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8편.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
1절-2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1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무엇이 광대하시냐? ‘광대’란 글자 그대로 보면 넓고 크다는 말인데, 이 말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은 하나님께서는 지혜지식을 가지는 면에서 광대하시다.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자이고 지식자이신지? 그리고 도덕적인 면에서도 광대하시고, 능력적인 면에서도 광대하시다. 인간의 말로 더 이상 표현할 길이 없다.
지혜지식이 광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개인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 창세 이후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에도 인간을 통해 계속 인간을 만드셨는데, 워낙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어느 깊은 산골의 누구를 만든 것은 모르기도 하실까? 깊은 산골이나 외딴섬에 태어난 사람도 하나님이 다 아시느냐?
교인들 중에는 정말 외딴 곳에서 온 사람이 간혹 있다. 이런 걸 보면 ‘네가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내가 다 불렸다’ 하는 그 면을 느낄 수 있다. 주님은 마지막 날은 물론이고 지금도 어느 곳에 있어도 당신의 백성을 다 불러 모으신다. 그리고 한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드는 일에 있어서 가까이 살던 멀리 살던 각 사람의 차원에 따라 각종 존재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동원시키고, 시대를 초월하여 세상이 처음 만들어지는 날부터 세상 마지막 날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물질계와 신령계를 총 동원시켜서 각자 그 환경에 따라, 배움에 따라, 시간에 따라 인간을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얼마나 광대하신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산골구석에 살고 있는 사람이 공부를 위해서 십리 밖의 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다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학교라는 것을 통해서 끄집어 낸 거다. 참으로 신기하다. 각자 환경에 따라, 배움에 따라, 시간에 따라 인간을 깨닫게 하시는 그 역사가 얼마나 광대한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세계 각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던 나로 하여금 그 소식을 듣게 하고 보게 하는 것은 그걸로 통해서 하나님께서 뭘 말씀을 하는 거다. 그런 일을 자기가 직접 겪으면서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이 사람은 멀리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전혀 모르는 거다. 우리는 가까이서건 멀리서건 자기에게 들려오고 보여지는 사건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아닌 말로 우리나라에서나 외국에서 사건이나 재난으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들이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뭔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문득 일어나는 것은 신앙 면으로 보면 그런 일들이 다 나를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거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사람에게 대해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사람을 아낄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에 대해 미움의 화살을 쏘지 말아라. 우리교회 식구들은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신앙사상 면에서는 칼날 같아야 하겠지만 온 인류를 감싸는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이 온 지구를 감싸고 있다. 우리는 내가 먼저 믿었으니까 바로 잘 믿어서 진리의 역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번져나갈 수 있도록, 진리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이러려면 현재 자기의 정신이 비 맞은 소통처럼 있을 수는 없는 거다.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성은 구별되고 구별된 산이다. 그러니까 거룩한 산에 하나님의 성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 존재 자체가 거룩한 분이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거룩한 성도들인데, 믿는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의 영을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살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의 노력은 전혀 안 들어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아직 죄인이지만, 죄를 짓고 있지만 영이 중생된 이 면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백성이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거다.
믿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어있지만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기본구원으로, 피의 구속으로 영이 살아났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백성이 된 거다. 하나님께서 구별을 시켰다 그 말이다. 이것을 구약의 역사를 들고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시킨 것처럼 우리를 세상 사람과 구별을 시켰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잘 믿고 못 믿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 타이틀이 들어있는 거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영이 중생이 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지식도 거룩한 쪽으로, 지혜도 거룩한 쪽으로, 도덕성도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거룩한 쪽으로 성장을 해야 한다. 일단 예수학교에 들어왔으면, 교회라고 하는 학교에 들어왔으면 예수를 아는 면으로 공부를 잘 해서 거룩한 면으로 실력이 붙어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 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이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자라지 못한 백성이 많이 있다.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거룩한 성품으로 자라나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성이 있다 그 말이다. 거룩한 산에는 하나님의 도성이 있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그 말이다. 이 통치는 진리말씀의 통치요, 생명통치요, 애정통치요, 사랑통치다.
