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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시인 ⓒ
지난 10월 28일 KAIST에서는 김지하 시인 초청, 특별강연회가 열렸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자유의 만개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김지하 특별강연초록을 입수해 소개한다.<편집자>
카이스트 앞에서 과학 얘기를 들먹이는 것은 공자 앞에서 문자 쓰기다. 잘 안다. 그러나 꼭 네 마디만 하도록 허락해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문자를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자 여러분의 도움을 청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잘 아시겠지만 현대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할 말이 있다. 대 혼돈, ‘빅 카오스’다. 인간, 사회, 자연, 전체를 혼돈이 휩쓸고 있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도덕적 황폐, 테러와 전쟁, 세계시장의 실패에 의한 빈부격차의 심화, 지구생태계 오염, 그리고 기상이변이다.
처방은 단 하나 뿐이라 한다.
탁월한 통합적 과학에 의한 전면적 치유다. 그러나 바로 이 탁월한 통합적 과학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과학은 어찌해야 성립되는가? 동서를 넘어선 통합적 인문학에 의한 탁월한 담론이 나타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과학적 상상력을 촉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탁월한 담론은 또 어찌해야 나타나는가?
그것은 물론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이면서도 새로운 기준, 즉 새 패러다임의 출현에 의해서만 나타나고, 새 패러다임은 새 삶의 원형(原型) 즉 새 아키타잎의 개시(開示)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류문명사의 대전환기에는 언제나 새 삶의 아키타잎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난다고 한다. 대 혼돈의 시대에 있어서 새 삶의 아키타잎은 먼저 혼돈에 대한 적극적 관계에서 출발할 것 같다.
혼돈에 빠지면서도 동시에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혼돈의 문화에 관한 논의는 이미 유럽에서도 나와 있고 현재의 혼돈 자체로부터 새 질서를 발견하려는 노력이나 아니면 그 혼돈에 대한 질서의 처방을 이미 낡아버린 과거의 체계적 코스몰로지에서 찾아내려는 노력도 나와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안타깝게도 아직은 그저 ‘해명’의 차원이거나 ‘봉합’의 차원일 뿐 혼돈 그 나름의 독특하고도 보편적인 질서도 아니고 그 질서로부터의 창조적이면서도 대중적, 범생명적인 새 삶의 전개과정인 것도 아니다.
그러매 애당초부터 혼돈 그자체인 질서,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를 찾고자하는 갈증이 넓게 퍼지고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나타나는 동풍(東風) 즉 ‘이스트 터닝(EAST TURNING)' 역시 이런 갈증의 하나로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유럽과 아메리카가 눈여겨보는 동아시아는 그 초점이 중국으로 획일화된 것 같다.
그렇다면 중국사상사에는 과연 문제의 그 ‘혼돈의 질서’가 있는 것인가? 대답은 ‘그렇다·아니다(其然 不然)’이다. 있지만 없다는 말이다.
있지만 살아 있지 않다는 말로도 된다. 분명한 결론이다.
혼돈의 질서란 그 자체로서 살아 있지 않으면 이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혼돈과는 무관하다. 중국의 전통문화 속에 있는 혼돈의 질서는 수 천년에 걸친 관료지식인들의 주류 통치철학에 의해 ‘산 채로 봉인’되어, 문자 그대로 ‘산 채로 죽임 당하고 있다.’ 그러매 인류문명사의 대전환기에 나타나 새 삶의 아키타잎을 제시하는 성배의 민족은 분명 중국민족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느 민족인가?
현대 유럽의 대 신비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바로 이 성배의 민족에 관한 유언을 그의 제자로서 동아시아에서 해석한 일본 인지학회(人智學會)회장 ‘타카하시 이와오(高橋巖)에 의하면 그 민족은 바로 한민족이요 그 원형은 이미 19세기에 최수운(崔水雲) 등에 의해 제시된 동학정역사(東學正易史)의 부적과 주문이라는 것이다. 곧 그 원형의 제시가 한민족에게는 ‘없는 듯하지만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그렇다(不然 其然)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것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니고 생생히 살아 있다.
그것은 19세기 동학에서만 평지 돌출한 것이 아니고 이미 고대·상고대에 북방 샤머니즘과 연계된 풍류(風流)사상의 ‘삼수분화론(三數分化論, 천지인 3수론을 중심으로 음양 2수론이 배합된 혼돈의 질서)’ 그 삼태극(三太極)의 전통 안에서 한민족의 살아있는 전통문화로 유불선의 저류에 내내 살아 움직이다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의 대 붕괴와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대한 동아시아의 창조적 대응으로 폭발하여 인류문명사 및 우주사의 대 전환 사상으로 부활, 대규모 민중민족혁명에까지 이르렀다.
이른바 ‘후천개벽(後天開闢)’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미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핵심인 유불선(儒佛仙)의 혼돈학적 요체가 애당초부터 다 갖추어져 있었다. 인류는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경제를 위해서도 그 새 씨앗들을 배태한 새 문화를 찾아내야 한다. 또 하나의 르네쌍스다.
