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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38장 언약자손들의 범죄 | 39장~45장 요셉과 형들의 화친 44장~45장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 | 46장~50장 언약자손들의 형통 |
45장입니다. 1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히고, 놀라는 형제들을 위로하며 아버지께 올라가서 자기에게 내려오게 하라고 부탁하며 형제들의 목을 안고 우는 내용입니다.
유다의 가족 이야기를 들은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습니다(1절).
요셉은 유다의 가족 이야기와 함께 간청함을 듣고 자신이 형제들에게 정탐꾼과 도둑으로 시험한 모든 계획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고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과 이스라엘을 위해 억제하였던 사랑의 감정이 터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에게 지금까지 감추어 왔었던 자신의 신분을 밝히 드러냅니다.
지금까지 감추고 가리웠던 것들을 걷어내자 그는 요셉이며 형제들과 같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늘 형제들과의 중간에 자신을 속이고자 세워 두었던 통역자 또한 없애고서 같은 언어로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소리 높여 우니 “애굽 사람들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게 됩니다.(2절)
형제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보인 요셉이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나이까”라며 아버지의 생존을 묻지만, 형들은 놀라서 어리둥절하여 대답하지 못합니다(3절). 그것은 그들이 그동안 철저히 숨겨 왔던 범죄 사실이 다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먼저 형들의 숨겨둔 범죄 사실을 드러내어 말하는데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4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지금까지 은밀하게 누구에게도 밝히 말하지 못하고서 숨겨둔 자신들의 범죄 사실이 드러나고 맙니다. 유다는 앞 44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라고 회개는 하면서도 그 죄악에 대해 소상히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을 요셉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중심을 아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안에서 벌어진 모든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까지 있게 되었음을 설명합니다.
형제들의 가슴 은밀한 곳에서는, 동생 요셉을 은 이십에 팔아 버렸고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께는 동생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한 것이 지워지지 않고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라고 회개하면서도 자신들의 입으로는 결코 소상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당사자인 요셉이 직접 말하고,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되었다는 설명을 이어서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절)라고 말입니다. 자기들의 죄가 밝혀지므로 두렵고 놀라서 말도 못하는 형들을 위로하며, 자신이 어릴 적 꾼 꿈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모든 일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설명해 줍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께서 한시도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셨으며, 그가 하신 언약으로 말미암아 요셉 자신을 앞서 애굽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백성된 우리가 서로 잘잘못을 가릴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한 뜻을 드러내시고자 자신을 팔게 두셨고,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와 옥살이를 감당하게 하시는 가운데에 총리가 되게 하셨으며 그리고 형제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한탄하지 마소서’라는 말의 뜻은 ‘당신들 스스로에게 화내지 마소서’입니다. 자신들이 팔았던 동생 요셉이 애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총리가 되었으니 죽을 죄를 지은 것이라고 스스로 비관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화내지 마소서’와 함께 일시적인 금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자신의 설명을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보내셨나이다’라는 동사가 참 중요합니다. 이는 요셉이라는 자신이 스스로를 알고 설명하는 핵심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보내셨나이다’에 해당하는 ‘쉘라하니’의 기본형 ‘솰라흐(שׁלת)’는 ‘보내다’라는 뜻을 지니나, 성경에서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 곧 ‘구원’이나 ‘재앙’에 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낼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은 ‘솰라흐’를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이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보내신 ‘사도’를 의미하는 ‘아포스톨로스’ 곧 ‘보냄을 받은 자’의 어원이 되었습니다(마10:2,눅17:5,롬1:1).
따라서 요셉이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나이다’라고 한 말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먼저 애굽으로 ‘보냄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요셉을 애굽으로 판 자들은 형들이었으나 본문의 주어가 ‘하나님(엘로힘)’으로 나오는 데서도 확인됩니다. 즉 요셉의 형제들이 시기심 때문에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았던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될 야곱(이스라엘) 일가의 생명을, 열조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언약대로 보존시키고 생육 번성하게 하시고자 먼저 요셉을 애굽에서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사용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요셉은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고 하며, 앞으로 벌어지는 일을 확정적인 것처럼 확신을 갖고 형제들에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오 년’은 더 흉년을 주실 것이므로 ‘농사가 안된다’라고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흉년이 아직 오 년은 더 계속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7,8절)고 말합니다.
요셉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신앙자입니다. 하나님 계시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과 고통이 형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우리 가족의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먼저 보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에는 ‘자아실현’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시작과 끝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과 형제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며 예표입니다. 그는 형제들로 말미암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구덩이에 들어가서 다시 살아나 애굽으로 들어갔으며, 그 애굽 역시 쇠풀무 즉, 용광로와 같은 곳입니다(렘11;4). 곧 죽음의 자리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용광로에서 살아나 애굽과 온 땅의 주인이 되었고 그리고 양식을 공급하는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다음은 형제들입니다. 이들은 요셉에게 범죄했습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죽였다가 용광로와 같은 애굽으로 팔았습니다. 이 역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해야만 진정한 용서가 되고 화목이 됩니다. 요셉은 자신이 당한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아서 이미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용서하지 않습니다. 저들에게 징계를 가하여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는 전능자로서 오직 하나뿐입니다.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고난가운데 깨닫게 되고 요셉의 계획대로 돌아섭니다.
