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인(大夫人)을 모시다.
이 때 태후가 궁녀로부터 승상이 병을 청탁한 사유를 아시고 웃고 이르시길,
“내 진실로 의심하였느니라.”
하고 이에 승상을 불러 보실새, 두 공주가 또한 모시고 앉았거늘 태후사 하문하시되,
“승상이 이미 죽은 정녀와 더불어 끊어진 인연을 다시 이었다 하니 정녕인고?”
승상은 이에 엎드려 아뢰기를,
“은덕이 조화와 같이 한결같이 크시니 신이 분골쇄신(粉骨碎身) 할지라도 갚기 어려울 줄로 아뢰나이다.”
태후가 이르시기를,
“다만 희롱함이니 어찌 은덕이라 하리오?”
하시더라.
이날 천자께서 정전(正殿) 나시어 모든 신하들의 조회를 받으실새, 신하들이 아뢰기를,
“근자에 밝은 별이 높이 뜨며 단이슬이 내리고, 황하(黃河)의 물이 맑아 곡식이 풍성하고 새 진(鎭)의 절도사가 땅을 들어 조회하며 토번이 항복하였으니, 이는 다 성덕으로 이룬 바로 아뢰오.”
상이 겸양하시며 공을 모든 신하들께 돌리시므로, 모든 신하가 한가지로 아뢰기를,
“양소유가 근일 궁중에 오래 머물러 있음으로써 정부의 공사(公事)가 많이 지체되온 줄로 아뢰오.”
상이 크게 웃고 이르시기를,
“태후께서 연일 불러보시는 고로 승상이 감히 나오지 못함이니, 짐히 친히 효유하여 공사를 보게 하리라.”
하시더니, 이튿날 양상서가 정부에 나아가 공사를 처리하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그 모친을 모셔오라 하더라. 그 상소문에 쓰였으되,
승상 위국공 부마도위(駙馬都尉)신 양소유는 돈수백배 하옵고 황상폐하께 삼가 아뢰옵나이다. 신은 본디 초당의 미천한 백성이오라, 노모를 공궤(供饋)함에 넉넉지 못하므로 두초 같은 적은 재주로 외람이 국록(國祿)으로써 노모를 봉양코저 하여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향공(鄕貢 )을 입사와, 과거에 뽑히고 조정에 들어선지 수년에 조서를 받들어 강적을 치매 정도는 무릎을 굽히옵고, 또 명을 받자와 서로 치매 흉한 토번(吐番)이 꼼짝 못하고 나아와 항복하오니 어찌 이를 신의 한계책이라 하리이까? 이는 다 황상폐하의 위덕(威德)이 미친 바요, 모든 장수가 죽기로써 싸웠음인데, 폐하께옵서는 도리어 이제 적은 수고를 권장하시고 중한 벼슬로써 포양(褒揚)하옵시니 신의 마음에 그지없이 죄송하오이다. 또 부마 간택에 하교가 간절하옵고 천은이 깊사와 신의 미천함으로 능히 도망치지 못하여 받들어 따랐사오나 이 또한 황송하나이다. 노모가 신에게 바라던 바도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지나지 아니하옵다가, 이제 신이 장상(將相)의 자리에 있사옵고 공후(公侯)의 작(爵)에 있사와 국사에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려 하기로, 노모를 데려 올 겨를을 내지 못하오니, 거처와 음식이 신의 노모와는 판이 하온지라 이는 부귀로써 몸을 처하고 빈천(貧賤)으로써 어미를 대접하옴이니 자식의 도리에서 크게 벗어남이 아니겠나이까? 하물며 신의 어미 나이 높고 신병이 무거우나 다른 자녀가 없사와 가히 구호치 못하옵고, 산천이 아득하여 소식이 또한 자주 통치 못하니 노모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는데, 이제 국가의 무사함으로 관부(官府)가 한가하오니 엎드려 비옵건데 폐하께서는 신의 다급한 형편을 살피시어 신의 봉양(奉養)코자 하는 소원을 돌아보시와 각별히 두어 달 겨를을 허락하시오면, 그 사이에 돌아가 선영(先塋)에 성묘하고 노모를 데려와 모자가 함께 성덕을 기리며 그로써 반포(反哺:까마귀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효도)의 정성을 다하게 하옵시면, 신은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천은을 갚으오리니, 성상(聖上)은 이를 딱하게 여기시와 윤허하옵소서.>
상이 상소문을 다 보시고 탄식하시되,
“효재(孝哉)라 소유여!”