그러나 희랍의 샘물은 고갈되었다. 그 샘물은 이제 동아시아 전 민족이 가담하여 창조했던 동아시아 고대ㆍ상고대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동아시아 고대 르네쌍스로부터 풍요한 혼돈의 질서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에 대한 재창조와 담대한 새 해석이 곧 새 차원의 전 인류 문화대혁명이며 생명학, 우주생명학의 창조에 의한 탁월하고 통합적인 새 과학의 성립일 것이다. 한민족이 제시하는 원형, 그 ‘혼돈의 질서’는 바로 이 문예부흥과 문화혁명의 날카로운, 그리고 새로운 해석학적 촉매가 될 것이다.
동학의 ‘지극한 기운(至氣)’의 내용인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混元之一氣),’라는 패러다임이나 태극 또는 궁궁(太極又形弓弓)’의 원형, 그리고 정역의 ‘여율(呂律 동아시아 전통우주론인 율려(律呂)의 반전개념(反轉槪念))’과 옛 역사서인 부도지(簿都誌)의 ’팔려사율(八呂四律)’, 그리고 최해월의 ’나를 향한 제사(向我設位)와 강증산의 ‘천지굿’ 또는 ‘천지공사(天地公事 혼돈질서에 의한 우주재판)’ 등이 모두 그것이다.
이들을 촉매와 해석학으로 하여 새로운 동방 르네쌍스를 기획할 경우 중국이 문헌으로 보존한 전통문화에 관하여 우리는 백낙청 교수가 최근 ‘21세기 한반도 구상’ 속의 그의 논문에서 지적한 다음과 같은 원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의 사물화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과거에 특정문화권에 속했던 지역과 오늘날 그 문명의 유산을 동원하는 활동의 소재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동학정역사가 제시하는 원형의 내용은 모두 ‘혼돈의 질서’ 즉 들뢰즈, 가타리의 개념으로는 ‘카오스모스(Chaos-mos)’다 내가 오늘 ‘카이스트’의 여러분 과학자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내용은 실인즉 모두 바로 이 ‘카오스모스’에 관한 것이다.
이 ‘혼원지 일기(混元之一氣)’, ‘혼돈의 질서’, ‘카오스모스’ 속에 함축되어 있는 전통 민중예술과 과학, 전통미학 및 철학과 과학, 그리고 동학 등의 종교와 과학간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한 민족의 예술, 미학, 철학, 종교에서 그 핵심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혼돈과 질서,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숨겨진 근원적인 무(無), 공(空), 허(虛). 또는 자유, 그리고 수리적으로는 ‘제로’에 대해 과학이 그 나름의 어떤 해석을 가해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나는 생명학에 기초한 민족민중문학을 하는 사람이다.
동방르네쌍스와 세계문화혁명에 의해 미학, 철학, 종교와 과학 사이의 창조적 연계가 나타나 과학적 예술, 과학적 철학, 과학적 종교에 의해서 민중이 좀 더 쉽게, 좀더 생명과 무의식과 우주의 깊이에 가깝게 다가감으로써 각각이 자기 나름대로 삶과 세계를 쉽게 깨닫고 알속 있게 변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예컨대 십대 청소년이 PC방에서 게임을 하던 도중 문득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우친다든가 사십의 장년이 한편의 영화나 노래방에서 우주의 과학적 비밀을 뜬금없이 깨닫게 되고 그 과정에서 카메라와 같은 대중예술·대중매체와 함께 사라져버렸다고 하는 초월성, 즉 ‘아우라’를 대중예술, 대중철학, 대중종교를 통해 더 생생히 깨달아 얻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바로 이것이 또한 새로운 과학에 의한 ‘대 혼돈’의 처방이요 치유가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 및 한민족의 전통예술, 전통미학, 전통철학과 종교 등의 기저에 살아있는 혼돈의 질서관을 새롭고 오래된 깊이가 그 깊이와 함께 동양의 역(易)철학 및 역 과학과 결합된 상수학(象數學)이나 디지털수학에 의해 현대적인 디지털매체나 영상 등을 통해서 마치 조선시대에 민간에 유행하던 ‘매화역수(梅花易數)’처럼 자기운명의 오묘한 예언까지도 알 수 있게 하는 그러한 과학신비적 실존체험, 감각과학적 관조수련 등은 과연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그 네 가지 문제를 여기 제기 한다.
첫째, 탈춤 등 전통 민중예술에는 '빈터의 아름다움(空所의 美)'’이라는 원리가 있다. 탈춤의 마당에 광대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또는 판소리에서 소리꾼이 소리를 하거나 안 하거나 간에 어떤 경우 현저한 ‘틈’, ‘공백’, ‘빈터의 느낌’을 주지 않으면 관객의 적극적 감동과 개입과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또 이것은 소리나 춤의 두 가지 차원, 즉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사이에서도 여러 형태로, 서로 반대적으로, 또는 계기적, 동시적으로도 나타난다.
마당이라는 공간 자체에도 속된 질서와 성스러운 질서 사이의 틈과 이중성이 있듯이 이 눈에 보이는 ‘마당(둥근 빈터)’안에서 생성하는 극적 상황으로서의 ‘판’과의 사이에도 ‘겹침’의 이중성과 ‘빈 틈’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관객의 개입이 일어난다. 만약 ‘빈터(空所)’가 없으면 감동의 근거가 되는 ‘그늘’이 깃들지 않고 관객의 반응이 생성되지를 않는다. 이것은 유럽연극사가 빈틈없는 꽉 들어찬 충만과 기승전결, 그리고 처음과 끝이 절벽처럼 명확한 점에 대비해 매우 특징적이다.
