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 26,1-9; 마태 13,54-58
+ 오소서, 성령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더러 당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백성들에게 전하라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여기서 ‘이 도성’은 예루살렘을, ‘이 집’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실로에 만남의 천막을 세우고 계약 궤를 모셨습니다. 이후 실로는 길갈, 세겜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성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기 이전에 이미 실로에 성전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필리스타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약 궤를 모시고 나갔는데, 그것을 보고 오히려 죽기 살기로 싸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하고 계약 궤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이때 필리스티아인들이 아마도 실로까지 쳐들어와 도시와 성전을 파괴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로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실로 가슴 아픈 단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더러 “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겠다.”라고 예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예레미야였다면, 백성들에게 이 문장은 빼고 전했을 것 같습니다. 생명에 위협이 될 만큼 민감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럴까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결국 예레미야가 하느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자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예레미야를 붙잡고 말합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야훼의 이름으로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되고, 예루살렘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고 맙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입니다. 이후 다시 지어진 두 번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두 번째 성전 역시 기원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됩니다.
예레미야가 성전 파괴를 예언한 후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성전 파괴를 예언하신 후 생명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처럼 여러 면에서 예수님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제까지 우리는 마태오 복음 13장에 나오는 일곱 개 혹은 여덟 개의 비유 말씀을 들었는데, 그 직전에 들었던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신 말씀(마태 12,46-50)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새로운 가족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자렛으로 돌아오시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뒤집는 반응을 보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이 사람들의 말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데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은 기원후 14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시대 이후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 사람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따라 분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이름 대신 ‘논산댁’, ‘부여댁’ 이렇게 출신 지명을 부르기도 했고, ‘최 씨네 둘째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원후 1세기 사람들이 오늘 복음처럼 생각한 것은, 당시로서 무척 상식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은 무서운 편견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달에 ‘편견’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가장 강력한 편견은 ‘일반적 편견’으로서, ‘상식 자체가 완전하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식을 신봉했기에, 상식을 뛰어넘는 진리는 끝내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실로처럼 파괴되리라는 예언은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같은 동네에 살던 청년이, 내가 잘 알고 있는 그 청년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몰상식이 상식을 뒤엎고, 거짓이 진실을 나무라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몰상식이 아니라 상식을 뛰어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이 지구가 실로처럼 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복음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마음과 귀를 주님께로 향해야겠습니다.
실로, 만남의 천막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출처: Shiloh (biblical city)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