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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 희생(1986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천국보다 낯선 영화 세계로의 초대
다양한 영화들이 있기에 감상하는 방법도 다양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롯된 고전주의적 가치들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우리는 편협하고 고정된 영화 감상의 기준과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그것들을 더 강화시켜 놓았습니다. 개연성과 인과관계에 입각한 빠른 이야기 전개, 관객이 현실을 잊고 화면 위의 환상에 몰두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서사 전략은 할리우드가 그 시학으로부터 계승한 것입니다.
영화 매체는 새로운 영화 형식을 꾸준히 모색해왔습니다. 우연의 요소와 비논리적 전개 방식의 고의적인 채택,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미묘한 움직임 그 자체에 대한 탐구, 꿈과 환상과 현실을 뒤섞으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이야기 전개, 관객이 환상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비평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게 하려는 장치들의 활용 등 새로운 미학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영화들이 탄생하여 왔습니다. 새롭고 다양한 영화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기준과 틀을 보다 유연하게 확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신고전주의 회화의 걸작인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감상하는 기준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한다면 과연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보다 유연한 감상의 틀을 가지고 감상한다면 <희생>은 경이로운 미학적 체험을 안겨줄 것입니다. 감독은 시간과 공간을 조각하여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거대한 조각상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각 장면들은 단지 이야기 전개를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갖고 그 조각상 속의 독립된 조각상이 됩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로댕의 거대한 조각 작품 <지옥의 문>을 감상할 때 우리는 우선 멀리서 직관적으로 감상합니다. 그 후 가까이 다가서서 그 안에 자체의 존재 이유를 갖고 존재하는 부분적인 조각상들, 즉, <생각하는 사람>이나 <웅크린 여인>이나 <아담>이나 <이브>의 존재 이유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직관적이고 전체적인 인상과 부분적인 해석들을 종합하면서 우리는 이 작품에 대한 예술적 체험을 완성합니다.
<희생>에서, 아버지 알렉산더와 함께 바닷가에 이미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었던 어린 아들 고센. 3년 동안 매일같이 물을 주어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어나게 했다는 한 수도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나무 아래에서 고센은 질문을 던집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그게 무슨 뜻이죠?” 영화 안에서 제시되었던 문제들을 마지막 장면에서 완벽하게 해결하려는 대부분의 할리우드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이렇게 질문으로 끝납니다. 관객들을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만들려는 것이 이 영화가 추구하는 미학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칼럼]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2016년 감독_켄 로치)
‘자존심’을 지켜주지 않으면
모든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그 마음의 무게는 누구나 같은데도 세상은 이따금 이를 무시하려 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난하고, 늙고, 병든 사람들의 자존심을 가볍고 하찮게 여깁니다.
도움, 자선, 나눔, 구제, 참 좋은 것이지요.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아름답고, 따뜻한 실천입니다. 그 실천이 개인이 아닌 사회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물질적 도움이 최소한의 삶과 인간다움을 바라는 사람들을 구차하게 만들고, 자존심을 잃게 만든다면 사랑과 복지가 아니라 차별과 상처가 아닐까요.
영화 속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는 이 질문에 “예”라고 말합니다. 심장병으로 40년 동안 해오던 목수 일을 중단하고,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수치심뿐이었으니까요. 정부가 고용한 파견업체 의료 전문가와 심사관의 무성의한 태도, 문의 전화 한 통을 위해 무려 1시간 48분을 기다리게 한 ARS, 복잡한 행정절차, 조금의 융통성도 배려도 없이 ‘연필 시대의 사람’에게 인터넷을 강요하는 세상 앞에서 그는 좌절합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 분)는 어떻고요. 2년 동안의 노숙자 쉼터 생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버스를 잘못 타 심사에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생활보조금 지급 제재 대상 명단에 올라갈 위기에 처합니다. 