이것은 수학이나 과학에서의 ‘제로’나 ‘입자(素立子)간의 분리(틈)’ 또는 ‘핵 내부의 공간’ 등과는 어떤 관계가 있고 이것은 컴퓨터 수학 등과는 또한 어떤 연결성을 갖는 것인가?
둘째. 탈춤을 근본적으로 구성하는 미학원리는 ‘고리(環)’ 또는 ‘고릿속(環中)'의 원리다.
고리는 판소리나 시나위에서까지도 마당과 마당사이에 상황이 끝나는 곳에서 동시에 새 상황이 새롭게 시작하는 ‘종시(終始)’의 원리가 관통된다. 그리고 그 시간관도 알파와 오메가와 같은 ‘시종(始終)’의 시간과 같은 기승전결(起承轉結) 또는 전개, 위기, 파국, 반전, 결말 따위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시학(詩學)이 전혀 아니다. 마치 지금 여기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향아설위(向我設位·자기가 자기에게 제사 지내고 자기 자신에게 절을 하는 동학의 제사혁명)’ 처럼 시간이 둥근 고리를 이룬다.
한국고대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는 ‘셋과 넷이 고리를 이루어 다섯과 일곱이 하나가 된다(三四成環五七一)’라는 기이한 구절이 있다. 한국 전통사상문화와 한국음악의 구성원리를 보면 ‘셋'은 3수분화론(천지인 삼극의 생성과 혼돈의 사상 또는 박자)을, ’넷‘은 2수나 4수분화론(음양사상 등 이기·二氣의 질서와 균형의 사상 또는 박자)이다. 바로 이처럼 ‘혼돈과 질서가 결합하거나 또는 갈등하여 둥근(그 속이 텅 비어있는)고리(끝이 처음이 되는)를 이루어 다섯이라는 귀기(鬼氣)와 일곱이라는 신명(神明)이 ‘한(우주·하느님)’을 이룬다.’는 것이니 혼돈과 질서 사이, 또는 그 관계의 근원과 목표가 모두 ‘속이’ 텅 빈 고리(環中)’라는 말이다.
천부경은 또한 ‘한 처음이, 처음이 없는 하나요(一始無始一)’에서 시작하고 ‘한끝이 끝이 없는 하나다(一終無終一)’로 끝난다. 주역(周易)의 63 괘와 64 괘가 종료 완성과 무한 개방의 모순된 결합으로 끝나는 것과도 대조되는, 그야말로 ‘혼돈의 질서’인데 바로 이 같은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에, 근원에, 목표에 저 같은 ‘속이 텅 빈 고리’가 있음에 대해 과학에서는 어떤 해석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인가?
더욱이 바로 이 ‘고리(環)’는 탈춤 미학의 기본원리이자 천부경의 중심사상인데 동시에 한민족의 고대 선도풍류사상과 그 근원을 공유하고 있는 노장(老莊)사상의 한 핵심이라 할 때 과학은 이에 어찌 대응 할 것인가? 장자의 ‘역려(逆旅)’ 란 단 한 마디에서 일본인 물리학자 湯川秀樹는 소립자장(素立子場)의 원리를 이끌어내지 않았는가!
장자(蔣子) 제물론(齊物論)에서 ‘우주의 핵심은 그 고릿속을 얻음을 시작으로 하여 무궁에 응한다(樞 始得其環中以應無窮)’란 구절이 나온다. 이것을 축약하면 곧 ‘고릿 속의 무궁(環中無窮)’이니 ‘대도(大道)의 핵심이요 근본인 줄기(樞)가 우주 중앙의 공처(空處)인 그 고릿 속을 얻으면 사방팔방의 모체가 되어 피차상하의 분리가 없다’라는 뜻이다. 일본인학자 版井은 ‘樞는 扉門의 心柱이고 環中은 扉柱의 回傳部分을 ?包하고 있는 곳’이라 해석함으로서 원자물리학의 새로운 핵심에 접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핵심인 ‘고릿 속(環中)은 ‘카오스모스’에서 그 무엇이며, 만약 그것이 혼돈과 질서 사이의 핵인 텅 빈 중심으로서 ‘셋’이라는 역동(力動)과 ‘넷’이라는 균형(均衡)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로 엮는 이중적 교호관계의 기본이라면 과학으로 볼 때에 탈춤과 판소리 및 시나위, 그리고 또한 과학으로 볼 때에 천부경의 철학은 현대적이고 기초예술과 대중예술, 대중미학과 철학에 대해 그 어떤 구체적 관계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일까?
