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최초 왕릉 정릉의 능침사찰로 창건된 돈암동 흥천사(주지 정념 스님)가 9월 23일, 왕실원당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되찾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다례재를 봉행했다.
흥천사는 이날 열린 ‘흥천사 신덕왕후 다례재’를 통해 과거 조선왕실의 평온과 국태민안을 축원하던 산릉제례를 주관했던, 왕실원당의 역할을 104년만에 회복시켰다.
이날 열린 ‘신덕왕후 다례재’에는 광평대군 정릉봉향회를 대표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광평대군파종회 부이사장인 이길표 후손과 다례재 재현의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를 주창해 다례재 복원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도 참석했다.
9월 23일은 정릉에서도 선릉제례를 모시는 날로, 정릉 제례에 앞서 흥천사에서 오전 10시부터 1시간 동안 다례재를 봉행한 것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다례재를 봉행하고 있는 흥천사 스님들과 불자들.
정릉은 조선왕릉 중 첫 번째 조성된 왕릉으로, 태종 이성계의 왕후인 신덕왕후 강비의 능이다. 원래는 정동(현 덕수궁 인근)에 있다가 이곳 정릉으로 태종에 의해 이전돼 왔다. 당시 정릉은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했던 태조 이성계의 공으로 묘역이나 신장석(릉을 조성하는 병풍석 등)의 아름다움은 조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당시의 정릉에 사용되었던 신장석등은 태종에 의해 능히 현재의 정릉으로 내쫒기는 과정에서 광통교의 부재로 사용됐다. 따라서 현재 청계천 광통교에서 그 일단을 직접 볼 수 있다. 광통교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은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화강암에 정하나와 망치로 만들어낸 조각상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살아있는 신처럼 생동감이 있어 전문가들은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원래 화강암안에 있던 신상을 인간이 찾아낸 것이라는 겸손한 표현을 하고 있기도 하다.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 즉위 5년(1396)에 신덕왕후 강씨가 승하함에 따라 능지를 한성부 황화방(현 종로구 정도)에 정하고 1월에 환후에 원찰을 건립하기 위하여 12월에 능지의 동편에 건립을 시작하여 1398년 7월에 170여 칸의 대찰을 준공하면서 흥천사라 이름을 지었다. 1496년에는 신덕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동종을 주조했고, 이 동종은 경복궁에서 창경궁으로, 다시 덕수궁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으면서 지금은 광명문에 걸려 있다.
조선 왕조의 억불이 계속되면서 왕실의 지원이 줄어들고, 결국 연산군(1504) 때 불이 나 전각이 소실되고 명맥을 유지하던 사리각만 남아 있다가 중종때(1510) 유생들이 불을 질러 도성 안의 흥천사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흥천사는 선조 9년(1576년) 정릉이 복원되면서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신덕왕후의 능을 정릉으로 옮길 때 능 가까이에 ‘신흥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능과 가까이 있다고 하여, 현종 10년(1669) 능을 보수하면서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암자를 옮겨 신흥사로 부르면서 흥천사가 신흥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조선조 정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전각을 새로 짖거나 보수를 하며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였고,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절을 중창하면서 원래 이름인 흥천사로 복원되어 능침사찰이자 왕실원당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러나 흥천사의 왕실원당 기능은 1908년 조선왕실과 관련된 모든 제사를 다 사라지면서 중단됐다. 그러니까 지난 9월 24일의 흥천사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다례재 봉행은 104년 만에 복원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덕왕후 다례재를 복원해 처음 봉행한 흥천사 주지 정념 스님은 “좋은 일이었든 나쁜 일이었든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 의해 조성된 신덕왕후 강비의 정릉과 흥천사의 창건은 조선불교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면서 “우리 흥천사는 원찰의 기능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번 다례재 복원을 계기로 흥천사가 왕실원당으로서의 역사와 의미를 되살리고, 나라의 주인인 시민(국민)의 원찰로 거듭 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정릉의 능침사찰로서 신덕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태조가 조성한 동종을 제자리인 흥천사로 모셔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이날 다례재에 동참한 황평우 소장은 “이번 흥천사 다례재의 의미는 한국불교의 장자종단인 조계종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종교의 사회적 의미와를 실천하고 국민에게 친밀하게 다가간다는 취지의 매우 뜻 깊은 행사”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