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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의 시학
----장정순의 {그믐밤을 이기다}의 시세계
반경환
우리는 흔히들 동물과 식물이 다르고, 곤충과 벌레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과 불도 다르고, 공기와 흙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돌과 나무도 다르고, 인간과 기생충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 다름은 상호간에 아무런 상관성도 없다는 다름이지만, 그러나 이 다름은 종種과 속屬을 구분하는 다름일 뿐, 모두가 다같이 생물학적이나 화학적으로는 한 가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세상의 근본물질은 원자이고, 이 원자와 원자의 결합에 의하여 다양한 동물과 식물들, 또는 유기물과 무기물이 생겨나게 된다. 처음과 시작도 같고, 동양과 서양도 같다. 남극과 북극도 같고, 낮과 밤도 같다. 적과 동지도 짝을 이루고, 선과 악도 짝을 이룬다. 음과 양도 짝을 이루고, 진리와 허위도 짝을 이룬다. 우주도 둥글고, 지구도 둥글다. 동쪽으로 가면 동쪽만 나오고, 서쪽으로 가면 서쪽만 나온다. 중심과 주변도 없고, 영원한 삶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꽃피어 난다.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로 가고 있는가? 흙(원자)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들의 육체를 이루고 있던 수많은 물질들은 원자들로 분해되어 다양한 생명체들의 토대가 되고, 우리들이 죽어감으로써 새로운 후손들이 살아가게 된다. 이 자연의 이치를 따져보면 어느 누가 좀 더 오래 살거나 좀 더 일찍 죽는다는 것 역시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수십억 년, 또는 수십만 년의 자연의 역사를 따져보면 어느 누가 좀 더 오래 살거나 좀 더 일찍 죽는다는 것은 아무런 차이도 없고, 어느 누가 부귀영화를 누렸던가, 아닌가 역시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연, 혹은 천지창조주의 입장에서는 종의 보존과 균형에만 관심이 있지, 어느 특정한 개체의 행복과 불행에는 관심조차도 없다고 한다.
장정순 시인은 2016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했고, 첫 번째 시집 {드디어 맑음}(2020년, 시문학사)을 출간한 바가 있다.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과 ‘백운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시문학문인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비평가협회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장정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그믐밤을 이기다}는 ‘곡선의 시학’의 성과이며, 자유와 평등과 사랑의 전도사로서의 그의 ‘인문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가 있다.
매듭을 풀어
부드러움이라고 쓰게 하소서
매듭을 풀어
곡선이라고 쓰게 하소서
이 세상의 유일한 생명이
차가워지기 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설레면서 내일을 꿈꾸는 저녁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나직이 숫자를 지우면서 음미합니다
창가의 불빛을 조용히 놓아 줍니다
모든 것을 끌어안고 회전 시계를 돌려
길고도 먼 선을 연결합니다
매듭을 풀면
부드럽습니다
곡선입니다
사소한 갈등도 스르르 녹아듭니다
----[곡선] 전문
매듭이란 무엇이고, 곡선이란 무엇인가? 매듭이란 ‘어떤 일과 일 사이의 마무리를 짓는 것’, ‘ 어떤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나 어려운 고비’, ‘실이나 끈 따위를 묶어 맺은 자리’ 등을 지시하지만, 장정순 시인의 [곡선]에서는 어떤 원한이나 해결되지 않은 난제를 뜻한다. “매듭을 풀어/ 부드러움이라고 쓰게 하소서/ 매듭을 풀어/ 곡선이라고 쓰게 하소서”라는 시구에서는 ‘매듭’이 반생명적이며 반사회적인 암적 종양임을 뜻하게 되고, 따라서 “이 세상의 유일한 생명이/ 차가워지기 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화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하게 된다. 나직이 숫자를 지우면서 음미해 보면 “내일을 꿈꾸는 저녁은/ 요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끌어안고 회전 시계를 돌려” “매듭을 풀면” 모든 것이 부드러운 곡선이 되고, “사소한 갈등”도 다 녹아버리게 된다.
