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95)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1장 하나를 다시 여섯으로 (8)
이윽고 장의(張儀)는 사신의 자격으로 초나라로 건너갔다.
아마도 이때의 초(楚)나라행이 장의의 일생 중 가장 극적인 부분이 아니었을까.
과연 초회왕(楚懷王)은 장의를 보자마자 옥에 가두었다.
장차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서 죽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장의(張儀) 또한 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심복 부하를 시켜 근상에게 뇌물을 바치고 세밀히 계책을 일러둔 뒤였다.
- 반드시 이러이러하게 해주시오.
근상(靳尙)은 친진파의 대표이기는 했지만, 간신의 기질도 농후한 사람이었다.
그가 친진파(親秦派)의 주역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애국심에서라기 보다는 장의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근상(靳尙)은 곧 내궁으로 들어가 초왕의 부인 정수에게 밀담을 신청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부인께서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으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부인께선 대책을 강구해 놓으셔야 합니다."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우리나라 옥에 진나라 재상인 장의(張儀)가 갇혀 있습니다. 왕께서는 장차 그를 죽이려 하십니다.
그런데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장의는 진왕이 무척 아끼는 신하입니다.
장의의 죽음을 수수방관(袖手傍觀)할 리 없겠지요."
"..........................?“
"신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진왕(秦王)은 지금 장의를 석방하기 위해
진나라 최고의 미인과 상용(上庸) 땅 여섯 고을을 우리 왕에게 바치려고 한답니다."
"우리 왕은 유독 땅을 좋아하시고, 여인을 사랑합니다.
왕께서는 틀림없이 땅과 미인을 받으신 후 장의(張儀)를 석방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부인께서는 진나라 여인에게 밀릴 것이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질투심이 강한 초왕의 부인 정수(鄭袖)는 그 말만 듣고도 안색이 핼쓱해졌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을까요? 대부께서는 부디 저를 위해 계책을 내주십시오.“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부인께서는 일단 이번 일을 모른체하시고 왕께 잘 말씀드려 장의(張儀)를 우리 쪽에서 먼저 석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秦)나라는 신의가 없는 나라이므로 장의(張儀)가 돌아오기만 하면 땅과 여자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오로지 부인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근상의 꼬드김을 받은 정수(鄭袖)는 그 날부터 밤낮으로 초회왕을 채근했다.
때로는 눈물로써, 때로는 협박으로써 장의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신하된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법입니다.
이번에 장의(張儀)가 죽을 줄을 알면서도 우리나라에 온 것은 진왕(秦王)에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장의(張儀)는 충신입니다. 그런데 왕께서 그런 충신을 죽인다면 진나라가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마도 모든 군대를 동원해 우리 초(楚)나라를 칠 것입니다.
신첩은 진(秦)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지금 강남으로 내려가 조용히 살고자 합니다."
초회왕(楚懷王)은 사랑하는 부인인 정수가 눈물을 찍으며 애원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렇다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는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장의(張儀)를 석방하면 진나라는 왕의 대범함에 감격하여 우리 초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첩이 왕을 영원히 모실 수 있는 길입니다.“
초회왕(楚懷王)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다음날이었다.
아침 일찍 근상(靳尙)이 조당으로 들어와 황급한 어조로 초회왕에게 아뢰었다.
"큰일났습니다. 진(秦)나라 군대가 대거 국경 근처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진혜문왕(秦惠文王)이 장수 위장(魏章)에게 군사를 내주어 한중으로 내려보냈던 것이다.
지난해 이미 두 차례에 걸쳐 크게 패한 바 있는 초회왕(楚懷王)은 그러한 보고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의 때문인가?“
"그런 듯 싶습니다.“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왕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장의(張儀)를 석방하는 것이 나을 줄 압니다.
장의를 죽이고 검중 땅을 내준들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차라리 장의를 석방하고 진(秦)나라와 화친을 맺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간밤에 정수로부터 장의의 석방 요청을 들은 초회왕(楚懷王)은 이미 마음이 흔들린 상태였다.
여기에 근상(靳尙)마저 가세하자 자신이 너무 격분해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초회왕(楚懷王)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명이 떨어졌다.
"알겠소. 지금 곧 장의를 석방하오!“
모든 것이 장의가 노린 대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오랫만에 햇빛을 본 장의는, 그러나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직후라 서둘러 초(楚)나라를 떠날 법도 하건만
그는 대범하게도 초회왕을 찾아가 오히려 연횡의 필요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펼친 것이었다.
사가(史家)들이 그들 단순히 유세가(遊說家)로만 보지 않는 것은 바로 장의의 이러한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리라.
이때 그가 펼친 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지난해 초(楚)나라는 진나라와 충돌하여 크게 패한 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나라들의 태도다.
일찍이 초나라는 열국과 합종 동맹을 맺었지만, 초나라가 우리 진(秦)나라에게 패하자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초(楚)나라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내어 초나라 영토를 침공하지 않았는가.
초나라를 맹주로 모시던 제ㆍ한ㆍ 위나라가 모두 그러했다.
이것이 바로 초나라가 신봉하는 합종(合縱)의 실체이다..............
이어 장의(張儀)는 외쳤다.
"왕께서는 그동안 소진에게 속아오셨습니다.
이제 천하의 사기꾼 소진도 죽었으니, 왕께서도 맑은 정신을 되찾으십시오.
초(楚)나라가 가까이 지내야 할 나라는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진(秦)나라입니다.
왕께 진실로 말하노니, 진나라와 형제의 의(義)를 맺어 종신토록 서로 정벌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것만이 진과 초나라가 다 같이 번영할 수 있는 길입니다."
초회왕에게 있어 장의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그는 장의(張儀)를 빈객의 예(禮)에 따라 접대하는 한편, 장의가 내민 진(秦)ㆍ초(楚) 우호 조약서에 서명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