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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깡이 아지매란?] ‘깡깡이 아지매’는 철로 만들어진 배의 노후를 방지하기 위해 2년여에 한 번씩 배 밑창이나 측면에 붙은 조개껍데기나 녹을 떨어내는 잡역부의 일을 하는 아낙들을 일컫는 말이다. “부산에 가서 깡깡이 질이나 하여 보세”란 노랫말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부산 영도에 나타난 것은 일제 강점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직업군을 이룬 것은 제3 공화국의 조선(造船) 장려 정책으로 신조된 철강선이 늘어난 1960년대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존재가 생활사 아카이브에 저장될 만한 가치를 갖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기능적 역할보다 단순 잡역부로 일하면서 가난을 이겨 낸 그들의 억척스런 삶이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 대다수는 피난민의 후예이거나 도시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거나 농어촌을 떠나온 실향민들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배의 녹을 떨어내는 단순한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노역의 대가로 받은 1960년대의 일당 1천 원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돈으로 가장을 대신해 간신히 가족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는 있었으나 살림을 일구거나 자식을 번듯하게 교육시키기에는 힘이 부족하였다. 결국 가난은 대물림되고 ‘깡깡이 아지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빈곤 2세대를 이루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해도 40여년 가까이 젊음을 바쳐 뱃전의 철판을 두드리는 일을 하다 청각마저 잃은 이가 적지 않은 깡깡이 아지매의 삶의 의지는 후대의 귀감이 되고 남을 것이다.
한일 합방이 된 이후인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한국의 전통적 조선소와 새로 침입한 일본인 조선업자의 조선소가 서로 병립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선박 건조의 실적 면에서는 한국의 업체들이 일본인을 압도했지만 전통적 조선 방식을 묵수하는 한국의 전근대적인 업체와 명치유신 이래로 새로운 기술을 체득한 일본의 근대적 업체는 그 역량차가 점차 커져 간다. 특히 1887년(고종 24) 다나카 조선소가 영도에 들어선 것을 비롯해 일본형선(日本型船)의 보급과 발동기선(發動機船)의 등장으로 머잖아 일본인 업체들이 조선업을 독점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이전, 영도 쪽의 영선동 2가와 그 대안(對岸)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남포동 4가[영선동 2가에서 약 1.5㎞ 떨어진 곳]인데 그 사이의 바다에는 좁다란 대풍포(待風浦)가 있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 남항동 1가, 2가, 3가와 대교동 1가에 해당되는 넓은 지역은 대부분 바다였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육지 사이에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설립되었던 조선소들은 거의가 영도의 영선동에 집중해 있었는데, 이곳이 소형 조선소의 단지로서 적합했던 것은 육지 깊숙이 파고 들어온 바다와 갯벌 지역으로 인해 풍랑의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지금의 남항동 1~3가와 대교동 1가 일대는 당시 영선동에 속했음]. 이러한 지형적 요인뿐 아니라도 일본인 조선 업체들이 조선 반도 각지로 진출하기 전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산에 먼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하였다. 1920년대 이래 부산 시내 각처에서 대규모 매립 공사가 성행(盛行)하여 영도에서도 북부 봉래동 5가와 청학동 일부에 걸쳐 산지 개간과 임해 호안 공사(臨海護岸工事)가 시공됐다. 그리고 이는 석유 저장 기지와 뒷날 명실상부 한국 조선 근대화의 산실로서 큰 역할을 한 조선중공업[지금의 한진중공업의 전신]의 터전이 되었다. 이렇듯 영도는 조선소가 입지하기 좋은 자연 지형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형 어선의 보급이 더욱 고조되고 동력 어선도 일반화되었던 1930년대의 상황은 ‘한국 조선 업계의 1차 부흥기’였다. 선박 엔진 같은 핵심 부품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지만 주요 조선(造船) 시장의 품목인 어선은 동력선, 무동력선 모두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소는 이전보다 선박 건조의 기회가 많아지고 주요 조선소에는 동력선 건조, 나아가서는 소형 엔진의 자체 제작이 가능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게다가 화물선의 수적 증가와 대형화로 한국에서도 ‘강선(鋼船) 조선소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부문은 대형선 수리 능력의 확충이었다. 소형선의 경우 육지로 인양하여 선가(船架)[배를 땅 위로 끌어올리거나 끌어올려서 싣는 데 쓰는 설비]에서 수리하지만 대형선의 대수리나 배의 밑바닥 수리를 위한 선거(船渠)[선박 건조, 개조, 수리 및 검사 등을 위하여 선박을 도크 안에 넣고, 물을 빼거나 넣어서 선박을 바닥에 앉히거나 띄울 수 있도록 만든 설비] 시설이 필요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부산 영도 소재의 ‘니시죠우(西條)철공소’가 유일하게 1,500톤급 선박의 입거 수리(入渠修理)가 가능한 선거를 보유한 곳이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대륙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정 및 군수 물자 수송선의 수리 공장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1937년 강선 전문의 본격적인 근대 조선소가 나타난 것은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조선중공업’이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강선 건조 전문 업체로 1950년대까지도 1,000톤급 이상의 대형 강선을 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소였다. 해방 후 ‘조선중공업’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형 강선 건조 시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까지 단 한 척의 강선도 건조하지 못한 채 주로 수리 위주로 공장을 운영하였고, 그나마 자금난 등으로 휴업을 반복하였다. 정부는 1950년 「대한조선공사법」을 발효하여 ‘조선중공업’을 국책 회사로서 의욕적으로 운영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950년대 말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와 임금 체불로 인한 노사 분규 등으로 인해 가장 부실한 국영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거듭하여 1950년 1월에 일제 치하의 ‘조선중공업’이 보유하고 있던 시설을 기반으로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였으며, 1955년에는 ICA 자금 200만 달러와 대출 자금 3억 6,800만 환으로 각종 시설[20톤 기중기 7대 등] 등을 확장해 근대화된 조선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근의 부품 상점도 성시를 이루었다. 대평동 ‘항남마린’의 경우 1965년도에 문을 열고 1976년도부터 현재의 자리에서 선박용 디젤 엔진 부품 공업 기기들을 납품해 온 상점이다. 가게 명칭도 1997년 항남디젤에서 항남마린으로 바뀌었다. 현재 선박 용품점이 전반적으로 분산되어 장사가 되지 않으며, 취급 물품은 처음에는 일제를 사용하다 국산화가 진척되어 요즘은 스페인, 가나, 필리핀 등지에 수출도 한다. 1972년 1만 8,000톤급 ‘판코리아호’를 건립하면서 조선 국가로서의 서막을 알린 한국의 조선업은 다른 분야에 못지않은 비약을 거듭하였다. 1960년대 초반까지도 4천여 톤에 불과했던 연간 조선 실적이 1984년에는 약 230만 톤으로 발전하여 이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제1위의 조선국이 되었다.