더욱이 그것이 ‘무궁(無窮)’이라면, 카오스모스와 무궁을 연결시키고 있는 동학의 ‘흥비가(興比歌)’의 해석에서는 예술 및 철학 또는 미학적 표현 원리와 함께 성취되는 ‘무궁한 우주 속에서의 무궁한 삶의 주체의 깨달음으로 무궁 확장 되는 것’과 과학적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셋째. ‘대 혼돈’을 극복하는 과정, 그를 위해 ‘혼돈의 질서’라는 원형과 기준을 세우고 전개하는 문예부흥과 문화혁명이 곧 새 문명의 창조다. 그런데 새 문명에 대한 요구 중에서도 가장 큰 인류의 한 요구가 ‘과학종교’의 발견이다. 그것은 감성, 이성, 영성의 통합, 리비도·고기든·아우라의 통전이요 완성일 것이다.
‘과학종교’에서의 길에 있어 그 첫걸음은 생명이 창조냐 진화냐 라는 질문이다. 동서 사상문화의 통합의 목표가 생명과 평화의 새 문명과 그 문명의 꽃이라 할 ‘과학종교’의 건설에 있다면 한국의 동학이야말로 동서종교의 통일의 조짐이요 과학과 종교의 통전의 씨앗일 것이다.
유럽 기독교의 경우, 우주생명의 창조론과 진화론은 전혀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다만 다윈주의가 후퇴한 뒤 자기조직화의 진화론 단계에 와서 상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자기조직화 하는 우주의 주체를 신으로 본다는 것이다. 진화론에서의 자기조직화는 생명의 카오스적 접근이다. 이러한 혼돈의 생성과 창조자로서의 신과의 관계가 과학적으로 밝혀질 때 혼돈의 질서, 생명과 영성, 활동하는 무(無), 창조적 자유의 문제가 연쇄적으로 다 해명되리라고 본다.
이미 20세기 초엽 고생물학자인 떼이야르·드·샤르댕은 그의 주저인 ‘인간현상’을 통해 우주 및 인류 진화의 3대 법칙을 다음과 같이 규명했다.
① 진화의 내면에 의식의 증대가 있고 (Inward Consciousness)
② 진화의 외면에 복잡화가 있으며 (Outward Complexity)
③ 군집은 개별화한다 (Union Differentiates)
그런데 이보다 거의 100년 전인 1860년 동학의 최수운은 하늘의 계시를 통해 새 삶, 새우주의 원형인 ‘태극 또는 궁궁’의 부적과 인류의 새 삶의 패러다임인 스물 한자의 두 가지 주문(呪文)을 받는다. 두 번째 주문의 맨 앞 ‘모심(侍)’의 세 가지 뜻을 수운 자신이 해설했으니 다음과 같다.
① 안으로 신령이 있고 (內有神靈)
② 밖으로 기운화 함이 있으며 (外有氣化)
③ 한세상 사람이 각각 서로 옮겨 살수 없는 전체임을 제 나름대로 깨달아 다양하게 실현한다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이것이 곧 동학에서 최초로 드러난 자기 조직화이며 생명진화의 원리이다. 중요한 것은 진화(氣化)의 주체가 곧 의식(神靈)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자기조직화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간 ‘창조적 진화론’ 이른바 ‘조화론(造化論)’이 19세기 ‘종의 기원(1859년)’ 몇 해 다음인 1863년에 계시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수운이 자기조직화(모심(侍)의 해명 과정에서)를 통한 창조적 진화론(不型其型論)을 제기했음에도 나의 의문은 계속된다.
‘창조와 진화’는 그리 쉽게 만나기가 힘든 새 문명사의 기점(起点)인 소위 ‘과학종교’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건들은 까다롭고 복잡하다.
‘볼프하르트·판넨베르크’는 그의 저서 ‘신학과 과학철학’에서 창조와 진화론의 상호 연계조건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① 생명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 또는 ‘비어있음’으로서의 영 즉 ‘네페쉬·하쟈(Nephesh hajah)’의 전제
② 신의 창조에 대한 ‘우연성’으로서의 창발적 진화(Emergence)
③ 생명진화의 ‘자발성’
④ 창조적 자기 조직화의 ‘유기성’
⑤ 물질적 부패로부터의 ‘해방성’
⑥ 생명과 영성의 ‘충만성’
⑦ 진화의 창조적 단계마다의 ‘자유성’
⑧ 생명의 영이 ‘무한정’ 주어짐 (요한복음 3 : 34)
동학의 최수운은 그 계시내용인 두 번째 주문 열석자 ‘侍天主 造化主 永世不忘 万事知’에 대한 스스로의 해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侍天主’의 첫째마디인 ‘모심(侍)’을 진화의 3대 법칙(물론 제3 법칙은 떼이야르의 군집선행(群集先行)론을 일찌감치 뛰어 넘어 도리어 최근의 개체선행(個體先行)론을 주장한다)으로 ‘진화론(자기조직화의 진화론!)’을 강조한 뒤 ‘님(主)’에서는 ‘님으로 높이 불러 부모와 함께 친구처럼 사귄다(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라고 하여 거리와 틈을 사이에 전제한 공경 속에서 부모처럼 섬기되 친구처럼 함께 동역(同役·파트너쉽)하는 수평적 존중(‘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의 내부공생에 결여되어 있는 공경이 그 바탕을 이룸)을 강조함으로써 창조주에 대한 섬김과 창조주와의 동역을 동시에 함께 주장한다. ‘모심(侍)’과 ‘님(主)’의 해설에서 이미 ‘창조적 진화론’은 넉넉히 설명된 셈이다. 그러나 창조와 진화를 한 차원 더 높여 신령한 자유에까지 들어올림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악센트는 다른 곳에 있다
수운은 계시내용을 해설과 함께 그대로 글로 발표했다. 그런데 계시의 주체인 ‘상제(上帝)’ 즉 하느님, 신을 뜻하는 ‘하늘(天)’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해설하지 않고 ‘모심’에서 ‘님’으로 그냥 넘어간다. 하늘을 공(空), 무(無), 허(虛) 또는 자유(自由)로 남겨 두고 그 ‘빈 칸’ 앞뒤에 도리어 ‘모심’과 ‘님’을 진화와 창조로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와 진화의 관계뿐 아니라 동서양 사상과 종교의 관계, 그리고 신과 인간,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의식과 복잡화, 내면 영성과 외면 생명, 자유와 필연 등의 관계에서도 결정적이다.