항의해 보지만 “정시 출석은 의무사항”, “원칙이 우선”이라는 냉랭한 말만 듣습니다. 영국만 이럴까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떠들며 온갖 복지와 사회보장을 만들어 놓으면 뭐 합니까. 시혜자로 착각하는 오만한 공무원들과 편의주의 시스템이란 높은 벽이 사람들을 힘들고 구차하게 만든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니엘도 “사람은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고 말하면서 돌아섭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진정한 나눔과 구제는 다수결도, 선택도, 숫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알량한 돈 몇 푼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주어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전기가 끊겨 추위에 떠는 케이티 가족을 위해 돈을 몰래 놓고 나옵니다. 자신의 목공 기술로 집을 고쳐줍니다. 너무 배가 고파 식료품 지원소에서 통조림을 허겁지겁 먹고는 눈물을 쏟아내는 케이티에게 “자네 잘못 아니야. 부끄러워할 것 없어”라고 말해줍니다.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돕고 애틋하게 감싸주면서도 오히려 상대를 존중하는 그는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가 지금 우리를 성찰할 기회를 줍니다. 우리 모두 다니엘 블레이크가 될 수도 있고, 누구도 다니엘 블레이크가 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칼럼] ‘파티마의 기적(Fatima)’ (2020년 감독 마코 폰테코보)
‘믿음’이 곧 기적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기적’을 바랍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이 마치 꿈처럼 이루어져 내 삶을, 아니면 세상을 바꿔주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간절하지요. 그러나 희망과 행운만으로 기적은 결코 우리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기적은 신이 아닌 사람이 만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는 일들도 결국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인간의 무엇으로 그것을 만들까요. 대단한 초능력이 아닙니다. 영화 <파티마의 기적>은 ‘진실한 마음’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알고 있는, 교황청도 공식 인정한 104년 전(1917년)의 이야기입니다.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사는 열살 소녀 루치아(스테파니 길 분)와 그의 사촌인 여덟 살 소년 프란치스코, 일곱 살 소녀 히야친타가 들판에서 양치기를 하다가 성모님을 만나지요.
누구도 아이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왜 너한테 (성모님이) 오시겠니”라고 말하고, 마을의 신부는 ‘악마의 짓’이라고 합니다. 당국은 전시(1차 대전) 상황에서 사람들이 동요할까, 교단은 종교 탄압의 빌미가 될까 두려워 아이들에게 “거짓말이다”라고 말하라는 거짓말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세 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성모님의 모습과 목소리를 끝까지 믿습니다. “6개월 동안 매일 묵주기도를 하라”는 약속과 세상의 평화와 전쟁 종식을 위해 찾아왔다는 비밀을 지킵니다. 그 믿음과 기도는 7만 군중이 목격한 ‘태양의 기적’을 낳고, 성모님의 약속대로 더 이상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는 평화를 가져옵니다.
세 아이에게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훗날 노년의 루치아 수녀는 그날의 성모 발현에 회의적인 니콜스 교수(하비 케이틀 분)에게 “이해의 끝에서 믿음이 시작된다”라고 말합니다. “거기에서는 (믿음이 아닌) 진실을 향한 과학적 탐구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반박하는 교수에게 루치아 수녀는 “믿음이 진실탐구가 아니면 뭐죠”라고 되묻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믿음이 니콜스 교수처럼 ‘불가해한, 비이성적인 희망을 낳는 진실’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도 인정했듯이 불가해한 일이라고 모두 초월적인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영화에서 두 다리를 전혀 못 쓰는 소년을 걷게 만든 것은 성모님이 아닙니다. “나를 믿기 시작하면 치유될 것”이라고 말한 성모님을 믿은 소년 자신이었습니다. 혈루병을 앓는 여자를 구원한 것은 믿음이었고, 눈먼 두 사람 역시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 믿음대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마태 9).
평양교구장서리이신 염수정 추기경님께서 북한교회를 티 없으신 성심의 파티마 성모님께 봉헌해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파티마의 기적>은 이렇게 믿음이 곧 기적이며, 아인슈타인이 말한 인생을 사는 두 가지 방법 중에서 “기적이 없다는 듯 살지 말고, 모든 것이 기적인 듯 살아가라”라고 말해줍니다.
[영화 칼럼] ‘언플랜드(Unplanned)’(2019년, 감독 척 콘젤만 · 캐리 솔로몬)
이것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주님은 ‘말씀’으로 오십니다. 말씀 가운데에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을 일깨우십니다. 그 말씀을 가벼이 여기거나, 외면하거나, 잊고 있거나, 거스를 때 눈앞에 진실을 보이시고는 “이래도 모르겠느냐”고 호통을 치십니다. 그렇게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고서야 비로소 어리석은 인간은 깨닫게 됩니다.
