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강릉(江陵)
9. 학산(鶴山)은 선비 마을·박사(博士)마을
굴산사 비로자나불 / 굴산사 부도(浮屠) / 학(鶴)바위 / 굴산사 당간지주(幢竿支柱) / 범일국사(梵日國師)
태백준령(太白峻嶺)이 우뚝 막아서서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가르고 있는데 대관령을 넘어 영동지방 강릉 지경(地境)으로 들어서면 성산면(城山面)과 구정면(邱井面)이 잇닿아 있다.
구정면은 예전에 명주군(溟州郡) 소속이었다가 지금은 강릉시로 편입된 곳인데 내가 자란 학산(鶴山)은 구정면(邱井面)의 7개 리(里) 중 지형으로 보면 면의 중심부이다.
학산의 경관을 보면 서쪽으로는 태백준령의 봉우리인 오봉산(五峰山), 칠성산(七星山), 만덕봉(萬德峰) 등이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고 가운데로 학산천(鶴山川/於丹川)이 흘러내려 강릉 남대천과 합류하여 동해 남항진(南港津)으로 흘러든다. 남쪽은 금광평(金光坪)이라는 제법 넓은 들판도 펼쳐져 있는데 학산 본동과 조금 떨어진 학산 3리로 광명마을이라고 부른다.
학산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유적이 많이 출토되는 것은 물론, 그 훨씬 이전 부족국가였던 예맥(濊貊)의 하슬라(河瑟羅)로 불리던 시기의 유물들도 이따금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하겠다.
학산은 신라시대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하였다는 엄청나게 큰 사찰(寺刹)인 굴산사(掘山寺)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는데 이 굴산사는 신라시대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사굴산(闍掘山)파의 본산이었고, 범일국사(梵日國師)는 강릉 단오제(端午祭) 때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국사성황(國師城隍)인데 이곳 학산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범일국사(梵日國師)는 일명 품일(品日)로도 알려져 있고, 범일(泛日)로 표기되기도 한다.
고려 말, 우왕(禑王)은 이성계에 밀려 이곳으로 쫓겨 오며 울면서 넘었다고 하는 왕고개가 있고, 또 왕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의 장안성(長安城)으로 들어오는 고개인 장안재도 있는데 지금도 유물들이 출토된다.
장안재는 돌로 쌓은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당시 굴산사는 얼마나 대찰이었는지 아침이면 스님들 공양을 짓는 쌀을 씻는 쌀뜨물이 남항진 앞바다까지 흘렀다고 하니 족히 200명은 되지 않았을까....
그 스님들이 장안재를 쌓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고려시대부터 학당(學堂)에서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뭉구니(文群/文根)골’, 아침에 마을 처녀가 우물(石泉)에 물을 길러갔다가 바가지에 해가 떠 있는 물(泛日)을 마시고 태기가 있어 낳은 아이가 범일국사(梵日國師)인데 부모는 처녀가 낳은 아이라 남몰래 뒷산 바위아래 버리고 왔는데 아침에 가보았더니 학(鶴)이 품고 있었다는 학바위 등 전설에 얽힌 장소도 많다.
이곳 학산은 만성(晩惺)고택, 조철현(曺喆鉉)고택, 서지(鼠池)골 고택 등 유서 깊은 고택도 많고 조순(趙淳) 박사의 생가도 있는가 하면 1000년 이상 된 은행나무 등과 당간지주(幢竿支柱), 부도탑(浮屠塔) 등 수많은 굴산사 유적들도 흩어져 있다. 또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학산의 농요(農謠) ‘학산오독떼기’도 전승(傳承)되고 있다.
매년 5월 단오가 되면 대관령에서 국사성황(國師城隍:梵日國師)과 대관령 산신(山神:金庾信 將軍)을 단오장으로 모셔와 단오굿을 하는데 대관령 성황당에서 모시고 오다가 범일국사의 출생지인 이곳 학산으로 먼저 와서 마을 가운데 있는 성황당(城隍堂)에서 굿을 한 후 단오장으로 모시는 것이 절차이다.
이곳 학산은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으로 뛰어난 곳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범일국사(梵日國師)를 위시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탄생한 곳으로 유명하다. 제헌국회의원(晩惺 鄭冑敎)을 배출하였는가 하면 전국에서 제일 많은 박사가 나온 마을이며 정·재계 거물들을 다수 배출하는 등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전(前) 대한민국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지낸 조순(趙淳)님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분으로, 학산(鶴山)에서는 지금까지 박사가 총 38명 나왔고, 특히 교육자 출신이 많아서 현재까지 초중고 교장 및 대학교수 40여 명을 배출하여 선비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국적으로 박사들을 많이 배출한 박사마을을 살펴보면 춘천시 서면(西面), 전북 임실군 삼계면(三溪面), 경북 영양군 주실(注室)마을의 세 곳을 꼽는데 기실 가장 많이 배출한 우리 학산(鶴山)은 빠져있어 섭섭하다. 기존에 알려진 세 박사마을의 현황을 살펴보면,
강원도 춘천시 서면(西面)은 전국적으로 이미 박사마을로 알려져 있는 마을인데 10개 리(里)에서 배출한 박사가 184명, 전북 임실군 삼계면(三溪面)은 14개 리(里)로 박사 157명, 경북 영양 주실마을(注室:日月面 注谷里)은 박사 14명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리(里) 단위로 정리해 본다면 춘천 서면은 리(里)당 18.4명, 임실 삼계면은 리(里)당 11.2명, 영양 주실 마을은 리(里) 단위이니 14명이다. 그런데 우리 학산은 리(里) 단위로 38명이니 단연 전국 최고이다.