이 하나님의 성 안에서 아주 넓은 통치가 나온다. 높고 깊고 넓은 통치가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제 멋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깨달음이 나갈 수 있는, 영능의 실력자로 될 수 있는 통치가 나간다. 지금도 여기 궁극교회에서 하나님의 진리이치가 나간다면, 말씀의 이치가 나가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동산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거다. 교회는 목사가 통치하는 게 아니다. 목사는 심부름꾼이다. 비유가 될 런지 모르겠지만 예컨대 내 원래 목소리로 설교를 하려면 목소리가 작아서 몇 사람밖에 못 듣는다. 그래서 앰프로 통해서 말을 하면 다 들을 수가 있는 것처럼 목사는 성도를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다.
‘우리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성’이라고 하면 생명적 치리가 되어있고 애정권 치리가 되어있다. 즉 하나님의 보호를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는 진리통치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진리통치를 받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거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일상생활 속에도 같이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격이 진리 사상화로 된 성도와 항상 동거 동행 동락 동사 동숙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결합이라 그 말이다. 이게 하나님과 같이 사는 거다. 나 따로 하나님 따로가 아니라 인격적 결합으로 같이 산다. 즉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으로 되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 이러니 하나님이 이 사람을 떠날 수 없는 거다.
나의 정신과 마음과 사상이 하나님의 뜻과 같고,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같은 것이 인격적 결합적 관계인데,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은 안 붙이고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만 하게 되면 이건 문제가 있다. 자기가 세상 소원 목적성으로 되어있으면서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교인, 거짓 목자, 거짓 신앙자들의 신앙이 이렇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역사를 보면 예루살렘 도시 안에 성전이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예루살렘을 통치한 것을 보면 주로 다윗의 진리통치로 되어있다. 이 진리통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통치다. 이건 교회의 통치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거다. 그래서 교회통치는 진리통치요 하나님의 옳음으로 절대권 통치다. 따라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목사나 종들은 그 의사성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사라야 한다. 이게 옳은 거지 ‘예수 믿어 부자 되자’ 라고 하면서 세상 것을 끄집어 당겨서 말을 하게 되면 이건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사에는 이유가 안 붙는다. 즉 이치가 명백하다. 그런데 자꾸 허점이 있는 말을 하게 되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으로 보면 다윗의 통치를 진리통치, 시온산의 통치라고 하는데, 이것은 상징적 모형적으로 주님의 통치의 그림자다. 그러니까 다윗의 통치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가지고 통치하실 것을 그림자로 보여준 거다. 다윗의 통치는 그림자 통치요, 주님의 통치가 원 실물통치다.
이 세상은 모두가 그림자다. 모형이다. 원형은 하늘나라요 하늘나라의 정신이다. 절대적인 옳은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세례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세상이 불에 다 타버리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주님의 역사가 임하는 곳에는 성질적으로 천국의 통치가 들어가는 거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 진리에 의해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주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거고, 심령천국이 임한 거다. 심령천국이 된 사람은 사단 마귀나 귀신이나 악령이나 세상의 그 무엇이 와서 다스릴 수 없는 거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이해타산이 천국에 있고, 모든 결산을 천국에 내리고 산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못 사는 거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러면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겠다고 믿는 사람은 우리보다 다 잘 사느냐? 우리보다 못 사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물질적으로 잘 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 꼴이 문제다. 세상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엄청나게 어리석은 거다. 사람의 머리가 이치로 돌아가야 과학적인데 지식의 기준이 없으니까 머리가 이치로 돌아가지를 않으니 막 속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죄 아래, 사망권 안에 산다. 아무리 부자라도 사망권 안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못 살아도 사망권 안이 아니다. 