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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2010년 8월 7일, 옥천 정지용 향수 시인학교에서 강은교 선생님을 만나 뵙고, 선생님의 근황과 추억, 그리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0년 11월호(2010, November)
□ 강은교(姜恩喬) 시인
1945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경기여자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사상계》신인문학상에「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상, 1992년 제37회 현대문학상, 2006년 제18회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허무집』(1971),『풀잎』(1974),『빈자일기』(1977),『소리집』(1982),『붉은 강』(1984),『오늘도 너를 기다린다』(1989),『벽속의 편지』(1992),『어느 별에서의 하루』(1996),『등불 하나가 걸어오네』(1999),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2002),『초록 거미의 사랑』(2006)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우리가 물이 되어』(1986),『바람노래』(1987), 한국의대표시인100인선『그대는 깊디 깊은 강』(1991) 등이 있다. 산문집에는『그물 사이로』(1975),『추억제』(1975),『도시의 아이들』(1977),『시인수첩』(1980),『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1984),『어두우니 별뜨는 하늘이 있네』(1985),『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면서』(1993),『허무 수첩』(1996) 등이 있고, 동화집으로『하늘이와 거위』(1994),『저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1996),『삐꼬의 모험』(1997) 등이 있다. 역서로 H. D. Thoreau의『소로우의 노래』(1999)가 있고, 산문詩話集으로는『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2000),『토요일에 읽는 시-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2005),『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2009) 등이 있다. 현재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 김명원 시인
195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박사이다.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와 『달빛 손가락』이 있고, 2002년 '노천명문학상'과 2007년 '성균문학상' , 2008년 제13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이며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이다.
김명원의 시인탐방 10 허무의 바다에서 길어 올린 소리 채집가, 강은교(姜恩喬)
허무의 바다에서 길어 올린 소리 채집가, 강은교
누군가에게 뒷덜미가 단단히 잡혀 있다고 생각될 때, 혹은 유독 나만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잠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슬프고 울적할 때, 혼자라는 명료한 상념에 어쩌지 못할 때, 나는 강은교 시인의 시집을 펼친다. 그녀의 시집 갈피 마다에서는 혼자였던 시인의 시간들이 무수히 쏟아진다. ‘혼자’를 당당하게 견디었고, 혼자에 가장 정직하였고, 혼자임을 시로써 증명해 보이고 즐겼던 분, 바로 강은교 시인이다. 뇌를 쪼개는 수술로 죽음을 감당해야 했던 절명의 순간을 기억하며, 생래적으로 부여받았던 존재론적 허무의 발자국을 따라 시의 지도地圖 그리기를 감행하였던 분, 평생 시를 가르치는 내력과 시 쓰는 시업을 각고하며 혼자이기를 스스로 간원하고 실행하였던 분, 그 분은 강은교 시인이다. 우리는 그녀의 시「순례자의 잠」을 암송하면서 도도하게 흘러가야 하는 실존의식을 배웠으며,「사랑법」을 통해 사랑의 배면에 놓여 진 절대 침묵의 공동에 감읍하였다. 그러기에 그녀를 회억해 내는 자리에는 우리의 70년대 자화상이 나란히 놓여진다. 시집『허무집』(1971)과『풀잎』(1974)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젊음의 편협한 도정에서 내몰리는 우리들에게 그녀는 도저한 시의 여신으로 군림했던 이유이다. 우리는 괴로운 세상으로부터 도망하여 칩거한 채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였기에, 황홀하고 신비롭기까지 한 그녀의 주술적 허무에 기꺼이 입맞추며 허무의 목 탄 세례를 받았다. 이후 상재된 시집들에서도 끊임없이 표출되는 고독과 비극의식은 90년대에 들어서 화해와 화합의 구도로서 ‘작은 것들’을 노래하고 있음에 주목된다. 이에는 과거의 시 세계를 집도했던 ‘고통’이라는 응결된 긴장의 끈이 풀어지며, 허무의 제의 대신 역사와 사회에 대한 ‘소통’이라는 따스한 일상적 입문을 통해 자기 구원을 꾀하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시인의 시는 종래의 어둠을 딛고 생생한 생활의 발견으로 나아간 것이다. 나는 다시금 시인의 시들을 음미하며, 네, 하고 순종한다. 그녀가 가르쳐 주었던 죽음과 통절의 세계로부터 충만한 삶과 통합의 세계로까지 우리는 그녀를 믿고 따랐으며, 그녀를 사랑하고 애절하게 추종하였던 까닭이다. 그녀처럼 늘상 혼자이면서 그녀와 함께이기에 전혀 혼자이지 않았으며, 그녀처럼 외롭고 암울한 비극적 행로에 놓여 있었으면서도 고난의 강을 건너「우리가 물이 되어」그녀와 함께 흘러왔기에 그 행로는 빛나고 눈부신 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녀가 안내한 다순 대지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그녀의 시 속에서 사물들이 개화하는 율동을 바라보며, 그녀가 퍼부어 주는 눈물겨운 싱싱한 광합성의 소리들을 감상하기 시작한 연유일 것이다. 강은교 시인께 전화를 드렸던 날은 유독 더웠다. 시인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날들 역시 더위와 함께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가을이 들어선다는 입추에 만남이 이루어졌다. 가을다운 바람이 부는 옥천의 선선한 8월 7일 오후, 지용회와 시와시학사 주관으로 열린 ‘제1회 정지용 향수 시인학교’에서 뵌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시인학교에 먼저 와 계셨다. 어제 뵈었다가 오늘 다시금 일상 속에서 만나는 것처럼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맞아주셨다. 단발의 굵은 퍼머넌트 웨이브에 진한 카키색 남방에다 검정 티셔츠를 받쳐 입으신 모습은 세련되고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었고, 나는 금세 행복해졌다.
