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친 것을 통해 중도를 깨닫는다
불교에서 중도를 설하다보니, 어떤 사람은 중도만이 절대적인 진리이며, 중도에서 어긋난 극단적 행동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중도라는 진리 그 자체에도 집착한다면 그 또한 참된 중도에서는 어긋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친 삶을 경험해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삶을 경험하면서 그 극단의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어릴적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마음이 빼앗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집착을 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참된 사랑이 과도한 집착이나 소유욕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한다고 과도하게 운동에 중독이 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훗날 운동 또한 중도적으로 해야지 과도해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겠지요. 돈 버는 데만 사로잡혀서 쓸 줄도 모르고 혹사시켜가며 돈을 벌어 본 사람은 훗날 돈 버는 것에만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스스로 깨닫게도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중도적이지 못한 치우친 삶을 통해서 진리인 중도의 깨달음에 한 발 다가가게 됩니다. 즉 중도적이지 못한 삶의 경험들을 통해 오히려 중도라는 진리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이처럼 진리 아닌 것을 경험함으로써 결국에는 진리로 귀결되는 귀의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근원에서 본다면 우리는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타까워하거나, 아파하거나,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괴롭거나, 힘들거나, 두려워 보이는 삶이 펼쳐지고 있더라도, 사실 그 근원에서는 그것 또한 우리를 돕기 위한,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결국 저 깨달음의 고향으로 이끌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중도적이지 못한 치우친 삶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고, 중도적인 삶 또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처럼 이 우주법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삶의 연주들은 근원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축제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좋은날이고 날마다 해피엔딩인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중도의 의미입니다. 중도는 중도만 좋은 길이고 중도에서 어긋난 것은 잘못된 길이라고 둘로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중도의 길만을 선택하는 그런 분별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로 나누지 않게 되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이 텅 비어 고요합니다.
그러니 설사 극단적인 생각, 치우친 생각이 일어나거나, 중도에서 어긋난 삶을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로인해 자신을 책망하거나 미워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극단적이고 비중도적인 삶이야말로 우리의 수행을 도와주는 벗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도를 지켜도 아름답지만, 지키지 않아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이 잘 되는 것도 좋고, 마가 끼는 것도 좋은 것이지요.
삶은 이와 같이 진리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매 순간의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진리이며 진실 그 자체입니다. 이렇듯 삶 그 자체의 근원적 진리성, 완전성을 통찰해 보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좋고 나쁜, 괴롭고 행복한 양 극단의 모든 삶을 어느 하나라도 거부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처럼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중도의 실천은 곧 수용과 사랑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첫댓글 언제나 답을 주시는 깊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형광심 법우님 늘 감사와 사랑 무한정 보냅니다 ..늘 스님 법상 잘 듣고 하루 시작합니다
감동과 스님 존경심이 자꾸만 불어납니다 ()()()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수용하고 사랑한다. 즉 나를 온전히 인정하고 이해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