7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형제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형제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명을 보존하고’라는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심을 요셉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생명의 보존은 어느 무엇도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나를 애굽으로 보낸 이는 나를 판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셉 자신이 총리가 된 것은 자신의 뛰어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사용하셨음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하나님 중심적 믿음이라 합니다】
요셉뿐만이 아닙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왕궁과 광야로 몰았습니까? 모세가 의도적으로 왕궁으로 들어갔나요? 모세가 작정을 하고 광야로 도망갔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도구로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또한 바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시고자 먼저 예수를 핍박하는 자가 되게 하신 가운데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도구로 삼으셔서 자기 백성을 온 땅에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주의 복음의 일을 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 아닌 자신의 뜻이 기준이 되어 자기의 능력과 지식 그리고 이름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이름과 교회는 있는데 예수와 그의 십자가는 없습니다. 요셉에 관한 내용을 읽지 않았나 봅니다. 바울의 삶을 공부하지 않았나 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가운데 전부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뿐이요 주께서 시작하시고 마침이 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장9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장36절) |
9절에서 15절은 요셉이 형들에게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 자기의 말과 형제들이 본 모든 것을 고하여, 아버지를 속히 모시고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하면서 목을 안고 우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태도는 형들의 잘못을 깨끗이 용서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9,10절)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된 것이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되었다면 아마도 끝없는 교만으로 가득하겠으나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알고 믿기에 그는 겸손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평가합니다.
일반 교인들은 조금 무언가 자신이 기대하는 바대로 잘되면 우쭐하여 교만하고 그리고 무언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망하거나 가세가 기울면 세상 무너지듯이 축 늘어지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한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두 입으로는 하나님이 하신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모두 자신 스스로가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눈앞에 놓여진 결과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변하고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라는 사실을 믿는 자는, 자신의 눈앞에 되어진 결과 여부에 상관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본문 9절에서는, 형태상 대구(對句)를 이루는 두 부분이 하나의 뜻으로 연결된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속히...올라가서’와 ‘지체말고...내려오사’입니다. 꼭지점은 ‘가나안 땅’의 ‘아버지(집)’입니다. 이는 총리 요셉의 강조 형태이면서도 단호한 명령형입니다.
이것은 형제들이 동생 요셉에게 저지른 범죄가 밝혀진 것으로 인해 형들이 애굽으로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차일피일 미룬다거나 그리고 앞으로 남은 흉년의 심각성을 요셉은 알고 있기 때문이지만, 이면적 의미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애굽에 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본문 10절에서 눈여겨 볼 지명 하나가 나오는데 그곳은 바로 ‘고센 땅’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버지와 온 가족과 가축들이 있을 장소를 사전 지정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 땅과 관련하여 바로에게는 목축하는 자들이라고 소개하라고 합니다(창46:34). 하지만 요셉의 본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나갈 때에 신속하게 나가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야곱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창46:28)
요셉은 이어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라고 말을 합니다(11~13절).
요셉은 앞선 6절에서도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추수도 없다’고 하였고, 본문에서도 역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으로 분명하게 형제들에게 전하며, 고센 땅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모든 가족을 봉양할 것임을 형제들이 눈으로 본대로 아버지에게 전하여서 속히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합니다.
말을 마친 요셉은 또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을 하게 됩니다(14,15절). 요셉이 형들과 동생 베냐민을 만난 감정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온 가족으로 속히 오라는 당부와 함께 또 베냐민과 형들과 목을 안고 우는 것입니다.
요셉이 울며 베냐민과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안부와 함께 온 가족으로 애굽으로 속히 내려오라는 당부가 끝나자마자 그는 베냐민과 함께 모든 형제들의 목을 안고 더하여 웁니다. 지금까지 형제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의 상태에서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있다가 그제서야 요셉과 함께 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이 형들과 입을 맞추며 안고 한 것이 자신들을 향한 용서와 화해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의 태도를 보고서 자기들의 잘못을 용서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제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형들 역시 아무런 변명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이미 다 용서하였기 때문이고 형들은 자기들의 잘못이 다 용서되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는 질책도 변명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사랑과 감사와 감격의 눈물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은 죄인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그 허다한 죄를 용서하고 덮어 줍니다. 마치 둘째 아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온갖 실수와 잘못을 저지렀으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아무런 질책없이 사랑으로 용서하여 품에 안아주듯이 말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로써 언약자손 곧 택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섭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언약 자손의 죄는 그 열조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려고 모든 용서와 보호하여 주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계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언약대로 오시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 자손인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지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확증됩니다.
16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은 바로가 요셉에게 가족들을 형들로 데려오게 하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전해지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합니다(16절).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17,18절)고 말합니다.