‘집’은 시가 창작되는 영감의 장소, 그리고 ‘출가出家’ □ 강은교: 저는 집을 나서면서 오늘도 출가出家한다고 생각해요. 출가? 집을 나서는 것이지요. 언제부터인가 저는 집을 나서는 것을 ‘출가’라는 것으로, 그 시각을 계획표에 표시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출가하는 시각에 나를 배웅하는 것이 있어요. 종鍾이에요. 그것도 큰 종 한 개에 작은 종들이 대여섯 개 달린 것이죠. 그 종은 버클리에 잠시 있을 때 만났던, 얼굴도 모르는 독자로부터 받은 선물였어요. 내가 종을 좋아한다고 어느 산문집에 쓴 글을 그녀가 읽었던 것이지요. 버클리를 떠나 돌아오니 걸 데가 없어서 그냥 놓아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출가하면서 현관에 있는 벤자민 나무 가지를 종의 자리로 만들어 주게 된 것이랍니다. 아주 안성맞춤이었어요. 제가 깨어 출가하는데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집을 나설 때면 벤자민 나무에 걸어 둔 종을 한 번 흔들어 줘요. 그러면 그것들은 못견디겠다는 듯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나의 가방에, 머리카락에 얹어 주고요. 나의 출가, 나의 떠남은 오늘도 누구인가를 깨워야 할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아니 ‘강은교여 깨어나라, 깨어나라’하고 나를 깨워야 할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에요. ■ 김명원: 종을 치면서 매일 출가하시는 모습이 신선합니다. 선생님, 이번 여름은 참으로 혹독하게 무더웠는데요. 끝날 것 같지 않던 이 여름도 끝을 보입니다. 오늘이 바로 가을이 들어선다는 입추니까요. 제가 수영을 혼자 스스로 배워 터득하면서 깨달을 게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물에 완전히 뜨지 못했던 것은 물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지요. 나의 온몸을 결코 주려 하지 않았던 거예요. 내가 주려 하지 않는 온몸을 물이 받아주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거든요. 그러니 사랑하는 것은 내 몸의 힘을 전부 빼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사랑에게 아무 보상없이 자기를 던지는 일인 것이지요. 가을이 하는 것처럼요. 가을이 저의 몸을 겨울 앞에 던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 김명원: 선생님, 저는 한 잡지에서 선생님 시집 서평을 쓰면서 이렇게 서두를 시작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스무 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사십여 년 동안 시로 밥을 짓고, 시와 산책하고, 시로 염색한 부산 바다가 내다보이는 창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강은교 시인”이라고 말이지요. 선생님 시와 산문에서 보면, 부산 바다와 선생님은 떼려고 해야 뗄 수가 없는 밀접한 관련선상에 있는 듯이 보입니다. 지금도 다대포 바다가 내다보이는 아파트에서 사시나요? □ 강은교: 다대포가 바라보이는 집에서 한동안 살았지요. 그 후엔 구덕산 아래에서 살다가 얼마 전에 청룡동으로 이사 했고요. 저한테 집은 시가 창작되는 영감의 장소이지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가 만들어지거든요. 낯익은 공간에 익숙해져서 시가 나오지 않으면 또 이사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요. ■ 김명원: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월남하여 성장기를 이루었던 서울을 떠나신 후 지금까지 줄곧 부산에 살고 계신데요. 부산으로 오신 계기는요? □ 강은교: 이 답변에는 어머니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 조선 시대의 가치관에 투철히 물들어 계시던 어머니는 삼형제의 맏이었던 제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어 하셨지요. 막내인 남자 동생에게 모든 희망을 거시는 모양은 늘 저를 슬프게 했어요. 저도 잘 할 수 있었는데요. 아무튼 어느 날부터인가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또 문제였지요. 어머니는 글을 쓴다고 제가 방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고, 그래서 저의 글쓰기는 몰래몰래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밤 한시에도 제 방 문을 열고 후다닥 들어오셔서는 제 방의 불을 꺼버리시던 어머니였고요. 제가 신문에 실린 문학 기사를 스크랩할라치면 왜 그리 신문지를 쥐처럼 쏠아놓느냐고 화를 벌컥 내시곤 하셨어요. 왜냐하면 어머니는 신문지를 모아 팔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그 넝마 아저씨에게 온전한 신문지를 가져 오라고 잔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였죠. 그런 여러 가지 일로 저의 심리적 정황은 ‘어머니의 인정’이 가장 필요한 절박함에 놓여 있었고요. 그러다가 1983년에 취직을 계기로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되었고, 지금까지 부산에 살고 있지요. 생각해 보면 저의 ‘문학하기’가 어머니의 힘이었음을 새삼 깨닫곤 해요. 저는 문학을 가르치면서 문학의 동기라든가 계기로서 결핍이나 장애 등을 이야기하게 되고, 결국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끄적이거나 그런 것에 반항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런 심리적 힘을 준 사람이 어머니셨거든요. 어머니께서는 서울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 백일 된 저를 업고 임진강을 건너 동두천에 도착하셨다고 해요. 