우리는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생명권 안이다. 생명권 안에 사는 사람은 못 살아도 원망불평이 없이 그 환경과 그 조건 가운데서 영능의 실력을 길러간다. 이게 거룩한 성도라. 아무리 잘 살아도 세상원망 남 원망을 하고 있다면 거룩한 사람이냐? 죄 아래 있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혼자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무더기로 그렇게 살기 때문에 오히려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가는 우리보고 미쳤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볼 때는 누가 미친 것 같으냐? 미쳤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혼잡 혼란성이 막 일어나는 걸 말한다. 머릿속이 정립이 잘 돼 있다면 세상 사는 게 뭐가 그렇게 힘이 들겠느냐? 알고 보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의 머리를 잘못 써서 고통을 당한다. 자기가 생각을 잘못해서 일을 저질러 놓고 자기 속에 고통이 몰려오니까 세상을 향해 한탄을 하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영의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은 똑바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것만은 알아둬라. 전부가 병이고, 곱추고, 비뚤어져 있고, 빗나가 있다. 그래놓고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쳐다보며 고치려고 하는 건 없고 하나 같이 남 탓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진리통치 신정통치에서 광대한 진리이치의 교훈이 나오는 거다. 세상통치는 이게 없다. 세상통치는 광범위할수록 여기서 툭 터지고 저기서 툭 터지고 하는 거다. 하나님의 진리이치를 알면 알수록 자기 활동의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진다. 즉 실력자라 그 말이다. 실력자가 된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이 교훈을 다른 교회의 교훈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혹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다른 교회에 가서 한 달 정도 들어보고 와라. 자기가 옳은 진리이치를 깨닫고 주님과 인격적 결합으로 되어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던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볼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고차원적 하나님의 신적 도덕성적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내적 외적으로 무한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이 얼마나 높을까? 얼마나 과학적이고, 얼마나 조밀하고, 얼마나 세밀할까? 하나님의 신적인 지혜지식이 얼마나 위대한지 한 마디로 창조물을 봐라. 만물의 법칙을 봐라. 이게 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을 말해주는 거다. 우주만물이 돌아가는 것을 봐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법칙을 어기느냐? 하나라도 법칙을 어긴다면 전 우주적으로 확산이 되어서 다 죽어버린다. 그리고 어느 이치가 하나라도 틀렸다면 이는 하나님의 뇌 속에 구멍이 난 셈이니 이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안 되는 거다. 인간표현으로 과학적 실험을 하다가 뭐가 하나가 잘못되면 그냥 폭발해 버리듯이 만일 하나님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어느 것 하나라도 부딪힌다면 아마 하나님은 폭발을 해서 없어질 거다.
인간이 하나님의 머리를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지금 과학적으로 발견이 된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들이 우주공간 속에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다. 인류가 그 법칙을 캐고 캐서 써도 하나도 부족함 없고 모자람 없다. 우리 인간들은 한 1년, 한 5년, 한 10년 앞을 못 본다. 어느 나라던 좀 깨우친 사람들은 정치를 할 때 앞을 내다보고 하지만 머리가 어두울수록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그러니 이랬다 저랬다 한다. 그 와중에 국민들만 고통을 당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런 걸 볼 수 있다.
만일 여기 서 있는 내가 우리교인들을 보고 ‘예수 잘 믿어라. 충성봉사 열심히 하라. 그러면 복 받는다’ 라고 한다면 일반교회의 기준으로 볼 때 내 말이 하자가 있느냐? 없다. 그러나 영적 이치로 보면 하자 투성이다. 이런 식으로 믿게 되면 충성봉사를 하고도 주님 앞에 ‘난 너를 모르겠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거짓 교인이 되고, 심판은 심판대로 받는다.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성경을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이란 인격의 온전, 성품의 온전을 말하는 것인데 이건 없고 맨 물질로, 돈으로, 충성봉사로 자꾸 키워서 ‘하나님께 영광 영광’ 하고 있으니 이게 신앙이냐? 이게 물질적인 거냐, 인격적인 거냐?
테레비에 보니까 요즘은 늙은 사람들이 젊은 아이들처럼 놀지 않으면 인기가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이 먹은 사람으로부터 젊은 사람에게 내려가는 교훈이 없다는 거다. 이거 큰일이다. 이게 남의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땅에서 우리가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할 일이 엄청나게 많다. 우리가 진리이치를 제대로만 듣고 깨닫는다면 평신도라도 이 세상에서 머리가 된다.