곡선의 삶은 그믐밤을 이기는 삶이고, 직선의 삶은 매듭, 즉, 그믐밤을 만드는 삶이다. 곡선의 삶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이고, 직선의 삶은 적과 동지, 선과 악, 음과 양, 진리와 허위 등을 따지고 싸우는 삶이다. 곡선의 삶은 자비와 친절, 또는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옹호하는 삶이고, 직선의 삶은 타자의 주체성마저도 짓밟고 이기주의를 극대화하여 만인들 위에 군림하는 삶을 말한다. 장정순 시인은 곡선의 삶을 찬양하며, 그의 인문주의를 통해 모든 우유부단한 자와 반대파들에게 결사항전을 선포하는 자유와 평등과 사랑의 전도사라고 할 수가 있다.
장정순 시인의 직선의 삶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얘기], [머물 곳], [무심코 한 말], [선線] 등으로 나타나고, 또한, 그의 곡선의 삶에 대한 찬양은 [기쁨이], [그믐밤을 이기다], [나무에게 헌사를], [새로운 시점], [공부하는 봄] 등으로 나타난다.
고급스러운 보석에 오르기 위해
반지와 목걸이는 한껏 애교를 부린다
일용할 양식이 상식을 넘어 빵까지 기교를 부리며
서로 경쟁하는 고품격의 장식은
디자인되고 변형하여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연결했다
---[우리의 얘기] 부분
들판과 마을을 스쳐 도시와 거리를 안고
풍요의 양분을 식탁에 부어주는데도
여전히 무심하게 길든 이기심만 키우는 건 아니니
안개를 밟으며 손짓하는 이름아
네가 머물 곳을 찾았니
가증된 수식을 속히 지워 주렴
---[머물 곳] 부분
무심코 한 말은
괜스레 너의 허물을 들여다보고
나를 위로하는 독주에 기웃거린다
작디작은 허물을 소꿉장난하며
즐기고 있다
---[무심코 한 말 2] 부분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사회의 암적인 종양과도 같으며, 만악의 근원인 탐욕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그 모든 가치들을 다 파괴시킨다. “고급스러운 보석에 오르기 위해/ 반지와 목걸이는 한껏 애교를 부”리고, 이 세계의 들판과 마을은 풍요로운 양식을 식탁 위에 올려주었는데도 모두들 다같이 자기 자신의 이기심만을 확대시켜 나간다. 한 사회의 꿈과 희망을 가져다가 주는 것도 말이고, 한 사회의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는 것도 말이다. 사랑스러운 말, 자비롭고 친절한 말,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말들이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며 끊임없이 소송전을 벌이는 이전투구의 말만이 난무한다. 이기심과 탐욕은 어느덧 습관화되고 체질화되어 무심코 내뱉은 말에도 독이 묻어 있고, 타인들의 아주 작디 작은 약점과 허물마저도 소꿉놀이의 대상이 된다.
무심코 한 말이
혀에서 붉은 가시가 되었다
송진처럼 끈적거린다
수천 개의 입술이 되어 회색으로 꿈틀거린다
아침을 찢는다
생명을 소멸하는 사막이 되고 있다
혐오스러운 무덤의 표정을 짓는다
아아
미소가 찌그러지기 전에 어두움을 걷자구나
저기 빛의 땅으로 발을 들여놓자구나
---[무심코 한 말 3] 전문
어느 사회가 선진 사회인가, 아닌가는 그 국민들의 언어 사용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사랑스러운 말, 자비롭고 친절한 말,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말들이 주조를 이루면 그 사회는 선진 사회가 되고, 그 반면에,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며 끊임없이 거짓과 이전투구의 말이 난무하게 되면 그 사회는 후진 사회가 된다. 선진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고 전인류의 존경과 찬양을 받는 사회라면, 후진 사회는 행복지수가 가장 낮고 끊임없이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말 한 마디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말 한 마디로 그토록 소중한 타인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고, 말 한 마디로 한 사회 전체, 또는 한 국가 전체를 끊임없는 내전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말은 약이면서도 독약이고, 말은 칼이면서도 흉기이다. 따라서 곡선의 삶이 아닌 직선의 삶은 말이 독약이나 흉기가 되고, 우리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우리들의 아침을”, 우리들의 희망을 갈기갈기 찢게 된다. 왜냐하면 무심코 한 말이 “수천 개의 입술이 되어 회색으로 꿈틀”거리고, 그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사막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에 비춰오는