하시고, 특별히 황금 이천 근(斤)과 비단 팔백 필을 하사하여 그 노모를 헌수케 하고 또 노모를 만나 속히 데리고 오라 하교하시매, 승상이 대궐로 들어가 사은하고 태ㅔ후께 하직하니 태후 또한 금과 비단을 내리시므로 승상이 사은하고, 두 공주와 진숙인 가유인과 더불어 작별하니라.
서울을 떠나서 천진교에 다달으니 계섬월(桂蟾月), 적경홍(狄驚鴻) 두 기생이 부윤의 기별을 받고 이미 객관에 와 등대하였기에 승상이 웃으며 두 기생에게 이르기를,
“이번 길은 사사로운 길이요, 군명이 아니거늘, 그대들이 어찌 내가 오는 줄을 알았느뇨?”
경홍과 섬월이 대답하되,
“승상 위국공 부마도위의 행차를 깊은 산 험한 골짜기에서도 다들 알고 떠들썩하게 들여오는지라, 첩들이 비록 두메에 사오나 어찌 귀와 눈이 없사오리까? 하물며 부윤이 첩들을 대법하기를 상공의 다음으로 치시어 첩들의 생색이 만 길이나 높아졌사온데, 어찌 기별하지 않으오리까? 이제 상공의 지위가 더 높고 공명이 더 크시니 첩들의 영광이 또한 백 배나 하나이다. 듣자오니 상공께서 두 공주의 부마가 되셨다 하옵는데 두 분 공주가 능히 용납하실는지 알고자 하나이다.”
승상이 대답하기를,
“공주의 한 분은 황상폐하의 매씨요, 또 한분은 정사도의 딸로써 황태후의 양녀이니 이는 곧 계량이 천거한 바 인데 정씨가 어찌 계량의 천거한 은혜를 잊어버리리요? 또한 공주와 더불어 사람을 사랑하고 물건을 용납하는 덕행이 있은즉 어찌 두 낭자의 복이라 아니하리오?”
경홍과 섬월이 서로 돌아보며 하례하더라.
승상이 두 사람과 더불어 밤을 지내고 다시 길을 떠나 고향에 다달으니, 지난 날 십오 세 서생으로 모친 슬하를 하직하고 멀리 갔다가 이제야 돌아와 근친(覲親)하매, 승상의 가마를 타고 위국공의 장복을 입고 아울러 부마의 귀함을 겸하니, 사 년동안 성취함이 과연 굉장하더라.
들어가 모부인께 뵈온즉, 모부인이 아들의 손을 잡고 그 등을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네가 참말로 우리 아들 소유뇨? 내가 아무래도 믿지 못하겠도다. 전일에 육갑(六甲)을 외우며 글자 모으기를 할 적에 어찌 오늘의 영광이 있을 줄을 뜻하였겠느뇨?”
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소유가 공명을 이룬 일과 장가들고 첩들을 가려 잡게 된 사연을 자세히 아뢴즉, 모부인이 말하기를,
“너의부친이 매양 너 더러 우리집을 빛나게 할 자라고 하셨는데, 이제 너희 부친과 영화를 누리지 못함이 한이로다.”
하시더라.