판넨베르크의 ‘목마름’, ‘유기성’, ‘충만성’ 등이 ‘모심’과 ‘님’에서 도리어 또 다른 차원 즉 ‘공경’이나 ‘파트너쉽’과 함께 강조되었다면 그 ‘비어있음’, ‘우연성’, ‘자발성’, ‘해방성’,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유성’과 ‘무한정성’이 ‘모심’의 해설 과정에서 하늘을 해설하지 않은 채 비워두고 침묵함으로써 드디어 확고히, 그리고 영원히, 무궁무궁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적 진화과정의 조건이며 나의 명제인 ‘활동하는 무(無)’ ‘창조적 자유’가 마침내 현실적으로 성립하며 자기조직화(氣化)의 주체인 의식(神靈)의 내면이 무궁무궁한 ‘고릿 속 빈터’가 되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를 참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도리어 이 ‘빈 칸’이다. 노장과 신구약 성서와 화엄경·법화경 등을 주역(周易)·정역(正易)·동경대전(東經大全)과 함께 두루 읽어 본 사람은 금방 그것에 대한 동의에 도달한다.
그러나 내가 오늘 카이스트의 과학자 여러분에게 공자 앞에서 문자쓰듯 과학 관련 발언을 지금껏 계속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부탁이 있는 까닭이다.
진화와 창조를 결합하여 한 차원을 높여 강조함 있어 그 주체인 하늘의 ‘빈칸’을 과학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나의 의문이다. 순수한 ‘제로’인가? 바로 이 ‘빈칸’의 과학적 해명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혼돈의 질서’ ‘태극궁궁’ ‘여율’ 등의 원형이 패러다임과 담론을 통해 과학, 문제의 그 탁월한 통합적 과학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믿어 그 일을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이며 바로 그 ‘고릿 속의 무궁’이 창조적 자기조직화의 핵심으로서 분명히 과학적으로 밝혀질 때에만 참다운 새 르네쌍스와 세계문화대혁명 속에서 동서사상문화의 통합과 과학종교를 중심으로 한 생명학, 우주생명학의 새 문명이 지구상에, 지구와 주변 우주와의 만물질서의 평온 속에 떠오를 것이라는 말을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 사람과 세계에 대한 깨달음은 엘리뜨주의적 수련을 넘어 대중화될 것이고 그 변혁도 혁명적 지식인의 조직주의와 역사주의를 넘어 민중화, 내면화 할 것이다. 침묵은 곧 신의 자유의 표현이다. ‘유비쿼터스’가 모든 생명과 사물 속에 살아 있는 여율(呂律)로서 생생히 살아 자유의 만개로 이루어질 날을 기대한다.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이다.
나는 이미 한국근대의 동학정역계 사상사의 원형을 ‘태극 또는 궁궁(太極又形弓弓)’으로, 패러다임을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混沌之一氣)’로 적시하였고, 이것이 현금 생명과학의 ‘자기조직화’가 ‘과학종교’,‘과학예술’, ‘과학철학’과 같은 ‘창조적진화론’을 건설하여 생명학, 우주생명학의 성립으로 나아가는 조건이요 또한 주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또한 한국학 최고 최대의 숙제인 기철학(氣哲學)의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와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사상 사이의 이중적 교호결합 또는 통합을 가능케 하는 핵심원형이며 지나간 선천(先天)시대의 동양과학인 ‘주역(周易)’과 지금 막 오고 있는 후천(後天)시대의 과학인 한국의 ‘정역(正易)’,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오묘한 관계의 역, ‘지금 여기 우리 삶과 세계의 역’인 ‘간역(間易)’을 성립시키는 근본조건이요 패러다임이다.
나의 질문은 바로 이렇게 중요시되는 ‘태극 또는 궁궁(혼돈의 질서)’이 신세대 문화운동의 중심부에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원형이 이른바 세계와 지구의 ‘대 혼돈(Big Chaos)’을 처방·치유할 것으로 기대되는 ‘탁월한 통합적 과학(동서양 통합 및 인문학·과학의 통합)’을 과연 어떤 원리, 어떤 과정으로 ‘촉발’ ‘촉매’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촉발’ ‘촉매’의 원리는 현 단계 인문학과 문화운동에서 과연 어떻게, 무엇으로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에 있다.