다섯 살 위 언니는 젖을 안 먹어도 되니까 동해 바닷가 함경남도 홍원에 있는 강씨 마을에 남겨놓고서 젖먹이인 저만 울까봐 입을 꼬옥 틀어막고 월남하셨던 것이지요. 어머니가 금단의 사립문을 열고 집을 나오게 된 이유는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일념에서였대요. 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신다고 바람같이 집에 잠깐씩 들르시는 식이었고, 결혼도 그 잠깐 동안 고향에 계실 때 친척들이 치뤄 준 것이었고요. 그 날 어머니는 ‘서울에서 제일 크고 높은 집’이라는 주소만을 들고 신발을 아끼느라고 맨발에다가 밤새 걸어 새까매진 얼굴로 갓난 아기와 함께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어서셨던 거지요. 아버지를 한번 만나기만 하고 돌아간다는 것이 휴전선이 막히고 6·25가 터지고 그 난리 속에서 우리 형제들을 키워내셨고요.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하위단위에는 봉사하지 않으셨던 모양이에요. 아버지의 제1덕목은 대한민국이었으니까요. ■ 김명원: 선생님의 부친이신 강인택姜仁澤 선생님께서는 독립운동 뿐 아니라 피난 시절에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하셨고, 일제시대에는 민립대학 건립을 추진하시는 등 소신 있는 정치인이셨지요. 또한 춘산春山이라는 필명으로《개벽》지에 천도교에 대해 논문을 연재하기도 하셨고,《조선일보》기자로 활동 하시는 등 필력도 상당 하셨고요. □ 강은교: 그래요.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볼까요? 전쟁 중 아버지께서는 정부를 따라 먼저 피난하시는 통에 어머니는 제 손을 잡고 등에는 동생을 업고 아버지를 찾아 부산행 열차의 꼭대기에 올라 앉지 않을 수 없으셨지요. 그래서 또 어찌어찌 아버지를 찾아내셨고, 그 피난지 부산에서부터 ‘우리 집’이란 의미의 가정이 있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런데 제가 바로 그 부산에 둥지를 틀게 되었으니 부산과는 인연이 깊은 셈이네요. 어머니의 그 강인함, 또는 아버지를 향해 일생동안 달려가게 한 그 인연의 힘이 없었더라면 저는 지금 여기가 아닌 홍원에 남아 있을지 모르지요.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저에게 이런 말씀을 조그맣게 하셨답니다. “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못살았을 것이다”라고 말예요. 전 요즈음도 어디 먼 곳에 가거나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면 어머니의 유물인 마리아 성모상의 메달이 달린 금줄 목걸이를 목에 걸어요. 어머니의 목걸이는 나에게는 부적과도 같은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서요. 동해 바다의 푸른 파도와 은모래, 그리고 어머니의 맨발이 들어있는 목걸이, 가는 금목걸이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한 목걸이! 비리데기였던 나의 어머니를 비리데기인 제가 그 목걸이를 하고 세상을 향해 집을 나서는 것이지요.
이제 떠나라 짧은 그림자로 저 길을 넘어가라 신속하게 추락하라 네 발은 축축히 젖어 있으니 길에는 두리번거리는 눈들, 눈들이 바람에 쓸리고 있구나 거세게 저 풀을 밟아주어라 풀들은 밟히면서 더 커 오르나니 아침의 입술에 묻은 이슬이라든가 서리 같은 걸 홀짝거리며 마실 때까지 노래여, 나에게서 떠나 나에게로 오는 노래여 발목까지 물 차오른 이 쓸쓸한 정거장에서 그대의 아버지를 찾아라 그대의 아버지를 살릴 약수를 찾아라
추락하는 영혼들의 노래를 불러라 -「짧은 그림자로」전문
시작詩作 -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작업
■ 김명원: 선생님의 하루 일과 중 제일 처음에 하시는 일이 새벽 4시의 산책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 시간에 시의 이미지들을 채집하시는 건가요? □ 강은교: 맞아요. 나는 원래 새벽잠이 없어서 4시가 되면 일어나요. 그리고는 산책을 서두르는데, 새벽 문을 여는 인근 산에 들어서면 그냥 소리가 들려와요. 낯모르는 벌레들의 날개 부비는 소리 등 살아 있는 생명체의 소리들이 푸른 여명 속에서 살아 있는 발성들을 내지요. 그러다가 해가 뜨기 시작하면 자연의 소리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요. 신데렐라의 호박차처럼 말이에요. 그 새벽 4시와 해 뜨기 전, 말할 수 없는 경이의 상태에서 들은 소리들을 시로 옮겨 쓰고 한 줄도 안 고친 행복한 경험이 시집『초록 거미의 사랑』속에 들어 있어요. ■ 김명원: 최근 선생님 시에서는 이미지의 반복이 눈에 띠는데요, 예를 들면 소리의 음향이 반복 병렬되거나 순환된다든지, 미세한 사물의 움직임조차 포착해내시어 집중시키고 중첩시키는 강화 기법 등 말이지요. □ 강은교: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요. 시인은 ‘시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시를 기다리는 자’라구요. 시를 기다린다는 것은 현장의 계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겠지만요. ■ 김명원: 그렇군요, 선생님, 동방박사가 메시아를 기다리듯이, 심금을 관통하여 옮겨 적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현장의 진실과 감흥을 기다리는 것이로군요. 이것이 시인의 역할이고, 시인이라는 중재자로부터 흘러나오는 시라는 것이군요. 가장 최근에 출간하신 시집이『초록 거미의 사랑』인데요. 이 시집에서는 이러한 긍정적이고 자발적인 세상에 대한 탐색과 기다림이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음이 확인되고요. 이는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찬탄과 그들과의 합일을 이룸으로써 지향선상에 있던 실천적 상생의 꿈이라는 메시지가 이 시집에서 소리집으로 완성되어 가는 까닭인 듯 합니다. 