한 줄기 햇살은
나의 날을 환희로 채워 준다
그늘 때문에 열리지 않았는데
회오의 실오라기를 풀어주며
그믐밤을 이긴다
자유로운 민들레 씨앗처럼
될 수는 없어도
은하수를 좇아
긴긴 행로를 헤쳐가야 하는
이런 조바심은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그믐밤을 이기다] 전문
장정순 시인의 ‘곡선의 시학’은 ‘사랑의 시학’이며, 이 ‘사랑의 시학’은 비판철학에 기초를 둔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직선이 온갖 탐욕과 이기주의의 칼날을 들이대면 곡선이 그 칼끝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그 칼날을 못 쓰게 만든다. 정의가 불의를 물리치고 사랑이 모든 증오와 험담을 물리치듯이, 곡선이 직선을 이긴다. 비판철학은 사랑에 기초한 철학이며, 모든 시의 근본토대이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비판만이 또 위대하다”는 비판철학, 즉, ‘곡선의 시학’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비판없는 시는 공허하고 시가 없는 비판은 맹목적이며, 무차별적인 폭력을 난무하게 만든다. 시인은 그의 앎과 비판철학으로 무장한 최고급의 인식의 전사이자 자기 자신의 그 모든 것, 즉,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걸고 사회적인 재앙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혁명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믐밤, 모든 생명체가 시들고 병드는 그믐밤, 어떠한 꿈과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그믐밤을 이기는 것은 “두 눈에 비춰오는/ 한 줄기 햇살”로 온몸을 환희로 가득 채우면 된다. 시를 쓰는 것은 독약과도 같고 흉기와도 같은 말들을 제거하고, “자유로운 민들레 씨앗처럼”, 또는 “은하수를 좇”는 “긴긴 행로”처럼 그 꿈과 희망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는 꿈과 희망이고, 언제, 어느 때나 오염을 모르는 곡선의 젖줄이며, 우리 인간들은 시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장정순 시인의 시는 “눈물이 있는 기도”이고, “마음을 밝혀주는 별”이다. “절망을 극복한 꽃”이고, “환희의 노래”이다. “사랑의 빛 안에서” 그의 “영혼은 별처럼 반짝”이고, “꽃처럼 향기로워”진다. 장정순 시인의 시는 오늘도, 내일도 “어두운 밤을 헤쳐”([시인의 말]) 나가는 꿈과 희망이 되고, 그리하여 끝끝내는 “그믐밤을 이기게” 하는 ‘곡선의 시학’, 즉, ‘사랑의 시학’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광활한 창으로
밤은 수많은 별을 보낸다
폭설에 덮인 자작나무는
서로를 감싼다
자연주의자의 죽음이
다시 살아나는 새로운 시점이다
---[새로운 시점] 전문
풀꽃에 하얀 나비가 앉는다
낱자가 떡잎을 밀어 올린다
요람의 아기가 웃는다
도화지는 크레파스를 부른다
---[공부하는 봄] 전문
언제, 어느 때나 광활한 창으로 수많은 별들을 보내는 시, 폭설에 덮인 자작나무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시, 자연주의자의 죽음으로 다시 살아나는 시, 풀꽃에 하얀 나비가 날아 앉고 낱자가 떡잎을 밀어 올리는 시, 요람의 아기가 웃으면 도화지는 크레파스를 부르는 시----. 장정순 시인의 시는 나무이고, 꿈과 희망이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종교이다. 그는 “자유를 잃어버린 노예” 같지만,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복종을 하고, “어쩌면 다소곳한 여종” 같지만, 자기 자신의 “고고한 권리를 순종으로 채운다.” 자기 자신의 고고한 권리는 고귀하고 위대한 시인의 삶의 철학이 되고, 따라서 그는 옥토가 아니어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 “틈틈이 눈을 뜨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고공을 향한 끈질긴 저력은/ 듬직하고도 강인한 신사와도 같다.”