과학이 곧 삶과 인식과 변혁의 연장이 되어버린 현대에 참다운 삶, 실속 있는 변혁에로 나아가려 하는 대중에게 한 오리나마 바람 같은 예언, 눈부심 같은 예감을 선사해 줄 수는 없는 것인가?
여러분 과학자에겐 간단한 예언이요 예감이라 하더라도 신세대 다중적 민중에게는 결정적이고 또 치명적이기까지 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이 시간 계속해서 인간·사회·자연 모두가 대 혼돈 속에 허덕이며 무한정한 자유 만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이스트 여러분들 자신에 의해 그 날이 빨리 앞당겨지기를 기도하며 나 또한 내 나름으로 애쓰며 기다리고 있다.
/사진=김형근 객원편집위원
[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 1. 희미한 첫 예감
독방에서 100일 참선 후 화엄개벽의 길 예감
기사등록일 [2008년 12월 30일 11:43 화요일]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김지하 시인은 불교의 화엄사상과 동학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대전환을 맞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화엄개벽의 길’로 명명하고 있다. 「법보신문」은 2009년 1월 1일자부터 한없이 넓고 깊은 화엄사상에 푹 빠져 동학의 실천적 양상을 화엄으로 풀어낸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길’을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김지하 시인은 오대산 월정사 뒷방에서 ‘화엄세계 전체에서 남쪽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사진은 월정사 전경.
박경리 선생은 나의 장모님이다.
장모님 사십구재가 오대산 월정사에서 있었다.
그날, 예정에도 없던 유족 인사를 내가 하게 되었다. 인사 중에 불쑥, 그야말로 예정에 없던 촛불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불교의 원만 중도, 대작 『토지』와 중도변혁사상의 한 비유였는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마침 특집 취재차 와 있던 조·중·동 기자들이 화들짝 놀라 즉각 철수해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도 장모님 기념사업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손해를 끼칠까 싶어서다.
장모님 평생 애인이 두 사람이다. 맏손자 원보(圓普)와 갑오혁명 때의 유명한 동학 두령 김개남(金開南)이다.
역학자이신 한웅빈(韓雄彬) 선생의 작명 취향도 취향이려니와 원보란 이름은 누가 봐도 철저히 불교적인데, 개남은 갑오당서 최고의 과격파로서 『토지』 서사(敍事)의 첫 샘물이기도하니 조금은 기이한 느낌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가 있다.
‘남쪽 별자리 원만하면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南辰圓滿 北河回)’.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는 후천 개벽을 말하고, ‘남쪽의 원만’은 다름 아닌 ‘대화엄(大華嚴)’이다.
그러면 ‘별’이 무엇일까?
‘남쪽 별’이 무엇일까?
‘개남(開南)’인가?
‘개남’의 뜻은 물론 ‘남조선 해방’이겠지만 사실은 옛 부터 내려오는 남조선 사상사의 핵심주제인 ‘만국을 살릴 계책이 남조선에서 나온다(萬國活計 南朝鮮)’의 뜻이다.
그렇다면 별은 이 말을 꺼내든 강증산(姜甑山)을 말하는가?
강증산. 하기야 강증산은 비폭력·평화의 개벽, 즉 ‘정세개벽(靖世開闢)’을 주장한 사람이다.
강증산을 따르던 차경석(車京石)의 보천교(普天敎)에는 ‘보천지남(普天指南)’이란 말이 있었다는데 보천을 대화엄사상의 한 실현체로서의 ‘보문(普門)’으로 해석한다면 보천교 자체가 곧 화엄사상의 남조선 개벽운동이 되기도 한다.
‘정세(靖世)’가 다름 아닌 ‘화엄’의 또 하나의 뜻이고 보면 이 또한 심상치 않다. 보천교에는 남도(南道)사상, 즉 ‘남조선’이 결국은 중도(中道)사상 또는 ‘중조선’에서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뜻의 말도 있었다고 하는데, 중도사상이 곧 불교라면 중조선은 다름 아닌 신라 자장(慈藏) 이후의 오대산(五臺山)이 될 것이다.
그만큼 원만하다는 것이니 오대산을 ‘화엄성지(華嚴聖地)’라고 부르는 것에 그 나름의 깊은 역사적 필연이 있는 듯 싶기도 하다.
나는 지난 여름 오대산 월정사를 방문하는 차 속에서 두 가지 기억을 뚜렷이 떠올린 일이 있다.
하나는 정읍에 있던 보천교 교당의 거대한 재목들을 뜯어다 지금의 조계사 건물을 지은 일과, 다른 하나는 보천교 최고 간부의 아들인 탄허(呑虛) 스님이 뒷날 오대산에 들어가 한암(韓岩) 스님 밑에서 『화엄경』을 본격 공부한 뒤 분명치는 않으나 ‘화엄적 개벽의 국가비전’을 여러 번 비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화엄경』도 언젠가 전강(田崗) 패밀리의 한 땡초 스님이 선물한 탄허본 23권 짜리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이니 이 또한 심상치 않은 인연이다.
역순(逆順)으로 하나 묻는다.