시집 속의 시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 강은교: 『초록 거미의 사랑』은 저의 열 한 번 째 시집입니다. 3부의 ‘가야 소리집’을 포함해 총 4부로 나뉘어진 이 시집은 작고 사소한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상황들을 노래하고 있어요. 특히 ‘가야 소리집’은 10년 전, 꽤 거대한 서사를 꿈꾸며 호기롭게 시작한 것이었습니다만, 작고 사소한 사람들의 중얼거림과 작은 그림자의 울음소리, 짧은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끊일 듯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바람에,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거대한 서사’ 대신 ‘짧은 소리―그림 연작’이 되고 말았고요. 새삼스레 재주 없음을 느낍니다. 다시 한 번 역사에서 소외된, 또는 역사가 결핍된 나라, 가야의 사람들과 사물들, 상황들을 저 나름의 언어로 복원시켜 보려고 해요. 소외와 결핍이 가장 강력한 상상력의 밑힘이니까요. □ 강은교: 저는 그래요.『빈자일기』가 출간되었을 때는 그 시집이,『시간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가 출간되었을 때는 역시 그 시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초록 거미의 사랑』이 출간되고 나자 다시금 이 시집에 가장 마음이 가요. ■ 김명원: 그렇다면 선생님의 시 자궁에서 마지막으로 길어져 나온 시집이기도 하고 가장 마음에 드신다는『초록 거미의 사랑』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이 시집에서 특히 주력해 보이신 점이 있다면요? □ 강은교: 이 시집의 특징은 ‘출렁이는 소리길을 걸어온 소리와 현대적인 회화성과의 결합을 꿈꾼 저 나름의 작품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네요. 1부의「빗방울 셋이」,「어제 금강산 풀들에게 남겨놓고 온 내 징소리」, 4부의 ‘굿시’와 ‘헌화가’ 등은 물론이고 다른 시들도 모두 다 그런 지향의 언어를 껴안고 있으니까요. 시집이 나오는 날, 눈물 한 자락이 흘렀어요. 아무도 듣지 않는 소리, 그 외마디 같은 소리를 또 했네, 하구요. 그리고는 금세, 아냐, 내 종을 울렸네, 내 징을 울렸지, 그러하니 들을 사람은 듣게 되겠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말이죠. 나는 늘 ‘소리’ 한 자락을 하고 싶었거든요. 작고 사소한 것들의 작고 사소한 소리 말이에요. 이 세상에는 그런 보이지 않는 소리들, 들리지 않는 형상들이 참 많은데, 그것들의 소리, 그것들의 형상 한 조각 건져내고 싶었으니, 거기에 내 언어의 이미지 옷을 입히고 싶었으니, 이제 됐군, 됐어, 하는 느낌으로 말이지요. 오늘 새벽에도 그런 소리 한 자락을 찾아, 형상 한 조각을 찾아, 소리와 이미지가 통일된 언어를 찾아, 새벽의 어둠 앞에 앉아서 소리 받기를 하고 언어 찾기를 하고 있었어요. 소리를 보이게 하고 싶고 형상을 들리게 하고 싶은, 그런 철없는 꿈에 젖어 말이지요. 아무튼 그러다 보니, 빗방울 셋이 걸어가는 소리도 듣고, 순장 당한 가야 사람들, 낙태 당한 가야 아기들의 모습도 보고, 거기에서 울리는 소리들도 듣고 거기에 내 언어를 갖다 대기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향가 형식도 데려와 보고, 향가의 탄식을 내 식으로 ‘아야아’라고 불러보기도 하고, 시조 형식도 데려와 보고, 무가의 굿소리 형식마저도 오늘의 도시에 혹은 내 책상 위에 데려오고 하면서 말이지요.
별 하나 어둠에 업혀 있다가 천리 겹겹 山 그림자 되어 헐떡이다가
아야아,
달려오네, 드넓은 어둠의 등에서 내려와. -「별 하나가 어둠에 업혀 있다가」전문
■ 김명원: 선생님, 이 시집에 실려있는 세 편의 시에는 L.J.N.이라는 머리글자가 눈길을 끌고 있는데요. 남편이셨던 작고 시인 임정남(1944∼2005)의 약자이지요? 임정남 시인은 1969년《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하셨는데, 시인에 대한 추억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두 분께서는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 강은교: 대학교에서, 연세대에서 만났어요. 우리는 굉장한 연애를 했지요. 그는 참 사람이 좋았지만… 제게 밥 먹일 수 없는 것이 뻔했기에 저의 어머니가 쫓아다니며 반대하셨고요. 그래서 저는 선도 많이 보았어요. 그러다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2년에 결혼했죠. L.J.N.은 민주 투사로 있다가 국민당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어요. 어찌어찌 하다가 결국엔 이혼하게 됐지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고요. 저는 이런 저런 사건과 계기로 사회에 눈을 뜨게 되었죠. 그래서 그즈음 사회성 있는 시를 쓰려고도 했어요. 지금은 멜로드라마 같은 일들은 다 지워지고 말았지만요. 아무튼 평생을 민중운동가로 사느라 가족뿐만 아니라 제 몸도 온전하게 돌보지 못했던 L.J.N.에 대한 미움이 오랫동안 마음에 있었는데, 저와 이혼한 지 10년도 넘어 하직하였는데, 부고 소식을 들은 후 어느 날 느닷없이 그분을 향한 추모시들이 터져 나왔어요. 그리고 그 추모시들이 시집에 실리게 된 것이었고요. 그 분이 작고할 때 폐질환이었어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어요.
우리는 덜덜덜 아마도 시외버스를 타고 있었을 거야 시외버스가 덜덜거리는 바람에 우린 서로 부딪혔어. 허벅지도 부딪혔고 허리도 부딪혔고 그곳 이름은 홍천
그래서 아마 당신이 나를 처음 껴안았을 거야. 부끄럽게 부끄럽게 껴안았을 거야 그리고 사랑했을 거야. 부끄럽게 부끄럽게
(그때 홍천에는 여름 바람이 불고 있었다아ㅡ)/ (중략)
깃발 한 장 찢어져 누워 있던 당신의 장례식은 너무나 고요하였다. 봄바람만 당신의 어설피 만든 영정을 핥고 지나갔어.