자유를 잃어버린 노예 같으나
부여받은 책임을 겸허히 존중한다
고고한 권리를 순종으로 채운다
어쩌면 다소곳한 여종 같다
옥토가 아니어도 일구어지기 위해
용기를 잃지 않았다
틈틈이 눈을 뜨며 살아나는 세상을 안으려고
깊은 어둠 속에서도 고공을 향한 끈질긴 저력은
듬직하고도 강인한 신사 같다
너에게 기댈 수 있는 건
행운 중의 행운이다
급경사도 잡아준다
반짝이는 아파트와 새하얀 공간 사이에 파고드는
별난 소음에도
불규칙한 바람이 내 옷자락과 모자를
일그러뜨리는데도
요동하지 않으며
심호흡이 되게 하는
너에게 헌사를 보낸다
---[나무에게 헌사를] 전문
장정순 시인의 시는 종교가 되고, 그는 이 말의 사원에서 암수 한몸인 시인이 된다. 시인은 자기 자신의 ‘곡선의 시학’ 앞에 순종을 하는 여종이면서도 또한, 그는 그 어떠한 적이나 고통과도 싸워 이기는 천하무적의 용사와도 같다. 시는 키가 크고 뿌리가 깊은 나무이고, 이처럼 ‘시의 종교’를 찬양할 수가 있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가 있고, 세계가 있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다. 시의 종교는 자기 자신을 영원불멸의 시인으로 키우는 종교이며,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복종을 하며, 자기가 자기 자신을 ‘고통의 지옥’ 속으로 몰아넣으며 끊임없이 입신수도 하는 종교라고 할 수가 있다.
너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니까
내 손은 작은 건반 악기가 된다
엄지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도 레 미 파 솔
숨어있는 나비를 부른다
보드랍고 귀여운 너의
오른손가락으로 노래를 연주한다
노랑 하양 나비야
개나리꽃 필 때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기쁨이를
예쁘게 꼭꼭 기억해 주려무나
*기쁨이 : 2021년 서울지하철 안전게시문 공모전에 선정됨
----[기쁨이] 전문
모든 병은 심인성心因性, 즉, 마음의 병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 난제와 장애를 만나면 미리부터 겁을 먹고 자포자기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천재지변을 만나 전재산을 다 잃거나 삶의 고지를 눈앞에 두고 사지를 절단당한다면 그 고통의 무게는 너무나도 엄청나고 무척이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엄청난 재앙과 장애를 만났을 때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 비책묘계秘策妙計를 창출해낸다면 만인들의 반대방향에서 ‘인간 승리’를 이룩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홍해 바다가 쩌억 갈라지고 바위는 샘물을 내뿜고 하늘에서는 만나가 쏟아지는 기적이 그것을 말해준다. 오늘날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나 모든 위대한 시인들은 모두가 다같이 역경에 강한 인물들이고, 이 고귀하고 위대한 시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즐겁고 기쁜 삶을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어린아이는 시신詩神의 은총이며,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꿈과 희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린아이는 삶의 기쁨이며, 모든 고통들을 다 눈 녹듯이 녹여주며 이 세상의 삶의 찬가를 부르게 만든다. “너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니까/ 내 손은 작은 건반 악기가” 되고, “엄지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도레미파솔// 숨어있는 나비를 부”르게 된다.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다. 모든 험담과 중상모략도 다 없어지고, 어느 누구 하나 이 어린아이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어른이며,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다 씻어주는 최초의 종족창시자와도 같다. “보드랍고 귀여운 너의/ 오른손가락으로 노래를 연주한다”와 “노랑 하양 나비야/ 개나리꽃 필 때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기쁨이를/ 예쁘게 꼭꼭 기억해 주려무나”라는 [기쁨이]가 그것을 말해준다.
장정순 시인의 {그믐밤을 이기다}는 ‘곡선의 시학’이고, 곡선의 시학은 ‘사랑의 시학’이며, ‘사랑의 시학’은 ‘시의 종교를 탄생시킨다.
‘기쁨이’는 키가 크고 뿌리가 깊은 나무가 되고, ‘기쁨이’가 ‘기쁨이’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최초의 종족창시자와도 같은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