『화엄경』의 체제로 보아 도입부는 아무래도 좥입법계품(入法界品)좦인데 주인공 선재(善財)의 구법여행(求法旅行)은 어째서 맨날 남쪽(南遊)으로만 향하는가?
화엄세계 전체에서 남쪽은 무엇인가?
월정사 뒷방에서 내가 거듭거듭 물었던 의문도 바로 이것이다.
오늘부터 일년 반 여에 걸친 기인 여정으로 떠나는 ‘화엄개벽의 길’에서 맨 먼저, 그리고 계속 뒤이어 제기될 이 의문에 대한 답이 어쩌면 결국은 나의 화엄개벽 공부의 결론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혁명 거치치 않는 개벽이
우주대불로 가는 길이며
참다운 ‘화엄개벽의 길’
혁명을 통과하지 않는 개벽. 그야말로 ‘정세개벽’만이 ‘우주대불(宇宙大佛)’과 ‘세계무릉(世界武陵)’으로 가는 길, 이른바 ‘참다운 화엄개벽의 길’일 것이다.
그것이 ‘남쪽’의 참 뜻이고 ‘선재남유(善財南遊)’의 거듭된 의미일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개벽에 의해서만 화엄이 비로소 현실화되겠지만 대화엄의 원만한 별이 뜨지 않고는 마침내 개벽이 참혹한 종말로만 끝날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심(侍)’, ‘모심의 개벽’, 그리고 ‘개벽적 모심’으로 다지고 다져야 한다는 나의 결심이 그래서 도리어 정각(正覺)에 가까이 갈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다.
‘등불이 물위에 밝으니 의심 낼 여지가 없으나 기둥은 다 낡은 듯 보이지만 아직도 힘이 남았다(燈明水上 無嫌隙 柱似枯形 力有餘).’
등불은 후천(後天)이고 새로운 실천으로서의 ‘개벽’이나 기둥은 선천(先天)이요 어쩌면 변함없는 옛 마음으로서의 ‘화엄’이겠다. ‘남쪽’이 내겐 아직도 ‘빛(離)’인 까닭이다.
주역(周易)이 다 끝난 듯 하지만 아직도 힘이 남은 그 까닭이기도 하다.
백여 년 전 남쪽을 하늘(乾)로, 북쪽을 땅(坤)으로 선포한 정역(正易)에 거대한 감동과 뜨거운 박수를 계속 보내면서도 동시에 남쪽을 빛(離)으로 북쪽을 그늘(坎)로 보는 주역을 아직도 내가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까닭이다.
눈부신 흰빛임에도 그 안에, 그 바탕에 철저히 암소를, 검은 그늘을 함께 키우지 않으면(畜牝牛吉) 대화엄의 무궁한 ‘한울 마음의 달(天心月)’을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흰 그늘(影動天心月)’을 창조할 수 없으며, 북쪽이 비록 새로이 새 땅(坤)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이월춘분(二月春分)의 여율(呂律) 쪽에 가까운 협종율(夾鐘律)이라 하더라도 남쪽의 옛 하늘(乾) 십이월동지(十二月冬至)의 율려(律呂) 그 자체이고 황종율(黃鐘律)의 누른 곤룡포를 일단은 정중히 입는 전통적 대행(代行)의 격식을 갖춰야만 진정으로 실력 있는 재상으로서 개벽의 대 혼돈 속에 감추어진 참다운 생명과 평화의 무늬, 수많은 털구멍 속의 그 자유로운 부처님의 해탈문을 새 시대에 맞게 드러낼 수 있는(黃裳元吉 文在內也) ‘팔려사율(八呂四律)’의 혼돈적 질서(chaos mos)가 현실 그 자체로서 나타날 수 있게 되는 바로 그 까닭이다.
‘흰 그늘’과 ‘누른 곤룡포’.
하나는 숨은 차원이요, 하나는 드러난 차원인데 두 차원은 목하 엇섞여 생성하고 있다. 경락학(經絡學)에서 이른바 ‘복승(復勝)’이라 이름 부르는 교차생성 현상이다. 퍽 어려운 시절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현대의 뛰어난 풍수(風水) 최창조(崔昌祚) 씨는 언젠가 한반도 안에 있는 여러 명산 가운데 가장 넉넉하고 원만한 덕산(德山)으로 오대산을 높이 칭송한 적이 있다.
그 화엄성지에서 어느날 아침 잠이 깨어 마치 동쪽으로 말달리며 서쪽으로 화살 날리는 고구려 무사의 저 반궁수(叛躬手) 모냥 난데없이 예수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종교차별 때문에 시끄러운 때다. 동서문명의 화해와 융합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고 일부 개신교의 결정적 오류에 대해 신구 기독교 전체가 책임을 지고 문명사 대전환의 초점을 찾도록 권유하기 위해서도 유신 반대운동 과정을 샅샅이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기독교 이야기’라는 편지 형식의 원고를 쓴 것이 바로 그때다.
그때 기이한 한 사실에 새삼 크게 눈을 떴다.
개신교 쪽 강연에서도 여러 번 강조한 적이 있지만 그 융합과 대전환의 길은 곧 다름 아닌 ‘화엄개벽’이라는 것.