당시 온 세상이 기근으로 인해 불안정한 가운데 애굽은 요셉으로 인해 태평성대다 보니, 요셉의 가족들마저도 귀하게 여기는 바로와 그의 신하들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요셉으로 명하여 아버지와 모든 가족으로 애굽으로 오게 하라 하며 그리고 애굽의 좋은 땅과 기름진 것으로 맞이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바로는 가족들 중에서 아이들과 아내와 아버지를 태울 수레를 보내고, 이사를 위하여 집의 물건들로 인해 지체하지 않도록 애굽의 좋은 것으로 주겠다며 내버려 두고 오라고 합니다(19,20절). 고대 근동 자료에 의하면, 당시 ‘수레’는 고대 근동 국가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애굽만이 사용했으며, 이것을 보냈다는 것은 보낸 자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온 애굽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오게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사백 년간 객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바로의 마음까지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창15:13).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으로 내려오면서 바로에게 이런 호의를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양식을 구해서 베냐민과 홀로 붙들려 있는 시므온을 구해서 돌아가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현실이며 생각의 범위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현실은,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나게 되었고 그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 덕분에 바로 왕의 환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현실은 요셉의 보복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이 자신을 밝힐 때에 놀란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셉이 어떤 보복을 해도 야곱의 아들들은 항변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신이 당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바라봄으로 모든 상황이 형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 호의는 요셉으로 인한 것이지 형제들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바로에게 호의를 받고 돌아가는 것이나 요셉에게 한 악한 짓에 대해서도 전혀 추궁받지 아니하는 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받을 수 없는 은혜였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형제들의 행위로는 심판과 보복을 받아 죽어야 하지만, 요셉의 용서의 은혜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 형제들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의 ‘나 자신’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애굽의 주라고 말했는데(8절), 애굽의 주가 된 요셉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들을 여전히 형제로 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 잘한 것이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예수님께 잘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조차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자신을 버린 제자들을 다시 찾으시고 부르십니다. 때문에 누구도 나의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했는데’라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요. 어느 것 하나 그들 뜻대로 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간섭하신 하나님의 뜻은 야곱 가문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7절).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요셉이 버림받는 고난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은 언약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예표입니다.
21절부터 28절 말씀은 형제들이 돌아가 부친 야곱에게 모든 일을 고하는 내용입니다.
요셉과 함께 바로마저 아버지와 가족들로 애굽으로 내려오라 하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행합니다(21절). 본문에서 성경 기자는 형제들을 가리키는데 있어서 야곱의 아들들이나 혹은 요셉의 형제들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 전체의 흐름에서 성경이 무언가 꼭 짚고 넘어가려는 특별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함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양식을 얻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왔던 것이나, 그들의 일가를 애굽으로 데려오기 위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단지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셨던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서, 하나님께서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이루시는 여정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는 길은 한 가족의 단순한 이민사가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언약사와 택한 백성들을 향한 구속사의 중요한 사건인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명령대로 수레와 길 양식과 옷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더하여 선물합니다(21,22절). 요셉은 아버지를 위하여 수나귀 열 마리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또 암나귀 열 마리에 아버지가 애굽으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형제들을 보내면서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23,24절).
위 본문에서 ‘다투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간(דנן)’은 ‘원망하다’, ‘불평하다’, ‘반역하다’는 뜻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응어리진 감정으로 인하여 투덜대거나 대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셉은 아버지 집으로 떠나는 노중에서 형제들에게 다투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과거에 요셉 자신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한 것이나 상인에게 판 것 등으로 서로가 잘잘못을 따지고 탓을 하며 다툴까 마음에 걸려 미리 차단한 것입니다.
요셉이 서로 다투지 말라고 한 것은, 요셉을 만남으로 주어진 새로운 현실은 죄와 허물을 묻지 않고 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있는 새로운 현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의를 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전가시키심으로 우리는 받을 수 없는 호의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서로를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베푸신 호의에 대해 감사할 뿐입니다.
가나안 땅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애굽에서 요셉을 만난 일에 대하여 알리는데(25절),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하니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였으나(26절), 그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말한 그 모든 일들을 말하고, 그리고 야곱이 자신을 태워 가려고 요셉이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듭니다(27절).
이에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합니다(28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전한 소식은 곧 ‘복음’입니다. 지금까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야곱으로서는 아들들의 말이 믿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믿으면서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많은 가족을 이끌고 그동안 가꾸어 놓은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요셉을 보러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애굽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대로 그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사백 년간 섬길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창15:13). 그래서 온 땅에 흉년이 찾아 왔고 그리고그 흉년을 피하도록 준비해 둔 요셉과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45장 본문에서 요셉을 보며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으신지요? 바로 예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팔리셔서 온갖 고초와 조롱을 당하시다가 언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언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좌정하셔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성령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당신의 나라 천상천국을 예비하는 지상천국인 교회로 살게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한 모형이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