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근의 칼럼
한국문인협회 문단실록1
닉 레인의 동굴족과 배상호의 동굴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생명의 도약》 이란 책은 깊은 바닷속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을 생명의 기원으로 다루고 있다. “최초의 생명은 심해 열수공의 다공多孔석 암석이었다.”라는 진술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문구다. 아주 작은 구멍이 많은 암석이 생명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닉 레인의 책에서 처음 본다. 마이크 러셀, 빅 마틴이란 학자들의 가설에 기반한 주장이다. 이들에 따르면 최초의 생명은 동굴족이라는 사실이다. 《생명의 도약》은 생물학 연구의 최전선을 보여준다. 저자는 생명의 기원, DNA, 광합성, 진핵세포, 성, 운동, 시각, 온혈성, 의식, 죽음에 관해 말한다. 닉 레인(1967년생)은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생화학자이고, 글을 잘 쓰는 과학자다.
문예시대 발행인 배상호 형은 공무원이지만 문학을 너무나도 사랑한 문인이다. 닉 레인이 동굴에서 생명의 기원을 찾았다면, 배상호 형은 동굴에서 <문예시대>라는 종합문예지를 탄생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두 분이 닮았다. 나와 배상호 형과의 인연도 동굴에서 시작되었다. 동굴은 내 문학의 시원이라고 해야겠다. 1988년 월간 <동양문학>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문단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 때, 부산 수필문학의 대부였던 황정환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장님을 통해 배상호 시인, 강천형 수필가. 정영일 수필가 등과 인연을 맺으면서 범일동에 있는 동굴을 자주 드나들었다. 동굴 속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어떻게 하면 문학의 불모지 부산을 우리가 살릴 수 있을까를 의논하다가 <문예시대>라는 종합문예지를 발간하자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배상호 형의 주도로 서구청 문화공보실에 문예지 사무실을 두고, 나는 초대주간으로 정영일은 초대편집장으로, 강천형 배상호 형은 운영위원을 맡기로 했다. 당시 네 명 중 세 명은 교직에 몸담고 있었고, 실제 발행인인 배상호 형도 서구청 공무원 신분이므로 우리는 법적으로 영리행위도 할 수 없어, 법적 발행인으로 황정환 회장을 내세웠다.
이로써 첫 운항을 하게 된 <문예시대>는 첫 발을 순조롭게 내딛고, 이번 가을호로 <문예시대> 통권 100호를 맞는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오늘날 내가 계간 <에세이문예>, 강천형 형이 <시와 수필>이란 종합 문예지를 발간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문예시대>를 운영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사형제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의리로 뭉쳐 한동안 부산 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문학행사가 있을 때면, 언제 어디에서든 네 사람이 같이 나타나니,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살 만도 하지 않는가. 강천형 형과 배상호 형은 정영일 편집장이나 내보다도 나이가 많았고, 나는 정영일보다 한두 살 나이가 적었다. 서로 ‘형 아우’ 하면서 우정을 꽤 우래 지속시켰다. 그러나 꽃이 피면 지듯 우리의 관계도 문단선거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균열이 가기도 했지만, 작년 부산문인협회 회장 선거를 계기로 해서 배상호 형과 나, 정영일 수필가는 다시 한 배를 타고 머나먼 길을 손잡고 가고 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정말 오랜 세월 동안 배상호 형은 큰일을 많이 했다. 문학적 기초가 부족한 부산바닥에서 열정 하나로 <문예시대>를 100호까지 결간 없이 내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 즈음에서 형에게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어찌 이뿐이랴. 형은 중국의 변방에서 한국문학을 잘 이어가고 있는 조선족 사람들까지 챙기며 그들에게 문학상을 주고, 그들의 문학작품을 포용하였다. 또한 형은 청렴결백하였다. 공직에 있으면서 그리고 문예시대를 발간하면서, 시상제도를 운영하면서, 선거에 나서서 싸우면서도 항상 정직했다. 그가 달려온 생애는 공직에서도 문단생활에서도 후배사랑에서도 모범이 되었으며, 나는 그런 의리와 청렴결백한 정신이 <문예시대> 100호라는 기념비를 세웠다고 생각한다. 작은 공적이나 업적은 크게, 큰 잘못이나 부족한 면은 아주 없는 것으로 풀어내는 배상호 형과의 인연에 감사할 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형이 이번에 부산문협 선거에 출마했다. 아우가 한번 도와 달라’고 했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편에 서야 하는 게 도리라 여겼다. 수년 전의 약속 때문이었다.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승리의 기쁨, 부회장이라는 달콤한 배신보다는 나는 배상호 형과의 오래된 약속을 우선시했다.
배상호 형의 러닝메이트로 뛰어 선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허망한 결과에, 믿을 수 없는 문인들의 선택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실패가 부산을 넘어 로컬을 아니라 내셔널, 인터내셔널로 나의 무대를 더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배상호 형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고, 그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 바보 같은 선택이 안겨준 영광스러운 선물로 돌아왔다. 나는 대한민국 수필학자 3세대의 대표주자로서 날개를 달았다. 더 낮은 자세로 의리를 중시하며 황소의 선한 걸음으로, 무쏘의 뿔처럼 당당히 뒤돌아보지 않고 오직 태양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문예시대 초대주간으로서 1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자 한다. 우리 동굴족의 초대수장은 다시는 올 수 없는 산으로 가셨지만, 우리 동굴족의 새로운 수장인 배상호 형이 건재하니, 무엇이 두려우랴. 배상호 형은 <문예시대> 발행인이고, 글을 잘 쓰는 문인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생명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닉 레인의 <생명의 도약>을 <문예시대의 도약>으로 바꾸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