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 사무엘하 24:18-25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인간 삶 속에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성도의 삶의 주제이며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제단을 중심으로 살았고, 주일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성경을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나를 해석하게 해야 합니다. 억지로 성경을 해석하다가, 망한 자가 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 맞도록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나를 해석하게 하고, 성경이 나의 인격과 삶을 판단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항상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문제를 내 사정에 맞추어서 풀어가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지금 나의 현실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서 자기 사정을 앞세워서 주님을 만나게 되지마는, 주님은 하나님에게서 문제를 풀어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지, 내 시각으로 보면 자신에게 속고 맙니다. 내 시각으로 보면, 나는 그 일에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구경꾼이 되고 맙니다. 전도도 안 해본 사람이 몇 십명 정도는, 간단히 전도할 수 있는 것처럼 큰 소리 치지만, 해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어렵다고 합니다. 기도, 충성도 대개는 그러합니다. 주일학교에도 잘 안보내면서, 앞으로 자식을 주의 종으로 만들겠다고 하고 선교사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이야기 하지 못하고, 또 그 일을 위해 눈물 땀 흘려 보지 못하고 이야기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그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시면서 사랑을 말씀하셨고, 용서하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셨고, 기도하시면서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배에도 구경꾼이 되기 쉽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라는 말씀은, 예배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자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선 사람입니다.
리델(Eric Liddell)은 철저한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상의 여러 분야에서 가령 200m, 400m, 800m, 등에서 세계기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24년 올림픽 경기에서도, 당연히 금메달을 따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승전날이 주일이라는 점 때문에, 경기를 포기하고 예배에 출석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주일성수뿐만 아니라, 흑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늘 흑인 선수들과 포옹이나 악수를 나눔으로써,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관중들을 의아스럽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흑인들과의 관계가 좋게 보이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때로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신앙이 강한 리델은, 선수 생활을 마치고 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믿는 자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 당시 미국인들이 멸시하던 중국에 선교사로 나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중국에서 보냈으며, 가난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곳에서 생을 마쳤는데, 후에 그를 기념하는 전기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날으는 영국인”(The Flying Scotsman)이었습니다. 이것이 영화화되어 1982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는데, 그때의 영화 제목이 “불수레” (Chariot of Fire)였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뛰어난 목사나 신학자도 아니지만, 그는 신앙인의 원칙을 지킨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산사람이었다.”
사람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본이 잘되어야 오래갑니다. 실력도 기초부터 잘 다져야 합니다. 벼락치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운동선수도 기본이 잘 갖추어야 합니다. 기본이 잘되어 있지 않으면, 그 선수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회도 기본이 잘되어야 합니다. 기초질서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무너집니다. 기본이 충실해야 합니다. 원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굳게 설 수 있었던 원리중의 하나가, 사도들이 기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고 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최고의 지휘관이었던 백선엽 장군이, 국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그에게 위기 돌파 해법을 구했을 때 한 말이, “비상사태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위기일수록 변칙은 실패의 첩경입니다. 위기의 시대에는 조조 스타일로는 안됩니다. 정도를 밟아야 합니다. 나는 실패할 때마다, 지금 내가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인가를 세심하게 살피고, 그 본질을 강화한 후 다시 대비했을 때에, 항상 승리하곤 하였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도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본이 안되면 아무리 소득이 높다 하더라도, 선진국이 되지 않듯이, 신앙생활의 연수가 오래되고, 다른 사람들의 선망이 되는 직분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신앙은 저급한 신앙입니다. 성도의 기본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물건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기본이 무너지면 안 됩니다. 시대가 타락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사용하고, 사용해야 할 물질은 사랑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현상이 발생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기본이 안되면 처음에는 혹시 괜찮을지 몰라도, 결국은 무너집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서의 마지막입니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중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인물은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입니다. 이들의 삶을 통하여 삶과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단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이끄시기 위함인 것을, 지난 시간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서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은 전염병을 통하여, 삼일 동안 칠만 명의 백성을 죽게 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한 것이, 하나님께 왜 죄가 되는가를 깨닫게 하시고,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으로부터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이끌어 낸 하나님은, 본문에서 선지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는 지시를 하십니다. 제단을 쌓으라는 것은 곧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제사에는 필히 제물의 희생이 있습니다. 곧 다윗이 제단을 쌓는 의식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고, 죽는 제물의 희생으로 인해서, 심판에서 벗어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5절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사무엘하서의 마지막 구절인 25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멈추게 한, 번제와 화목제가 말해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던 재앙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에게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의 재앙을 대신 담당한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의 재앙이 멈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지던 이스라엘의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결코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고스란히 멸망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이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독생자 아들에게 대신 쏟으심으로써 ,우리에게는 진노와 재앙이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번제와 화목제물의 희생,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것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친히 제물 되신, 예수님의 의의 행위에 대한 감사함과 찬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나를 향한 진노를 멈추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기 위해 올라갑니다. 