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지기님과 함께
일박이일로 지리산 자락 토지길을 걸었습니다.
사진만으로 즐기기엔 부족할 듯 해서
시커먼 남자 둘의 여정을 짧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속도로와 국도를 반복하여 쉬엄쉬엄 일곱시간을 내려내려 갔습니다.
하동에 도착하니 허기가 졌습니다.
섬진강변의 한 식당 문을 박차고 들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재첩국을 주문해서 시원하게 밥 두 그릇을 총알같이 말아 먹었습니다.
시월 초 부터는 수확되는 섬진강 재첩은
내년 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쏟아지는 방문객들을 대비해서 저장된다고 하더군요..
든든히 배를 채운 후 차를 몰아 토지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도착 후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광경은
기념관 입구에서 꽃고무신을 팔고 있던 할머니였습니다.
토지에 나오는 마을 꼬마들이 신고 동네 곳곳을 뛰어다녔을 것 같은
가지런히 놓인 이쁜 그 신발들이
우리들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기념관 입구를 돌아내려가 벼 익는 논밭을 좌우로 한 큰 길에 다다르니
타작한 콩을 차로에 말리는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그렇게 토지길로 가는 가을의 첫 모습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던 한적한 대촌마을 입구로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토지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산길가에 떨어진 밤송이를 까다가 가시에 찔리고
하늘로 뻗고, 땅에 툭 떨어지며 지리산 자락을 온통 물들인 빨간 단감의 정취에
폭 쌓이기도 했습니다.
빨래줄에 널린 얇은 속치마처럼 산바람에 한들거리는 하얀 구절초,
마을길 담벼락을 따라 소담스레 피어난 맨드라미, 봉숭아,
왠만한 장정의 키보다 큰 수확중인 토란대
집과 담, 여기저기 누렇게 익은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매달린 호박, 수세미
그 밖에도 무화과, 산사과, 이름 모를 들꽃들꽃이
지리산 자락 토지길을 온통 휘덮고 있었습니다.
아, <토지>의 후예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도리깨질을 하는 젊은 농부,
신작로에 널린 콩이 혹시나 산바람에 날릴까 빗자루로 쓸어모으는 할아버지,
냇가에서 말린 콩 껍질을 벗겨내며 한올한올 소중히 콩을 까는 할머니와
그 옆을 호위병처럼 지키는 바둑이,
토란대를 잘라 덜덜덜 경운기에 실어 마을길을 내려오던 아저씨..
이 모두가 살아있는 지리산 토지마을의 가을을 모자이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산길을 돌고돌아 오르고 내려오면서 우리는
수 많은 소작인과 마름을 거느리고 위세를 자랑했을 듯한 지주 조씨의 고가에 도착하여
토지길 걷기 첫 날의 끝자락을 밟았습니다.
마을 돌담을 따라 기대서 포즈도 취해보고
길바닥에 널려져 말라가는 토란대의 모습도 구경하면서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노을 물든 마을길을 벗어나
칠성봉 아래에 위치한 악양면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습니다.
누이처럼 따뜻한 말과 맛깔진 찬으로 맞이해 준 금향다원 주인님의 마음이 곱습니다.
피곤한 몸을 걸쭉한 지리산 막걸리와 맛깔진 수다로 풀어내고 하루를 끝냈습니다.
다음 날은 새벽부터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몽롱하게 한 없이 창밖을 바라만 보다가
빗줄기가 약해지길 기다려 산길을 좀 걸었습니다.
지리산 자락에 내리는 산비와 이른 아침 자연이 주는 운치에 젖어들었습니다.
오전동안 숙소 주인 오누이와 함께
밤나무밭에서 떨어진 밤송이를 까서 햇밤을 자루에 담으며
수확의 기쁨에 젖어드는 농부가 잠시 되어봤습니다.
여기가 귀향하는 사람들의 강남 일번지라고 소개하는 주인동생분의 말속에
땅을 사랑하는 젊은 농부의 뿌듯함과 자부심, 그리고 강한 삶의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그렇게 둘째날 오전을 보내고 점심 무렵이 되기 전에 숙소를 나와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뚫고 화개장터를 지나 쌍계사에서 잠시 쉬고 난 뒤
서울로 올라오며 걷기 일정을 모두 마감했습니다.
이상,
자연과 인간이 한껏 어루어진 두 시커먼 남자의 정겨운 토지길 가을걷기였습니다.
* 몇몇 사진들을 올립니다. 더 많은 사진들은 까페지기님이 이미 올리신 사진들(1)~(5)를 참고해 주세요
첫댓글 그날하루를 재방송하듯이 상세한 후기였네요 저는몇년전부터 귀촌할동네로 점찍어둔 악양면 토지길 평사리 입니다 4계절을 갈때마다마음 설레이는 곳이죠 같이 여행 친구해주신 첨처럼님 고생하셨구 후기 사진도 감사드립니다
후기를 이렇게 상세하게 올리는 건 다음 번 가는 분들의 개인적 경험을 위한 예의가 아닐 거 같지만.. 너무너무 멋진 길이어서 까페지기님과 상의하여 그 날의 기억을 더듬어 올립니다.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느낌있는 걷기 길이었던 거 같습니다. 두 명, 특히 남자 둘이 걷기엔 많이 아까운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ㅎ 걷기를 위해서 항상 멋진 인도와 세밀한 배려를 해주시는 까페지기님께 감사드립니다.
와우 !!! 멋진 경험하셨네요 ~
사진 한장 한장 살아움직이듯 생동감과함께 기대감을 일으키는군요 ~
특히 저 송아지의 눈 ,
저도 꼭 보고싶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