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피린 한 병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연중 제 18주일 나해 강론 2024,8,4
아스피린 한 병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소년은 우연히 책을 보다가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원주민들을 돌보며 생활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족과 떨어져 남을 돕는 시바이처 박사의 생활은 소년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소년은 슈바이처 박사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지만 시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에 있었고, 소년은 그와는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데 무슨 수로 그를 도울 수 있을까. 처음에 그 소년은 그 이유 때문에 매우 난감하였다.
생각끝에 소년은 공군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와 함께 보낸 아스피린 한 병을 혹시 아프리카를 지나가는 비행기가 있으면 그 편에 보내어 낙하산으로 슈바이처 박사에게 전해달라는 편지였다. 사령관은 소년의 착한 마음에 감동하여 소년의 편지를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 그 결과 방송국과 군부대에는 아프리카에 보내 달라며 보낸 국민들의 각종 의료용품이 산더미 같이 쌓였다. 나중에 시바이처 박사에게 보내기 위하여 한 자리에 의료용품을 모아보니 수억원어치나 되었다.
후에 그 구호품을 받은 슈바이처 박사는 말했다.
"한 소년이 이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니 .... 소년은 그 옛날 예수께 먼저 물고기와 보리떡을 내놓아 수십만 명을 먹여살린 소년과 똑같습니다."
[좋은생각, 1994년 11월호]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때에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요한 6,24-35)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은 빵의 기적에 뒤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 몹시 헤매다가 만나게 되었을 때 그분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라고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먹는 것이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삶의 진정한 가치요 영생에 이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먹고 마셔도 배고프고 목마를 것이지만,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을 먹고 마실 때 영원한 삶 자체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아버지에게서 권능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치고는 애매모호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착한 일을 하라든가 자선을 베풀라든가 그밖에 기도를 열심히 하라든가 식의 답을 기대했을지 모를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으라고만 하신 것입니다. 사실 빵의 기적은 성부께 대한 완전한 신뢰와 의탁에서 가능했기에 아버지의 일을 위해 온전히 믿고 의탁하라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일 때 기적이나 놀라운 표정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하여 예수의 진정한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요한 6,30) 하고 묻습니다. 어리석게도 계속 현실적인 요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베풀어 주시는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사람들의 불신앙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신앙, 전적인 신뢰의 자세야말로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탈출 16,2-4.12-15)에서 언급된 광야의 만나는 결국 신약의 만나, 곧 생명의 빵이신 예수와 연결됩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여정을 통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불만을 터뜨리며 하느님과 백성의 지도자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을 때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려준 것이었습니다. 즉 무엇이 진정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그들의 모습, 그것은 믿음에 불충실하고 참을성이 약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을 먹여 살리고자 만나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도 꼭 가족 수대로,하루치만 주어질 뿐 그 이상의 것은 모두 부패하게 하셨습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나날의 양식에 만족하도록 배려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만나를 통해서, 모든 삶의 원천이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절대자이신 그분께 대한 완전한 위탁이 요구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만나가 바로 신약에 와서 예수의 몸으로, 그분의 생명의 빵으로 이어지게된 것입니다. 구약의 만나를 먹은 조상들은 죽었지만, 신약에서 예수의생 명의 빵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것이 큰 차이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이는 제2독서 에페소서(4,17.20-24)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방인들처럼 사는 이가 아니라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을 떨쳐버리며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사람이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몸과 마음 안에 받아들여 온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현세적인 생명이나 눈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한 영원한 삶과 진리를 베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삶, 이것이 영원한 빵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길인 것입니다.
아스피린 한 병을 슈바이처 박사에게 보내고자 한 한 소년의 착한 마음이 많은 사람의 참여를 불러일으켜 기적을 이루었듯이 성체성사의 기적은 작은 것을 나누려는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의 소중함을 깨닫고 늘 성체 안에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