특히 STX조선 사무실 동네[이북 동네]의 경우도 많은 가구가 이사를 갔으며, 지금은 주민[부모]들이 많이 죽고 빈집이 많다. 이렇듯 대평동은 우리나라의 6·25 전쟁과 맞물린 역사의 아픔을 설명해 주는 가옥 형태가 남아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영도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조선소와 철공소들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자연히 주민들의 자랑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선박 수리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라는 자부심이었고, 지금도 많은 선박들이 수리를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1980년대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소련 배들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입항 허가를 받고 들어와 수리를 받고 떠나곤 하였다. 일반적으로 선박은 5월 전후로 수리를 하는데, 이때 고친 배를 가지고 일 년 동안 계속 운항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5월이면 항상 선박들이 배를 고치기 위해서 북새통을 이루곤 하였다. 특히 원양 어선처럼 먼 곳으로 바다를 나가는 배들은 이 기회에 최선을 다해 배를 고쳐 놔야 탈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였다. 선박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남항동에서 선박 수리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남항동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전국 어디를 가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은 그런 자부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간판도 없는 작은 슈퍼 앞에서 만난 한 노인과의 대화에도 그런 자부가 묻어난다. 80세가 넘었다는 그는 6·25 전쟁기 영도로 피난을 와서 정착한 사람으로 예전 조선소에서 근무하였다. ‘대양조선, 구일조선, 남양조선…….’ 등 그가 옮긴 조선소 이름이 모두 다나카 조선소에서 시작하여 이름만 바뀐 곳이며, 요즘 명함을 내미는 ‘에스엔케이라인’도 결국 그 갈래라 본다. 그들이 이렇게 내력을 꿰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였다. “여기서 배 수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좀 더 대우받고, 사회의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받은 대우와 자신들의 뒤를 잇는 후배들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만은 아닌 듯하다. 조선업은 실제로 영도의 정체성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조선소 수리 중에서도 수리를 위해 배가 들어오면 배에 들러붙은 녹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기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찾기 쉬운 일자리였다. 예전에는 요즘처럼 그라인더가 없었기 때문에 녹 부분을 직접 망치로 내려쳐서 없애는 수작업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였다. 무작정 도시로 나와 벌이를 하거나 6·25 전쟁으로 과수댁이 된 젊은 여성들로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마다하기 어려웠다. 영도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배와 관련된 일밖에 달리 일거리가 없었다. 특히 여성의 몸으로는 힘든 작업을 시켜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권이란 없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보통 남자라면 절대 응하지 않을 저임금에 중노동을 하는 이른바 ‘깡깡이 아지매’가 탄생하였다. 조선 수리업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 중반에는 영도에 배를 대는 독이 12개였다. 한 독마다 15명이 일했으니, 어림잡아 180여 명의 깡깡이 아지매가 영도에서 일을 했던 셈이다. 몇 년 가지는 못했지만 1965년 무렵에는 ‘깡깡이 아지매 조합’이란 것도 생겼다. 당시 조합 부위원장을 했던 이가 늦게까지 부산 구평의 ‘대평조선소’에서 반장으로 근무하던 서형자 할머니[75세]이다. 조합이 있을 때는 단체로 신체검사도 받고 직장이 보장을 받았으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데모도 하였다. 하지만 망치로 녹을 떨어내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굉장한 소음을 일으키게 되고, 이는 청각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깡깡이 아지매로 오랫동안 일해 온 여성들 중에는 대부분 청각을 잃었거나 난청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선박 수리소가 20여 군데 남아 있는 지금도 이 분들은 활동을 하고는 있으나 작업이 배당됐을 때만 직장에 나오고, 일이 끝나면 바로 귀가하기 때문에 사실상 직접 대면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이곳의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민원까지 넣고 있는 사정이라서 깡깡이 아지매가 “내가 그 일을 합니다.”라고 나서기는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