미국 최대 낙태 클리닉인 가족계획연맹의 상담사로 일한 애비 존슨(애슐리 브래처 분)도 그랬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낙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기에 처한 여성을 돕는’ 것이고, ‘나의 정체성’이라는 신념으로 더욱 그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자신이 두 번의 낙태로 엄청난 고통과 분노, 자책과 죄의식을 경험했음에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면서 임신부 2만여 명을 수술실로 들어가도록 설득했습니
다. 그 공로로 최연소 클리닉 소장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주님은 호된 충격을 주십니다. 처음으로 들어간 수술실에서 초음파 화면에 잡힌 머리와 팔다리가 또렷한 13주 태아가 살기 위해 수술 흡입관을 피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지만 결국 빨려 들어가 핏덩이로 나오는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녀는 오열합니다. 지금껏 그녀가 우겨왔던 ‘아직 고통도 못 느끼는 세포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 ‘아주 작지만 완벽한 아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자부심은 수치심, 믿음은 배신, 일터는 감옥, 일은 죄가 되었습니다. 사실 주님은 그녀가 그 일을 시작할 때부터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넌 수정된 순간부터 우리 딸이었어.”(어머니), “도덕성에 대한 기준이 과학발전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야?”(남편), “우리가 자궁 안의 고요함 속에 있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창조하고 계십니다.”(목사)
단지 듣지 못했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의 감옥, 양심의 감옥에 갇혀 있다 탈출하면서 그녀는 죄의 무게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 눈물과 참회로 용서를 구했고, 태어나지 못한 자신의 두 아이를 비롯해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수많은 태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언플랜드>는 애비의 실제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소 과장과 윤색은 있겠지만, 영화의 모습들은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시작하면서 애비가 말했듯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이고, 모습입니다. 더구나 낙태를 폭넓게 허용하려는 우리의 현실과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까요.
<언플랜드>는 인간이 만든 법으로 낙태가 죄냐, 아니냐를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태아는 소중한 생명이고 주님의 섭리(시편 139)이며, 어떤 이유로든 그것을 함부로 팽개치는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법이 인간의 법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영화 칼럼] ‘미나리’ - 2020년 감독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가족사랑’의 언어는 마음입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습니다. 미국이라고 특별하고,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기름지고 드넓고 풍요로운 곳에서도 누군가는 하루하루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가난과 절망에 눈물을 흘립니다. 삶은 풍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안고 찾아옵니다.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낯설다’를 넘어 ‘다르다’, ‘이상하다’라는 경계와 차별을 품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도, 식물도, 동물도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미나리>에서 남자 주인공 제이콥(스티븐 연 분)이 “최고의 진흙”이라고 감탄한 미국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한 땅인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한 가나안도 그랬습니다. 낯설고 다르고 이상한 것은 사람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주목한 <미나리>는 40년 전, 미국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고 했던 한국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아내,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의 외딴곳으로 이사온 제이콥의 꿈은 농장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작은 농장에 처음 심은 한국 채소가 가뭄과 태풍과 장마로 마르고, 쓰러지고, 썩듯이 좀처럼 싹트지 못합니다.
아내의 말대로 가망 없는 시작은 포기하고 도시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속되는 실패와 시련, 아내 모니카(한예리 분)의 불만, 심장병이 있는 아들 데이비드(앨런 킴 분)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팁니다. 뭔가 해낼 수 있다는 것,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 희망을 지켜준 것은 가족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온 외할머니(윤여정 분)가 그 씨앗을 가져오지요. 손자 데이비드에게는 쿠키도 못 만들고, 욕도 하고 냄새나는, 아무리 봐도 할머니 같지 않은 가장 한국적인 할머니의 사랑과 믿음. 그것이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족을 따뜻하면서도 애달프고, 간절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연결합니다.
영화는 그쯤에서 그들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고 내일을 지켜보기로 합니다. 이제 그들은 할머니가 “원더풀”이라고 외친 ‘어디서든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 건강하게 해주는, 찌개와 국에도 넣어 먹고 약도 되는’ 미나리니까요. 이름이 말해주듯 어디에 살든 하느님의 자식들이니까요.
<미나리>는 한국인들에게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가족 이야기입니다. 먼 개척시대부터 지금까지 보이지 않게 역사를 만든 사람들에게 아직도 차별의 벽을 허물지 못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충고와 성찰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과거이며 현재이고, 한국 영화면서 미국 영화인 이유입니다.
물론 미국에서 만들었으니 규정으로는 미국 영화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미국 영화인데 한국어를 더 많이 한다는 것이 무슨 얘깃거리인가요. 가족과 이웃 사랑의 언어는 마음이고, 그 언어가 세상 어디에서든 같은데 말입니다.