아라우나는 다윗과 그 신복들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하며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아라우나는 자신에게는 제물로 쓸 소가 있고, 땔나무까지 모두 있다고 하면서, 그 모두를 다윗에게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24절에서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왜 다윗은 제단을 쌓을 타작마당과 제물과 땔나무 모두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굳이 값을 지불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굳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을 것을 지시한 이유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역대하 3:1절을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모리아 산이었으며, 그 타작마당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을 대신 제물을 삼고, 이삭을 살리신 일도 있습니다. 16절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멈추게 하실 때, 백성을 멸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라우나의 타작마당과 연관된, 이 모든 내용들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요?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제물을 대신하여 죽이시고, 이삭을 살리신 사건이 있었고, 사무엘하서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는, 재앙이 멈춘 곳임을 생각해 볼 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멈추시고, 죽을 자를 살리신 긍휼과 자비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시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멈추게 된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를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의 시대에는 성전으로 나타난 것이고, 드디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시고, 친히 제물 되신 분이고, 성전이시고, 우리의 모든 재앙을 온 몸으로 받으시고, 우리를 건지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상 22:1절을 보면 다윗은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며, 이스라엘의 번제단은, 사람의 손으로 세운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값을 치르고 산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창세기 2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할 때, 매장지를 헷 족속에게서 구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헷 사람은 호의를 베풀어서, 묘실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고,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자신의 소유로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장례는, 단순히 죽은 자를 장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사라의 몸에서, 생명을 잉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약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오직 언약으로만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헷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헷 사람이 자신들의 호의를 내세우며 아브라함의 세계에 끼어들, 그 어떤 여지도 남겨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값을 치르고 산 이유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곳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희생 제물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타작마당에 아라우나의 호의가 끼어든다면,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에 인간의 행위가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사전에 이것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성전의 세계는, 제물의 의의 희생만이 있을 뿐, 인간의 어떤 행위도 끼어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가 드려짐으로써 백성들에게 내려진 제사가 그쳤다는 것은, 말 그대로 멸망했어야 할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제물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희생이 함께 하는 자의 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하나님의 재앙이 멈추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 가운데 있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재앙이 멈추어진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담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예수님이 모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수님께 나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입었을 때,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꼭 보답을 하겠다’는 말을 주로 합니다. 이것은 받은 은혜를 나중에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런 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도움을 받았을 때는, ‘나중에 갚겠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나중에 갚겠다는 말 자체가, 상대방이 베푼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말 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크다고 말하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여기는 것이 태반입니다. 왜 예수님의 은혜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부어지는 진노를, 예수님이 홀로 담당하셨다는 것에 대해, 시큰둥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악에 대해 가볍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악함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과 죽으심 또한 가벼운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히 9:15절을 보면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함도, 열심도 영원한 기업의 보증이 되지를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보증이 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함만을 바라본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열심히 하라’는 말조차도, 불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열심이 부르신 자를, 이끌어 가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 자기 행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열심에 의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했다’는 말은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우리의 중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25절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신 근거는, 번제와 화목제에 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행위를 보시고, 기도를 들으신 것이 아니라, 희생이 담긴 기도만을 들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희생이 담긴 기도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우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뜻을 기도라는 형식에 담아서 관철시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서가 오늘 우리가 말해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우리에게 쏟아져야 할 진노가, 무엇 때문에 멈추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자신의 죄의 깊이에서 깨달으면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말합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다윗이 한때 잘못된 생각으로 큰 재앙을 받았지만, 그 재앙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저희들도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항상 신앙의 기본 원리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늘 생활 속에서 회개하는 삶, 예배하는 삶, 헌신하는 삶의 원리를 실천하여 복된 삶을 영위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구원받은 이유와 우리의 삶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온전한 예배 회복을 위해서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를 대신하여 산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