그런데 정작 박사마을을 꼽으면서 우리 학산(鶴山)은 거론되지 않고 있으니 서운하지 않을 수 없다.
춘천 서면 박사마을 선양탑 / 전북임실 삼계면 박사체험관 / 경북 영양 주실마을 지훈공원 승무(僧舞)
춘천 서면 박사마을은 의암호가 근처에 있고 춘천시에서 보면 소양강 서쪽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으로 명당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박사마을 선양탑(宣揚塔)을 세우고 탑 뒤쪽으로 병풍처럼 세운 비석에 박사들의 명단을 빼곡히 적어 넣어 그 위엄을 선양(宣揚)하고 있다.
전북 임실군 삼계면 박사마을은 경관이 좋고 마을 가운데로 맑은 내(세심천:洗心川)가 흘러서 마을 이름이 세심리(洗心里)이다. 유물 유적은 별로 없고 박사체험관을 지어 배출한 박사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요즘은 정드레 마을이라고 부르며 자연 생태마을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박사체험관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학위자들의 사진과 프로필을 빼곡히 전시하여 자랑하고 있다.
경북 영양 주실(注室) 마을은 16세기 이전부터 주씨(朱氏)가 살았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주씨 가문이 멸문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지로 흩어졌는데 그 후 조(趙)씨가 들어와 살면서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시(詩) ‘승무(僧舞)’로 알려진 청록파(靑鹿派) 시인 조지훈(趙芝薰)이 태어난 곳인데 여러 채의 고택(古宅)과 월록서당(月麓書堂),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 창주정사(滄洲精舍) 등 역사적인 건물들도 많다고 한다. 이곳 마을 안내에는 박사마을이라는 자랑은 없고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내세워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과 지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주실골은 상당히 오지(奧地)인데 뒤에 문필봉(文筆峰)이 우뚝 솟아 경관을 자랑한다.
그런데 학산은 이 세 곳과 비교하면 마을의 역사로 보나 곳곳에 있는 유물 유적은 물론 박사를 배출한 수만 비교해 보아도 단연 앞서는데 이렇다 할 기념물도 하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대한제국 이화(李花)문양 / 꽤 꽃 / 학산 오독떼기 야외공연(굴산사 당간지주 앞)
학산의 또 하나의 자랑은 꽤 꽃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학산을 ‘학(鶴)과 꽤’의 마을로 부를 만큼 학과 꽤나무가 많았다.
강릉지방 말인 ‘꽤’는 일명 ‘오얏’, ‘왜지’, ‘고야’ 등으로 불리고, 경상도에서는 ‘왜추’라고 부른다던가....
봄철이 되면 마을은 온통 꽤 꽃으로 새하얗게 꽃밭을 이루었으며, 흰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飛翔)하는 우아한 학(鶴)의 모습과 어울려 학산은 백색의 천국(天國)으로 불리기도 했다.
꽤 꽃이 피는 봄이 되면 강릉 시내 사람들은 꿈속을 걷는 것 같다며 학산으로 몰려오곤 했었다.
꽤는 훗날, 자주빛 복숭아라는 의미로 자도(紫桃)라 부르다가 ‘자두’를 표준말로 하였다고 하지만 종류가 너무나도 다양한데 모양과 크기, 맛까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신맛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 나라의 상징인 국화(國花)를 ‘이화(李花)’로 삼고 나라를 상징하는 모든 것에 이화의 꽃문양을 새겨 넣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얏(李:오얏)으로, 바로 우리나라 토종자두, 즉 강릉말로 꽤 꽃의 그림이다. 이곳 학산은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를 돌이켜 보면 ‘국화(國花)의 고장’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장안재(長安峙) 낙락장송 소나무밭을 하얗게 뒤덮던 학(鶴)은 농약으로 인한 영향도 있겠지만 서지골 언덕 위에 예비군 훈련소가 들어서면서 총소리와 화약 냄새로 인한 영향인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또, 온통 마을을 뒤덮던 꽤나무는 수령이 오래되고 그다지 상품 가치가 높지 않은 과일로 취급을 받다 보니 더 나은 유실수(有實樹)로 바꾸어 심기 시작하면서 마을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