[영화 칼럼] 더 파더 - 2020년 감독 플로리안 젤러
기억하게 하소서!
“그럼 나는 도대체 누구지?”
안소니는 이렇게 말하며 흐느낍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동안 수없이 쓰고 불렀던, 팔십 평생 삶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안소니’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봅니다. “이름 좋네.”
치매는 그의 현재와 과거의 시간들을 조금씩 앗아갑니다. 그에 따라 시간 위에 새겨진 기억들도 하나둘 잃어갑니다. 그 느낌을 안소니는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작은 아기 잎사귀 하나만 남아서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가 보러오면 좋을 텐데, 엄마가 보고 싶어.”
기억은 한 인간의 실존이며, 역사입니다. 철학자 존 페리는 기억은 곧 영혼(불멸성)이고, ‘나’를 ‘나’이게 하는 것(동일성)이라고 했습니다. 치매는 그것을 허물어 버립니다.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소중한 관계들을 지워버리고, 쌓아온 시간들을 증발시킵니다. 그 무참함에 저항이라도 하듯 안소니는 유난히 자신의 손목시계에 집착하지만, 그것으로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남는 ‘영생’이 아니라, 육신은 살아있지만 영혼이 사라져가는 소멸.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외롭고, 힘들고, 혼란스럽고, 슬픈지를 애잔하고, 날카롭고, 가슴 아프게 드러낸 영화 <더 파더>는 결코 별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85세가 넘으면 3명 중 1명, 65세만 넘어도 10명 중 1명은 안소니처럼 살고 있거나, 살아야 하는 고령화 사회에서 그는 지금의 ‘나’ 또는 ‘나의 아버지’, 멀지 않은 미래의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치매를 앓는 사람의 모습과 행동을.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가족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과 안타까움을 안겨주는지도.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정작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의 절망과 불안, 외로움과 슬픔을. 설령 자신이 당사자라고 해도 치매는 그것들을 ‘기억’하고 이야기해 줄 수 없게 만드니까요.
올해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사상 최고령(84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노배우 안소니 홉킨스는 스스로 그 주인공(치매 환자)이 되어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이상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내 집에 낯선 남자가 주인처럼 행세합니다. 딸 앤(올리비아 콜먼 분)의 행동도 의심스럽습니다. 앤의 여동생 루시의 그림이 벽에 걸려있었는데 없어지고, 루시를 닮은 젊은 간병인 대신 다른 여자가 나타납니다. 가구가 자꾸 없어지는가 하면, 집안 모습도 바뀝니다.
그도 아주 잠깐씩 기억이 돌아오지만, 그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착각과 환상에 빠져들고 몇 주 전부터 자신이 요양원에 와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내가 여기 왜 있지?”하고 딸을 찾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싫고 무서워 스스로 기억을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병원 복도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안소니의 막막한 표정, 돌아오는 차 안에서의 텅 빈 눈, 아버지를 요양원에 맡기고 나오는 앤의 젖은 눈빛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 살아있는 동안 제가 ‘저’를 기억하게 하소서!
[영화 칼럼] 노매드랜드 - 2020년 감독 클로이 자오
내 쉴 곳은 어디인가?
집이란 무엇일까요? 독일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차흐 대수도원의 사제 자카리아스 하이에스는 『내 안의 휴식처』(바오로딸 펴냄)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매우 정서적”이라고 했습니다. 집은 누구에게나 가족, 추억, 감정, 냄새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집은 하우스(house)가 아닌 홈(home)입니다. 크기와 위치와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몸과 영혼이 편히 쉬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 그 정서와 역할이 없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한 집도 단순한 구조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캠핑카에서 생활하는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자신은 ‘홈리스’가 아닌 ‘하우스리스’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가족과의 추억과 가족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심어놓은 좁고 낡은 밴이 ‘내 집’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기 집에서 같이 살자는 이웃과 여동생, 친구의 제안을 모두 거절합니다. 차라리 새 차를 사는 게 낫다는 조언을 무시하고 거금을 주고 고장 난 밴을 고칩니다.