(그때 홍천에는 여름 바람이 불고 있었지.)
무덤도 없었어 화장하였지. 한시간 겨우 걸렸을까, 너무 마른 당신의 뼛가루 그래도 예쁜 단지에 담기던 당신의 뼛가루 봄바람이 핥고 지나가던 당신의 뼛가루
부산 가톨릭쎈터 앞길을 해방구라며 뛰어 건너던 당신의 웃음이 그 뼛가루 속에서 출렁이는구나. 국제시장 상인들이 주었다며 하얀 러닝셔츠를 흔들어 보이던 당신의 팔 이제 여기를 떠났겠구나, 훨훨 해방되었겠구나. ……다른 남자시인들은 모두 그 시절을 잘도 노래하던데…… 그동안 무얼 했는지, 부산에서도 못 살고, 서울에서도 못 살게 된 당 신 나의 마음 밖으로도 쫓겨난 당신/ (중략)
시인이 직업인 시인들이 많고 많은 세상에 시인이 결코 직업이 되지 못하였던 당신이여.
하지만 황량한 책상 위에선 언제나 오색무지개 날리고 있던 당신이 여. 너울너울 오색무지개 넘고 넘던 당신이여. 당신의 머리카락에 부는 봄바람처럼. 우리의 대학 사진에 부는 여름 바람처럼. 시인인 당신이여. 시 몇편 남겨놓지 않고 가버린 시인 당신이여. 거기 구름 위에 앉아서 매일 열 권이나 넘는 내 시집들을 질타하는 당신이여.
당신이 옳았다. 세상에 노래 몇, 마치 내던지듯 울리지 않은 당신 의 가슴줄이 옳은 것이었다. -「어떤 회의장에서-L.J.N.을 추모하며」일부
■ 김명원: 임정남 시인과 함께 70년대 동인지 활동을 하실 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동인지는 몇 권이나 출간 되었나요? □ 강은교: 동인 활동은 L.J.N., 김형영, 윤상규, 정희성, 박건한 같은 분들과 함께 했지요. 동인지는 3집까지만 나왔고요. 1집 때는 우리가 700부 한정판을 찍어서 경기여고 앞 숭문사 서점에 갔다 주고 나중에 안 팔린 책들을 거두러 갔었어요. 그랬더니 1집이 모두 팔렸다고 하대요. 그래서 그 책을 사간 사람들은 참 복받을지어다,라고 했지요. 바보 같은 인생이었는지도 몰라요. 그 때는 시가 전부인 줄 알았거든요. 저하고 김형영, L.J.N.이 다 샘터사에 있었을 때였어요. ■ 김명원: 송희복 평론가는 1968년《사상계》신인문학상 당선작「순례자의 잠」이후 지금까지의 선생님의 시세계를 대체로 세 가지 국면으로 나누셨는데요. 초기 시는 허무와 초극의 개인의식에 깃들어져 있었다면 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면서 인간과 인간의 유대와 관계성에 관심을 집중시켰고, 최근 십 수년 간에 걸쳐서는 우주적 생명의 문제의식에 대한 시적인 천착을 서서히 보여주었다고요. 그리고는 이 세 번째 국면, 즉 여성과 자연의 동화적 관계의 원리에 의거하여 좀 더 근원적인, 우주적인 생명의 圓環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사실로 인해 선생님의 시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지요. 저 역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평가에 동의하고 있고요. 이는 선생님의 생애와 시대를 통찰한 현실 인식이 선생님의 시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시의 근원적 힘, 전율
■ 김명원: 선생님에게 있어서 시가 생성되는 근원적인 동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강은교: 글쎄요, 그것은 아마도 ‘전율’이 아닐까요? 물론 전율은 반드시 예술 활동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 때는 펄럭이는 깃발만 봐도 전율을 느끼고 심할 때는 눈물까지도 흘리는 것처럼요. 깃발의 펄럭임이 우리 속의 어떤 정서를 건드렸기 때문이겠지요. 아무튼 어디서 전율을 느꼈건 전율을 느꼈다는 것은 그것의 정서와 우리의 정서가 부딪히면서 ‘정신의 피血적 스파크’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런 동기가 저는 제 시가 만들어지는 힘이라고 여겨져요. ■ 김명원: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언제 맨 처음의 전율을 느끼셨는지요? 그 순간을 기억하고 계세요? □ 강은교: 물론이죠. 그 전율은 너무나 강렬했으므로 저에게 전율을 준 모델을 따라가게 하였지요. 그래서 저는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네요.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내 안에 부글부글 끓고 있던 그 어떤 것에 그것이 자기의 극선極線을 갖다 댄 것이라고나 할는지요. 아무튼 그 전율은 저의 잠재된 그 무엇을 순간 현재화顯在化시키라고 충동질했고, 그 충동을 따르다 보니 전 시를 쓰게 되었던 것이에요. 제게 최초의 전율을 준 그 시는 바로 이런 것이었어요.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은 해야 솟아 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 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 래도 좋아라.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 김명원: 1946년《상아탑》에 실렸던 박두진 시인의 시「해」로군요. □ 강은교:그때는 이 시를 지은이의 이름 같은 것은 몰랐어요. 나중에 알았지요. 다만 그 시의 리듬과 그 리듬이 주는 긴장, 그런 것이 나에게 전율, 일종의 정신의 경련을 일으켰고요. 아주 햇살이 화사한 초여름의 오후였던 것 같네요. 장소는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 교실이었구요. 하얀 옥양목 커튼이 바람에 살살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보다는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던 햇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저는 학교 신문을 읽고 있었지요. 그때 학교 신문 한 귀퉁이에서 이 시와 전율로 만난 것이에요. ■ 김명원: 요즈음에도 이런 전율이 자주 일어나시나요? □ 강은교:아주 좋은 시를 읽을 때, 리듬과 이미지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시를 읽을 때, 또는 무척 아름다운 음악의 멜로디를 들을 때, 그 음악의 멜로디와 리듬이 합일됨을 피 속으로 느낄 때, 그림 같은 경우에도 어떤 그림에서 그 상상력의 긴장을 접하는 순간, 전율이 일어나곤 해요. 