승상이 선산에 치제하여 영화와 부귀를 누리게 됨을 아뢰고, 천자가 내리신 금과 비단으로 대부인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오래 삶을 기리며 일가 친척과 친구들을 청하여 열흘 동안이나 손님치례를 하고서 대부인을 모시고 길을 떠나니, 연도의 백성들과 여러 고을 수령들이 분주하게 호행하여 광채가 한길에 빛나더라.
승상이 낙양을 지날새 본 고을에 분부하여 경홍과 섬월을 부르라 하였더니, 돌아와 아뢰기를,
“두 낭자가 이미 동행하여 서울로 떠난 지 여러 날이 되었소이다.”
승상이 길이 어긋남을 섭섭히 여기고 황성에 이르러 대부인을 승상부로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 황상을 뵈오니, 양궁에서 불러 보시고 금 은과 채단 열 수례를 나누어 하사하시니 이로써 대부인께 헌수(獻壽)하고, 만조 백관을 청하여 삼일 잔치를 크게 열더라.
승상은 다시 날을 가려잡아 대부인을 모시고 황상게서 내리신 새집으로 옮겨 드니 누각과 정자, 동산과 연못이 장대하더라.
영양공주와 난양공주가 신부례(新婦禮)를 행하고, 진숙인과 가유인이 역시 예를 갖추어 뵈오니 대부인은 화기가 흐뭇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기꺼워하더라.
승상은 이미 대부인의 잔수를 기리라 하는 명을 받은 고로, 위에서 내린 물건으로써 다시 삼 일간 대연을 베풀매 양궁에서 궐내의 악공들을 내보내시며 상에서 잡수시는 음식을 내리시고, 조정의 고관들이 모두 모인지라, 소유가 채색옷을 입고 두 공주와 더불어 옥잔을 높이 들어 차례로 대부인께 올려 장수함을 기리며 매우 즐겁게 노닐새, 잔치가 아직 파하지 아니하였는데 문지기가 들어와 아뢰기를,
“문 밖에 두 여자가 와서 대부인과 승상께 명첩(名帖)을 드리나이다.”
하기에 받아보니 섬월과 경홍이니라. 이에 대부인께 이 뜻을 사뢰고 곧 불러 들이매, 두 기생이 섬돌아래에서 벌하고 뵈오니, 모든 손님이 한가지로 칭찬하기를,
“낙양땅 계섬월과 하북땅 적경홍이 이름난 지가 오래되거니와 과연 절세의 미인이로다. 양승상의 풍류가 아니면 어찌 능히 여기 오게 할 수 있으리오?” 하더라.
승상이 두 기생에게 명하여 그 가진 바 재주를 보이게 하매, 경홍과 섬월이 동시에 일어나 구슬신을 끌고 구슬 자리에 올라 가벼운 소매를 날리며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에 맞추어 춤을 추니, 떨어지는 꽃과 나부끼는 가지는 봄바람에 떠다니고 구름 그림자와 눈비는 비단 장막에 비치니, 한궁(漢宮)의 조비연(趙飛燕:한나라 성제의 첩)이 다시 부마궁에 나타났고, 금곡(金谷)의녹주(錄珠:석종의 애첩)가 다시 위국공의 당사에 섰기에, 대부인과 두 공주가 능라와 금수(錦繡)로 두 기녀에게 상금을 내리고, 진숙인은 본디 섬월과 더불어 아는 고로 옛일을 말하며 쌓였던 회포를 풀새, 영양공주가 몸소 술잔을 잡아 따로이 계랑한테 권하여 천거하여 준 은혜를 갚는지라, 우부인(丞相母)이 승상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섬월에게는 사례하면서 내 외사촌은 잊었느냐?”
승상이 이에 대답하되,
“소자의 즐거움이 몯 두련사의 덕이요, 또한 모친께서 말씀이 없을지라도 진실로 만들어 청코자 하나이다.” 하고,
즉시 사람을 자청관으로 보내니 모든 여관이 말하기를,
“두련사께서는 촉 땅으로 가신 지 삼 년이라.” 하는지라, 유부인이 매우 섭섭히 여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