하나님의 광대성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 곧 거룩한 산에서 찬송이 되는 거다. 그 교훈의 자리, 그 깨달음의 자리, 그 신분의 자리, 그 영광의 자리에서 찬송이 나오는 거다. 세상과 세상 것을 다 분별하고, 비진리적 이질적 육적 가르침을 다 분별하고, 악령들의 감화성을 분별하고, 추려진 데서 추려내고, 구별한 데서 또 구별해서 지극히 거룩한 말씀의 도의 봉우리에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찬송하게 되는 거다. 그만큼 깨달았다는 거다.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찬송이 나오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체화 인격화 사상화 되지 못한다면 저질적인 사람인데, 이런 인간 속에서 무슨 거룩한 찬송이 나오겠느냐? ‘찬송을 부르니 찬송이다’ 이걸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깨닫고 진리로 인격화된 사람이라면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속에서 찬송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 없는 거다. 이런 사람이 부르는 찬송은 찬송가책에 있는 것을 불러도, 자기가 노래를 지어서 불러도 늘 새 찬송이 되는 거다. 새 찬송이란 사람이 새롭게 만들어진 데서 나오는 걸 말한다. 새 찬송은 새사람이 부르는 거다.
2절: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이 말은 온 세계의 산보다 더 높은 산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산이 무슨 산이냐? 글자 그대로 보면 에베레스트 산이 된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은 터가 넓은 게 아니라 뾰족 산이다.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큰 왕의 성’이라고 했는데 큰 왕이 누구냐? 큰 나라 왕이다. 그러면 어느 나라가 큰 나라냐? 큰 왕은 큰 나라 왕인데, 이걸 신앙적으로 보면 주님밖에 더 있느냐? 주님보다 더 큰 왕이 있느냐? 왕이라고 하면 통치가 있는 건데, 큰 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통치를 하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
우리의 큰 왕은 죄를 이겼고, 마귀를 이겼고, 죽음을 이겼고, 사망을 이겼다. 세계 어느 나라 왕이라도 이걸 이긴 통치자가 있느냐? 없다. 그렇다면 왕을 삼는다면 누구를 자기의 왕을 삼겠느냐? 주님을 자기 왕으로 해 놓으면 주님이 마귀를 이겼고, 죄를 이겼고, 세상을 이겼고, 다 이겼으니 주님을 왕으로 삼은 자기도 그런 걸 이길 수 있는 거다.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시온산은 낮은 산이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봐야 시온산이 북방 쪽에서 보일까? 시온산은 예루살렘에서 보면 약간 동북방 쪽에 있고, 다윗성에서 보면 북방 쪽에 있다. 이 다윗성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과 다윗성은 모두 터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게 다 우리들이 깨닫도록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다.
이 성전이 단순히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온 세계가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상징적 모형적 계시이니, 터가 높고 아름다운 큰 왕의 시온산은 일반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과 존귀적 차원이 아니라 그보다 질적으로 더 높은 차원을 말하는 거다. 신앙 질적으로 아주 높은 차원, 아주 고상한 도덕적 차원을 말한다.
각 교회마다 보면 마치 아이들이 자기 부모를 따라가는 것처럼 그 교회 교인들은 자기 목사를 많이 따라간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그래서 목사들은 매사에 아주 조심해야 한다. 우리교회 자녀들은 어디에 내놔도 똑 소리가 나야지 남의 뒤만 따라가며 ‘예 예’ 하면서 이용만 당하면 안 된다.
‘터가 높고’ 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질적 가치적으로 하나님의 신적 고차원적 영적 신령적 도덕적 능력적 차원을 말하는 거다. 좋다고 하는 모든 좋은 것을 말하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차원과, 믿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차원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믿는 사람의 도덕성의 차원은 생명과를 먹고 나온 도덕성의 차원이기 때문에 그 안에 영생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성품성이 들어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의 도덕성은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어있고 사망 아래의 도덕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성질이, 그 누림성이, 그 행복성이 사망권 안이다. 그러니까 저질이다. 영생으로 들어갈 게 없다. 전부가 심판 아래다. 생각의 질이 우리는 천국의 것이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땅에서부터 올라온 것이다. 질이 다르다.