불교, 기독교, 이슬람, 동학과 정역 등은 ‘화엄개벽’안에서 충분히, 그것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융합 가능하다는 것.
다만 종말적 대혼돈 앞에 목숨을 건 선(禪)적인 개벽의 모심을 어떻게 결단하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라는 것.
그랬다.
그때, 옛 반유신운동시절의 그 기인 독방살이 가운데 내 나름의 목숨을 건 모심선(禪)의 과정에서 ‘화엄개벽’의 첫 예감에 접했던 일을 뚜렷이 기억해냈다.
나는 그 무렵 카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카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로 고발되었고 사형선고 뒤 무기징역, 감형, 석방, 재구속, 양심선언, 그리고는 기나긴 독방살이였다.
그들은 긴 세월 책은 물론 성경조차도 주지 않았다.
텅빈 적막만이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적막과 공허가 쇠창살 밑에 자라는 잔 풀의 푸르름에서, 봄날 창 틈으로 날아드는 흰 민들레 씨에서 도리어 신령한 생명의 약동을 눈뜨게 했다.
텅빈 신령함. 신령한 무(無)!
뒷날 성경이 들어오고 책이 들어왔을 때 되풀이 되풀이 읽은 신구약과 창조적 진화 과학의 거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으로부터 우주진화의 삼대법칙 중 처음 두 가지인 ‘안으로 의식, 밖으로 복잡화’의 원리로부터 수운동학(水雲東學)의 모심(侍)의 참뜻을 비로소 발견했을 때, 그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란 말이 다름 아닌 창조적 진화의 기본법칙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하여 증조부이래 우리집안이 슬픈 피투성이 신앙인 동학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때다.
‘모심(侍)’의 대상이고, 그리하여 창조적 진화의 주체인 그 ‘님(主)’, 즉 ‘한울(天)’에 대한 수운 자신의 해설이 단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며칠을 밤낮으로 소름이 끼쳐 놀라고 또 놀라 쾅쾅쾅 발로만 발로만 마루를 굴렀다.
그렇다.
텅 빈 신령함. 신령한 무(無)!
동학의 한울님은 신이며 또한 부처였다. 신선(神仙)의 주체는 ‘한’이면서 ‘울’인 ‘님’, ‘텅 빈 영원한 푸른 하늘(無窮, 無極, 無限)’이었다.
오랜 독방수행은 정신질환의 시작이다. 북에서 온 간첩님들도 5년 시한이 지나면 반드시 몇 달간은 일반 도둑님들과 합방시키는 그 까닭이다.
종말적인 대혼돈 앞에서
목숨 건 禪적 개벽의 모심
어떻게 결단할지가 문제
나의 독방살이는 시한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다가들었다.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싶고 허벅지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치고 싶어진다. 벽에 붙은 모니터에서 내 거취를 24시간 보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득달같이 달려와 각서를 요구한다. 항복문서다.
어떻게든 극복해야만 되었다.
결가부좌하고 백일 참선에 들어간 것이 그때다.
나는 참선 이후 엄청난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 중 어느날 내 앞에 여자의 시커먼 자궁이 나타났다. 점점 커지는 그 자궁에서는 퀴퀴한 정액과 더러운 고름이 한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면의 소리가 핥으라고 명령한다. 끝없이, 끊임없이 핥고 또 핥았다. 목숨을 건 참으로 참기 어려운 지옥이었다.
열흘 째던가, 점심 직전 하아얀 가을 햇살 속에서 갑자기 시커먼 자궁으로부터 새하얀 맑은 샘물이 콸콸콸 터져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 샘물을 꿀꺽꿀꺽 한없이 마시며 커다랗게 가가대소하면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한 소식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로써 끝. 모든 것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참선도 그만 파장났다. 꼭 백일 째 되는 날이다.
바로 그 이튿날 정오 박정희 피살 소식이 소내 특별방송으로 알려졌다. 그때 내 가슴 밑바닥에서 문득 세 개의 풍선이 이어서 떠올라왔다.
첫째 풍선의 이름은 ‘인생무상’.
둘째는 ‘안녕히 가십시오’.
셋째는 ‘나도 뒤 따라 갑니다’.
며칠 뒤 역시 특별방송으로 장례식 조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첫 마디는 ‘인생무상!’.
소름이 끼쳐오지는 않았다.
다만 고요한 가운데 뚜렷하게 이것이 다름 아닌 ‘모심’이라는 것.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화엄개벽’의 예감이 왔다.
‘인생무상’에서 의상(義湘) 스님의 법성게(法性偈)를, 박정희와 내가 똑같이 떠나야 할 운명, 그 운명적인 화해에서 동학주문 ‘모심’의 마지막 뜻인 ‘한세상 사람이 서로 옮기되 옮길 수 없는 화엄적 융합을 각자 각자 제 나름 나름으로 깨닫는다(一世之人 各知不移)’의 개벽적 신비의 직감을 느낀 것.
‘옮기되 옮길 수 없음’즉, ‘불이(不移)’는 송나라 주자(朱子)가 ‘화엄’을 유교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것이 ‘화엄개벽’에 대한 나의 희미한 첫 예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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