddha : Master of Time전(展)’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핵심이죠.” 내가 하는 현재의 생각과 행동, 선택이 나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고,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현재도 나의 과거의 생각과 행동이 원인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재는 다시금 나의 미래를 낳는 씨가 되는 것이다. 범부가 벗어날 수 없는 이 윤회의 고리를 끝내고 깨달음을 얻은 이가 바로 파드마 삼바바(Padmasambhava)이고 그의 가르침이 이어져 그와 관련된 조각상, 그림, 그리고 증강현실을 통해 지금 루빈 미술관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우리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6층으로 향했다. 테스는 파드 삼바바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들을 설명해 주었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파드마 삼바바는 다나코샤(Dhanakosha)라고 하는 호수의 연꽃 위에서 아미타불로서 태어났다고 전해져요. 그는 티벳의 많은 왕들을 도와 8세기 후반 티벳 사람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죠.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티벳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대지와 산의 정령과 신들을 블교라는 가르침 아래 복속시켰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파드마 삼바바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가르침 중에 당대의 중생들이 깨닫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들은 숨겨서 봉인해 두기도 했죠.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미래 세대를 위해서 말이에요. 그의 헌신적인 포교활동은 티벳을 불국토를 바꾸었습니다. 지금도 히말라야의 곳곳에는 그의 발자국, 손자국이 남아 있다고 믿어지는 돌들이 있어요. 티벳 사람들은 그를 ‘제 2의 부처(The Second Buddha)’라고 부른답니다.”
파드마 삼바바 조각상
그가 아미타불로 현현해 보살들과 함께 중생을 구제하고 불법을 포교한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티벳의 모습을 낳았고, 그 불교의 정신은 미래 세대까지 유구하게 전해지고 있다. 파드마 삼바바(Padmasambhava)는 불교의 포교자로 자신이 믿고 수행하는 종교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티벳 현지의 토착 신앙을 존중하여 불교가 이들과 융합하여 티벳의 민중에게 스며들 수 있도록 두터운 기반을 만들었다. 그가 실천한 서로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는 정신, 즉 불교의 기본 정신인 ‘중도(中道)’가 있었기에 8,000미터의 험준한 고봉들이 늘어선 척박한 히말라야 지역의 곳곳에 부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었다. 루빈 미술관의 이번 전시회를 통해 나만 옳고 다른 것은 모두 그르다는 극단의 마음을 버리고 양극단이 아닌 중도(中道)에 진실이 있다고 믿었던 파드마 삼바바의 정신을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제 3의 길을 택하였기에 티벳을 비롯한 히말라야 인근 지역의 나라들에게까지 불교의 유산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도(中道)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가장 낮은 존재임과 동시에 가장 높은 존재라고 역설했던 예수 역시 부처와 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예수의 13세부터 29세까지 약 16년간의 행적이 비어있다. 성경에도 밝혀져 있지 않은 행적에 대하여 수많은 의문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 때 예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깨달음을 위해 열사의 사막을 거닐고 있었을까?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어디선가 불도 수행을 하고 있었을까? 신비에 쌓여있던 이 기간 동안 예수가 불교를 수행하던 이름 높은 고승(高僧)이었다는 한 석학의 주장이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예수가 불도수행을 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극단의 삶을 경계했다. 예수는 기독교의 정신을 통해 부처와 마찬가지로 중도(中道)를 실천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나는 가장 높은 자요 그리고 가장 낮은 자다.”라고. 예수는 알파만 좋은 것도 오메가만 좋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부정을 하며 자기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집착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천국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부처가 양극단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나아가 중도(中道)를 구해 깨달음을 얻었듯이 예수 역시 양극을 좇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민중을 위해 중도의 길을 구한 것이다. 이 지점이 부처와 예수가 통하는 부분이다.
종교를 뛰어넘어 진리의 길이 ‘중도(中道)’라는 길 위에서 만나고 있다. 7년 전 혜성스님이 던진 화두는 아직도 나의 머리에서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앞으로도 그 고민은 내가 생을 이어가는 한 계속될 것이다. 언젠가 나에게도 문득 깨달음이 찾아와 붓다와 예수처럼 마음의 평화의 찾는 날이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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