공자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부모 공경성의 도덕성의 법과, 하나님의 법에서 나온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글자도 같고 말소리도 같지만 하나는 땅에서 올라온 거고,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거다. 질이 다르다. 이걸 알아야 한다. 중하고 목사하고 악수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돌부처와 악수를 시키는 것과 같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분이 날 일이다. 서로 좋게 지내겠다고 그렇게 하는 거지만 우리가 볼 때는 이게 왜 분이 날 일이냐? 그렇게 하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잘한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아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돌부처와 악수를 하겠느냐? 하나님은 인격자이신데 돌도 인격자냐? 오늘날 기독교가 이 모양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우상을 섬기면 불이 떨어지지 않더냐?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악수를 한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라서 제 1계명 제 2계명을 어기는 거다. 이건 저주다. 지금 말세시대의 기독교가 성경을 내다버렸다.
터가 높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좋다고 하는 것을 다 뭉쳐놓은 것을 말한다. 지식의 터가 높고, 지혜의 터가 높고, 도덕성의 터가 높고, 신분적인 터도 높고, 존귀영광이 다 하나님의 것으로 된 것을 말한다. 그러니 그 차원이 얼마나 높겠느냐? 성격적 질적 차원이 얼마나 높겠느냐?
그러면 무엇이 이렇게 높으냐?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닦아놓으신 기본구원의 터는 질직 가치적으로 높은 거다. 왜 그러냐? 하나의 일반정신으로 된 게 아니라 예수님의 지혜지식성으로, 예수님의 도덕성으로, 예수님의 능력성으로 닦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어 영이 중생된 이게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게 아니다. 죽을 것이 없고, 죽은 것이 없고, 죽어나간 것도 없는 하나님 앞에 최고의 기쁨을 드린 예수님의 고상한 33년의 삶의 걸음걸이로 통해서 된 거다. 우리가 이 주님에게 접촉만 되면 전부가 영원한 것으로 살아나는 거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만나도 고쳐주고, 병자를 만나도 고쳐주고, 당신이 가는 발걸음은 그냥 걸어간 게 아니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그 속에는 우리의 구원도리의 이치와 사상이 들어있다. 눈동자 하나를 굴린 것도 아무렇게나 굴린 게 아니다. 다 우리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하신 거다.
죄와 사망과 유혹과 미혹과 세상을 다 이기시고 하나님의 최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린 예수님의 걸음걸이로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가운데 나도 들어있는 거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이 모든 삶을 통해서 우리의 기본구원의 터를 닦아 놓으셨으니 이 기본구원의 터만 하더라도 이 터가 얼마나 높으냐? 이걸 알고 감격을 하더라도 이 감격성의 질은 굉장히 고상한 거다. 하늘나라 신령계에서 높은 것이니 땅에서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터는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고, 사망 아래 있고, 심판 아래 있기 때문에 이방 종교계나 어느 세상 사람이 닦지 못하는 거다. 불가능이다. 예수님이 이 터를 닦아 놓았다. 기독자라면 다 이 터를 기본으로 해서 이 터 위에서 살고 이 터를 기반으로 자라가야 하는 건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 터 위에서 살지 못하고 저질로 사는 자가 많다. 이 터가 우리에게는 기본수준인데 저질로 내려가서 살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해 놓으신 기본구원의 본전이 아까워서라도 이런 자들은 두들겨 패서라도 끄집어 올리신다.
성경을 보면 전부가 사건이고 일이고 활동이고 행동이고 명령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들 속에는 우리의 영원 궁극적인 영광의 약속이 들어있으니 우리는 먼저 자기의 신앙정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고, 자기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천국이 아닌 세상에 가 있다면 빨리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