하긴 요즘은 박수를 치곤 하지요. 그러니까 전율의 형상이 좀 더 심화되거나 확장이 되었다고 할까요? 꽃이 핀 것을 보는 순간, 수평선이 환하게 열린 것을 보는 순간, 깜깜한 어둠 속에 앉으려고 하는 파도의 흰 거품을 보는 순간, 은빛 달을 보는 순간, 일출을 보는 순간, 일몰을 보는 순간, 길을 보는 순간, 길을 달려가는 달팽이라든가 게 같은, 작고 느린 존재를 보는 순간들 말이에요. 그래서 제 시집 중『어느 별에서의 하루』후기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라/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라./ 아마 그럴 때 다가오는 팽팽한 대상對象들의 긴장은 우리에게 ‘교환’이라는 문학의 선물을 안겨줄 것”이라고 말이지요. ■ 김명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시인들이 대상들을 바라보는 ‘보는 법’이 중요하다는 충고이신가요? □ 강은교:글쎄요. 어떤 대상의 중심에 언어의 옷을 입힌다는 환상을 갖는 것, 그러나 대체로는 감정을 ‘서술하는 것’을 ‘본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상황’의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고, 그 뛰어듦이 열정적이면 열정적일수록 감탄들을 하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 ‘봄’은 주관적인 렌즈일 뿐이에요. 거기에는 ‘감정자’의 시간이 있을 뿐, 또는 감정의 시간이 있을 뿐이니까요. 그 시간 뒤로 흘러가는 원래의 시간이 아닌, 주관이 멈춘 서술의 시간 뿐. 거기서는 확산이 일어날 여지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 김명원: 그렇다면 확산이 있는 언어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 강은교:우선 시인이란 이 세상의 산보자이며 순례자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산보자는 사물의 중심을 ‘응시’할 수 있으며, ‘응시’에서 언어는 자기의 옷을 입고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니까요. 세상의 풍경 속에 뛰어들면 언어는 사라지지요. 사라지는 언어를 붙들고 꿈을 꾸려고 하는 사람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동차의 백밀러 중 어떤 백밀러의 유리에는 재미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지요. 짐작하셨겠지만, “사물은 현재보다도 가까이 있음”이라는 글귀가 그것예요. 시인이 그 무엇인가의 언어를 사용할 때에도 실은 그 언어 속에 사물은 이미 달려 들어와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적절한 ‘생략’이 많을수록 한 편의 시에서는 빛나는 ‘생략의 기술’이 일어나는 것이고요. 침묵과 침묵 사이의 꿈이 일어서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 현재보다도 가까이 있는 언어, 그것을 자신의 구조 속에서 흔들어야죠. 그 흔들림이 ‘확산’을 마련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고요. 모든 언어는 사물보다도 가까이 있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을 산보하고 있어요. 이 세상을 자신의 언어로써 구조한다면, 그리하여 그 구조 속에서 ‘확산’과 ‘수축’이 일어나게 한다면, 언어의 성공자가 될 것이에요. 그런데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시인이 서 있는 세상은 변방이어야 합니다. 변방일수록 좋아요. 시인이 서 있는 자리는 그 변방에서도 숨어있는 자리일수록 좋지요. 거기서 사물의 깊은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세상으로 뛰어나가는, 뛰어나가려 하는 그런 ‘확산’을 자신의 언어에 실험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사랑법」전문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자전Ⅰ」일부
또 하나의 실천적 과업, 〈시바다 시치료〉공연
■ 김명원: 선생님의 시는 소리 찾기이고, 소리 찾기는 주술적이며 동시에 마술적이기까지 하지요. 소리를 통해 사물의 빛바랜 형상을 구해 냈으며, 소리를 통해 신명나는 현상들의 시간을 건져 올렸으며, 소리를 통해 몸 속 깊숙이 내재되어 있던 감각과 영혼을 부활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소리 공연을 통해 치료 효과까지 염두에 두셨던, 그리고 선생님께서 구상하시고 연출하셨던〈시바다 시치료〉대해서 듣고 싶은데요. □ 강은교: 김시인이 말한 것처럼〈시바다 시치료〉는 문화마당뿐 아니라, 시치료를 지향했어요. 시치료는 시의 치유적 기능을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지요. 이것은 특히 현대 도시에서 피폐해지고 있는 정신을 위한 시도였고요. 정신장애 등 심리적 치료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시치료는 그러나 오늘 거기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에요. 시와 명상과의 결합은 아마도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당시 온갖 현대의 정신적 장애에 알맞을 시치료의 효과를 시로 경험하고자 의도했던 것이었지요. 무수한 소리 찾기의 길을 닦다가 그것으로도 안되는 것은 시 퍼포먼스로, 즉〈시바다 시치료〉에 풀어보려고 했었던 거예요. 시의 기능 중 하나인 치유의 기능을 나의 ‘시치료’로 살려보려는 시도였어요. 한동안 이윤택 씨의 도움과 극단의 힘으로 운영이 되었는데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우리 시인들의 힘으로 재결성해서 시에 숨어있는 몸짓과 상상을 세세히 살려내려고 했었고요. 