올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노매드랜드>는 집을 잃거나 버리고, 대신 캠핑카를 타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펀과 그의 친구가 된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라탄 분)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영화는 그들의 삶과 상처, 꿈과 위안에 대한 고백과 석고 공장이 폐쇄되면서 우편번호까지 없어진 마을을 떠나 유랑 생활을 시작한 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어라 일하다 벌판으로 쫓겨난 가축”에 비유합니다. 그들에게 지난 삶은 “돈의 멍에에 속박되어 인생을 망친 시간들”입니다. 황량한 벌판과 길 위에서의 유랑 생활은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인생의 발견입니다. 가족의 죽음, 질병, 가난 등 저마다의 사연으로 혼자가 된 그들은 광활한 자연과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교감에서 치유와 안식을 찾습니다. 남편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상처와 기억으로 아파하는 펀 역시 그들과 동화하면서 성찰과 치유와 관조의 길을 찾게 되지요.
그 선택이 결코 낭만적이거나 여유롭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가축을 몰고 푸르고 광활한 초원을 떠돌아다니던 저 옛날의 유목민이 아닙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정착의 꿈을 안고 거친 들판으로 나아가던 카우보이도 아닙니다. 자연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으며, 늘 불안한 노동과 고독한 시간 앞에 놓여있는 21세기 유목민의 삶은 불편하고 불안하며, 고단하고 애잔합니다.
펀과 달리 우리는 그들과 쉽게 동화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거주와 노동과 생활은 한곳에 머물러야 ‘안정적’이라는 관념, 영화가 의식적으로 외면한 그들을 길로 내몰아버린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선택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2008년 금융 위기와 실업, 주택 투자 버블의 붕괴, 빈부격차가 스며들어 있으니까요.
이런 현실에서, ‘영끌’이라도 해서 내 집을 가져야 더 가난해지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노매드랜드>는 집착보다는 버림과 비움과 지움으로 자연과 자유와 내 삶으로 회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정 ‘내 쉴 곳(집)은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영화 칼럼]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 2017년 감독 리테쉬 바트라
그래, 함께 해요
영화는 불쑥 이렇게 시작합니다. 5월의 어느 날 저녁, 미국 콜로라도의 작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이웃해 살았지만 특별한 교류가 없는 이웃집 여자 에디(제인 폰다 분)가 찾아와서는 “가끔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잘래요.”라고 제안합니다.
루이스(로버트 레드포드 분)는 당황합니다. 뜬금없고 황당한데다, 아무리 70대 노인이지만 남녀가 ‘한집에 같이 잔다.’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지요. 그러나 에디가 바라는 것은 결혼도, 육체관계도 아닙니다. 외로운 밤을 견뎌내기 위해 누군가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고 싶은 것입니다.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둘은 오래전에 각자 아내와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대충 저녁 식사를 하고, 신문의 낱말 퍼즐을 풀고, TV에서 일기예보나 보면서, 이따금 멀리 사는 아들이나 딸의 전화를 받고 잠자리에 들어 뒤척이곤 했습니다.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에디가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데도 루이스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제안대로 <밤에 우리 영혼은>에서 루이스는 에디의 침대에 함께 누워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잠을 자고는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 갖지 않기로 합니다. 너무 오래, 아니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노년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그들의 용기와 도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결코 별난 격정이나 도발이 아닙니다. 그 나이에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스스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알고 봤더니 자신이 온통 말라죽은 것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각자가 쌓은 것들, 자기만의 삶과 연결된 것들은 좋든 싫든 그대로 두면서 ‘거짓’ 없는 대화를 통해 다름과 같음을 확인하고, 과장된 연민이나 공감 없이 위로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둘의 영혼은 따스한 위안과 평화, 기쁨으로 채워지고 윤기를 되찾습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에디와 루이스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안고 품고 있습니다. 에디에게는 교통사고로 딸을 잃으면서 아들, 남편과 단절되는 절망이 있었고, 루이스에게는 한때의 외도로 아내와 딸에게 갖게 된 죄책감과 꿈을 포기한 회한이 있습니다. 그 상처들을 나지막이 주고받는 그들은 아픈 티를 내지 않는데 정작 옆에서 그것을 보고 듣는 우리의 가슴이 아픕니다.
에디와 루이스는 물론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편견과 장애물로 둘의 도전이 오래 지속될 수 없으리란 사실을. 딸과 아들의 노골적인 반감과 몰이해, 아들의 가정과 어린 손자를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상황 앞에서 여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하는 곳이 아닌, 누군가와 진심으로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새로운 관계와 시간이 내 것이 되지 못하는 순간, ‘밤에 그들의 영혼’은 다시 쓸쓸해진다는 사실을. 해마다 늘어나는 독거노인과 노인자살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늙고, 혼자일수록 영혼은 더 방황하며,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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