시낭독 운동을 문화의 각 분야를 통해 연주하거나 공연함으로써 시의 확산은 물론, 인접 장르의 문화 확산까지 꿈꾸어 종내 예술의 각 장르를 망라하는 문화예술꾼들의 문화비평지를 목표로 공연을 했어요. ■ 김명원: 〈시바다 시치료〉를 주관하였던〈시바다 문화회〉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나요? □ 강은교: 저를 포함하여 강영환, 최영철, 노혜경, 손택수, 전다형, 김형술 등 ‘금요일의 시인들’에 의해 매월 세 번째 금요일에 부산 서면 영광도서에서 정기적으로 시낭독회를 했고, 계절별로 공연을 했지요. 매분기 시낭독 공연의 큰 제목은〈시바다 시치료〉로 하고, 부제목은 따로 그 때마다 어울리는 것으로 정했고요. <시바다 문화회〉는 크게 ‘시분과’, ‘문화분과’로 나누고, ‘문화분과’는 세부적으로 퍼포먼스, 국악, 양악, 무용, 미술, 인터넷, 인쇄 등으로 나누어 실무진들을 구성해서 운영되었어요. 공연 역시도 그 계절의 시중 두 편 정도를 선택하여 퍼포먼스 공연 중심으로 음악과 무용 등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시울림 마당을 연출했었구요. ■ 김명원: 이제〈시바다 시치료〉공연은 중단되었지만,〈시바다 문화회〉를 통해 파급되었던 효과는 어떤 것이었나요? □ 강은교: 관객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주려고 했어요. 그래서 순서를 ‘시치료’부터 시작했었지요. 그리고는 ‘시치료’의 출구로 나온다는 공연 목적을 스스로 상기했었고요. 시인의 기능이란 결국 시를 중개로 한 치료자이거나 위무자인 것이거든요.
취미, 혹은 여가를 보내는 방법
■ 김명원: 선생님, 즐기시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 강은교: 저는 시를 기다리고 옮겨 적는 재주 외엔 특별히 이렇다 할 특기나 취미도 없고… 그저 맨날 시예요. 모든 게 다 시고, 뇌수술을 하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가면서도 이 소재로 시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시 때문에 뇌수술까지도 고마워했을 정도니까요. 웃기는 여자죠? 뇌수술을 했던 1972년도에 아이들이 태어났어요. 쌍둥이였는데, 한 아이가 생후 7개월만에 죽었지요. 그 죽음에 대한 무덤 이미지를 쓰다 보니 제 시와 글에서 아이의 죽음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어요. 이처럼 저에겐 시가 전부예요. 다만 충전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일부러 서울로 여행을 갑니다. 모르는 호텔에서 자기도 하면서 거대 도시의 떠도는 대형 이미지의 입을 바라보고 오곤 하지요. 낯선 여행을 통해 무수한 시적 실마리를 얻어내곤 해요. ■ 김명원: 여가 시간이나 일탈의 방책으로 무얼 하시나요? □ 강은교: 그냥 멍하니 있는 것을 좋아해요. 사람들은 가끔 자기가 속해 있는 것으로부터 떠나고자 하거나 자기가 속해 있는 자기라는 것으로부터 떠나고자 하지요. 그것을 탈주라고 말할 수 있겠고요. 그 방법으로 여러 가지 나름의 대책들을 마련하고 있을 텐데, 예를 들자면, 엉엉 소리내어 우는 것을 포함하여 눈물을 흘린다거나 사하라 사막이나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오지로 떠난다거나 몰두의 대상이 신이든 어떤 일이든 몰두하는 것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탈주도 있지요. ‘들여다보는 것’요. 일상의 것들을 들여다봄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 말이에요. 저는 혼자 있는 것을 아주 즐기고 ‘들여다보는 행위’를 즐긴답니다. 결국 시를 쓴다는 행위는 혼자 행하는 의식이 아니던가요? 새벽에 혼자 깨어 있거나 혼자 길을 산책하거나 혼자 들여다보거나 시를 쓰는 것, 가끔 여행 하는 것, 이것이 저의 삶이랍니다. ■ 김명원: 참, 선생님, 함께 사시다가 결혼한 따님 이야기 좀 해주세요. □ 강은교: 제 딸이 2006년 5월에 결혼을 했어요. 지금은 창원에 살고 있는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요.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아인데 유일한 제 시의 첫 독자이기도 했지요. 시집 제목 ‘초록거미의 사랑’이 모던하다고 적극 추천해 주었고요. 저는 그간 매번 시가 완성되면 딸에게 보여주었어요. 그 아이가 모니터링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가차없이 버렸죠.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의 시 평가 기준이 있답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석사 이상의 독자에게 감흥을 주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라구요. 바로 이 기준은 제 아이를 염두에 둔 것이지요. 구체적인 상황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시의 전반적인 것은 이해되어야 그것이 대중시가 아닐까요? 한 번은 딸아이가 이해할 때까지 지우고 지워버려서 단 세 줄만 남아 시조가 된 적도 있어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향후 계획 등
■ 김명원: 요즈음의 시단에 대해 선배로서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강은교: 나는 그래요, 요즘의 젊은 시인들이 직조해 가는 감각은 좋은데 자칫 사담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조심해야 한다고요. 이미지의 이중성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암호의 숲이 되어버릴 경우엔 아무도 그 암호의 숲을 들어갈 수가 없게 되니까요. 극히 개인적인 사담에서 특별한 감동은 유발되지만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실패로 끝나죠. 시도 ‘객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거든요. 상상의 텐트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이해가 되어야지, 독자를 이해시키는 코드를 막아버리면 아무리 신선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 시를 좋아하겠어요? 나는 일전에『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라는 지면을 통해 시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찰해 본 적이 있거든요. 그 책은 시인들을 만나거나 메일로 설문을 해서 만든 책이니 참조하면 좋겠네요. 또 산문집『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저의 문학수업기와 시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 들어 있답니다. 그 책에는 내 문학의 고백록이 있는데, 일제시대 지사였고 기자였던 아버지께서 제 문학 최초 정신의 내용였다면, 그 뒤의 박두진, 엘리엇 시와의 만남은 내 문학 형식의 개안였다는 것 등이지요. 오늘 다 나누지 못한 이야기는 이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시적 공간인 ‘은포’에 대한 소개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최근간인『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참고해 주었으면 해요. ■ 김명원: 선생님, 이것은 참 후회스럽다는 회한이 드시는 일은 있으신가요? □ 강은교: 저는 오랜 기간 동안 마음의 문을 못 연 것이 걸려요. 게다가 늘 불만이 많았지요. 조금 더 앞으로 갔으면 싶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갔으면 싶고, 조금 더 화려하고 두꺼운 문을 밀었으면 싶고, 실크스카프를 둘렀으면 싶고, 명품 만년필이나 뭐 그런 글쓰기 도구들을 가지면 글을 좀 더 잘 쓸 것 같고, 늘 조금 더 달리고 싶고, 조금 더 크고 높은 소리로 노래하면 싶고… 그런 것들이 자꾸 저를 분노하게 했지요. 그렇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 오늘의 법률, 정치, 문화, 학교, 경제들에게 말이지요. 그렇지만 이제 와 사실을 이야기 하자면 모든 것이 다 고맙지요. 조금 늦었지만 감사할 수 있는 한 감사하며 살려고 해요. 내가 그동안 먹어 온 밥알들에게 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고요. 내가 그동안 밟아 온 길들에게 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지요. 다리 하나, 팔 하나, 별 문제 없이 걸어오게 한 내 몸의, 그동안의 에너지들에게 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죠. 내가 들었던 모든 소리들에게, 나에게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잘 걸러 듣게 해 주었던 내 귀의 고막에게, 내 귀의 고막의 질기고 질긴 그 필터에게… 목청껏 소리를 지르게도 했으며 사랑을 고백하게도 했고 순간 순간 툴툴거리게도 했던 나의 목소리, 아무 것이나 잘 넘겨주었던 나의 목구멍에게, 적당적당히 몸을 잘 비워주는 나의 콩팥에게, 가끔씩 세상을 가려주는 역할도 하는 나의 눈초리에게, 내가 나일 수 있게 했던 모든 것들에게 고마워 해야 하지요. ■ 김명원: 내년에 정년을 앞두고 계시지요. 향후 계획을 여쭤봐도 될까요? 그리고 여름을 참 좋아하는데 여름 풍경이 바라다 보이는 집에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또 앞으로 발레리가 꿈 꾼 악극을 써 보려고도 합니다. 한국의 여인들을 대상으로 해서요. 제가 자주 사용했던 비리데기와 도미의 처, 유화부인 등을 현대시에서 살려내는 일을 할 겁니다. 비리데기는 바리 연가로 쓸 건데 저처럼 소외된 여인이라서 더 마음이 가네요. 음, 아무튼 계속해서 시를 쓰겠지요. 형상화가 잘 된 시, 소리를 그냥 그대로 꺼내는 시, 그리고『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힌 대로 육체로부터 나오는 아무 뜻 없는 소리의 리듬인 ‘소리심’과 이미지가 결합하는 시를 쓰고 싶어요. 그런 시들을 쓰면서 삶의 몸부림은 지속되겠지요. 몸부림입니다. 이 몸부림, 지켜봐 주세요.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위이가이너 위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비리데기의 旅行노래ㅡ三曲․사랑」전문
‘선천성 뇌동맥 정맥기형’이라는 병으로 쓰러져 뇌를 쪼개는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면서 끝끝내 삶이 내장한 허무의 끝을 알아차리고 이에 당당하게 맞선 시인! 지금도 병원에 가서 신경안정제 처방을 받아오는 것이 일상이 되고, 평생 그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시인, 그러나 그녀가 만나는 시간과 공간을 시 속에서 현장성으로 포획하여 잘 발라낸 언어의 살을 싱그러운 시의 소리로 환치시킨 시인, 그리하여 명징한 삶의 물결을 바다에서 길어 올린 시인, 소외되었거나 거세되었던 역사를 들추어 탈색된 사람과 사물들에게 연민과 사랑의 결 고운 이미지 옷을 재단해 입히는 시인, 부과된 생과 시의 운명에 부응하고 그 운명을 넘어 선 생명 희구의 시인이 바로 강은교 시인이다. 그래, 가을이다. 나는 나에게 으스댄다. 강은교 선생님을 뵈었으니 당분간은 혼자여도 좋으리라. 혼자를 과감히 관통하여 혼자 이룩한 성좌의 명암을 보았으니 나도 이제 그녀의 왕국에 내린 빛줄기 한 삽을 퍼와 내 집 앞뜰에 심으리라. 곧 내게도 혼자 예비하고 혼자 지는 저 슬프도록 찬연한 가을이 눈부시게 맺히리라. 덕지 덕지 붙어 있던, 어찌 할 수 없는 욕망들을 다 떨어버리고 겨울로 가는 나무들처럼 진정한 사랑의 방식이란 무거운 것을 버리고 존재의 가벼움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걸 오늘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되었으므로, 사랑하는 것은 몸의 힘을 전부 빼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으므로, 결국 사랑에게 아무 보상없이 자기를 던지는 일이 사랑법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 가을이 하는 일처럼 말이다. 그래, 이번 가을에는 사랑을 제대로 할 듯 하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0년 1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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