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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6. 14.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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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
섬기는 일터
1. 당신이 사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조성실)
2. 소비는 내 삶의 고백이다 (이재훈)
3. 크리스천은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가? (이상원)
출처 : 『빛과 소금』 두란노 2026년 6월호
1. 당신이 사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글쓴이 조성실은 장로교신학대학교 전임교수, 교회와디지털센터장입니다
1) 우리는 무엇을 사고 있는가
아침에 눈을 떠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알림을 확인하고, 밤사이 올라온 SNS 피드를 훑고, 어제 장바구니에 담아 둔 물건의 가격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살핀다. 출근길에는 커피 한 잔을 사고,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지 배달앱을 뒤적인다. 퇴근길의 지친 마음을 달래는 것은 라이브커머스 화면 속 누군가의 다정한 권유이거나, 마침 도착한 택배 박스를 뜯는 작은 의식(ritual)이다.
소비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을 사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비는 곧 정체성의 표현이 되었고, 자기를 위로하는 의례가 되었으며, 누군가와 연결되는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사느냐로 자신을 증명하고, 무엇을 사느냐로 하루를 견디며, 무엇을 사느냐로 사랑을 표현한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상을 일컬어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곧 ‘소비하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더 이상 무엇을 만드는가(Homo Faber)나 무엇을 생각하는가(Homo Sapiens)가 아니라, 무엇을 소비하느냐로 자신을 정의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그의 저서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이를 두고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love)라고 말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존재’이며, 그 사랑은 매일 반복하는 작은 실천들에 의해 빚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시대에 그 문장은 어쩌면 한 단어를 갈아 끼워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사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buy)라고. 스미스가 쇼핑몰을 ‘세속의 성전’이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드나드는 공간, 무심코 반복하는 행위,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욕망의 흐름,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어딘가로 길들이고 있다는 통찰이다.
2) 세 세대, 세 가지 갈망
오늘날 우리의 소비는 세대마다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청년 세대는 ‘의미’를 산다. 같은 가격이라면 환경에 덜 해로운 것을, 같은 옷이라면 자신의 가치관과 닮은 브랜드를, 같은 시간이라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 즉 소셜미디어에 남길 수 있는 경험을 선택한다. 신념을 드러내는 소비라 하여 ‘미닝아웃’(Meaning out)이라 부르고, 선한 가게의 상품을 ‘돈으로 혼쭐을 내듯’ 일부러 구매하는 ‘돈내기’가 새로운 응원의 방식이 되었다.
인생은 한 번 뿐이라며 현재 지향적 소비를 하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를 지나 ‘요노’(YONO. You Only Need One), 즉 꼭 필요한 것만 구매하는 새로운 소비 변화도 감지된다. 결국 청년의 소비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짧은 자기 서사다.
중년 세대는 ‘보상’을 산다. 자녀 교육비와 부모 부양, 회사에서의 책임과 가족 안에서의 역할 사이에서 가장 먼저 미뤄지는 것은 늘 자신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손목에 좋은 시계를 채워 보고,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골프채를 사고, 예약하기 어려웠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자기보상소비’(self-reward consumption)라고 부른다.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그동안 수고한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며, 흘려보낸 청춘에 대한 조용한 응답이다.
노년세대는 ‘관계’를 산다. 손주의 첫 학기 노트북을 사 주기 위해 용돈을 따로 챙겨 두고, 자녀 가족이 모이는 주말이면 좋은 식당을 예약해 둔다. 조부모가 손주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그랜드페어런츠 이코노미’(grandparents economy)가 하나의 시장으로 떠오를 만큼, 노년의 지갑은 점점 더 넓게 열리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비의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고 싶은 마음. 노년의 소비는 “나는 누구와 함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세 세대의 소비는 이렇게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깊은 곳에는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있다. 모든 소비는 결핍의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국 갖지 못한 것을 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 하며,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려 한다.
3) 소비라는 이름의 작은 예배
문제는 이 결핍이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의미를 사도 다음 날이면 또 다른 의미가 필요하고, 보상을 받아도 며칠 지나면 다시 허전해지며, 관계를 위해 무언가를 사도 그 사람의 빈자리는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일찍이 그의 저서 『소비의 사회』에서 이 풍경을 정확히 짚어낸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은 사물의 ‘쓸모’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발산하는 ‘기호’를 산다. 명품 가방의 가치는 가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든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신호에 있고, 같은 가격이라도 ‘어떤 의미를 발산하느냐’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소비는 본질적으로 차이의 게임이며, 한 번의 만족은 곧 새로운 결핍으로 이어진다. 그가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부른 자리,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알고리즘은 이 결핍의 자리를 정확히 짚어내며, 한 번 멈춰 본 화면 앞에 더 매혹적인 다음 상품을 띄운다. 우리는 ‘선택하는 자’라고 믿지만, 실은 ‘길들여지는 자’에 가깝다.
스미스가 쇼핑몰을 ‘세속의 성전’이라고 부른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성전에는 예배가 있고, 예배에는 반복되는 의식이 있으며, 의식은 사람의 마음을 특정한 방향으로 빚어낸다. 매일의 검색, 매주의 결제 알림, 매달의 카드 명세서와 같은 이 작은 반복들이 우리의 사랑을 길들인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새, 사야 할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 되어 간다.
4) 광야의 경제, 만나의 자리에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릴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다. 그런데 이 만나는 낯선 규칙이 따라온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 16:18). 그리고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출 16:19)는 명령이 이어진다. 더 거두려 한 자도 결국 더 갖지 못했고, 비축한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썩었다.
광야의 백성에게는 곳간이 없었다. 비축할 수도, 미래를 통제할 수도 없었다. 그저 매일 아침 새롭게 내리는 만나 앞에 서서, 오늘의 양식을 오늘 거두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핍의 자리가 아니라 신뢰의 자리였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두 배를 거두어 일곱째 날을 안식하라 하셨으니(출 16:22-26), 일주일에 하루는 거두지 않고 사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 시간, 곧 “나는 소비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라는 사실을 몸으로 익히는 시간이었다. 만나의 광야는 그렇게 한 백성을 ‘소비자’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빚어내는 거대한 학교였다.
미국의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풍요의 예전, 결핍의 신화라는 글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가장 깊은 영적 갈등을 '두 개의 이야기'의 충돌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나는 ‘충분하지 않다’고 속삭이는 ‘결핍의 이야기’(The Myth of Scarcity)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충분하다’고 선언하는 ‘풍요의 이야기’(The Liturgy of Abundance)다.
결핍의 이야기는 더 모으고, 더 쟁여두고, 더 빨리 사야 한다고 우리를 몰아세운다. 그러나 광야의 만나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일 새로 내리는 양식 앞에서 “오늘 하루치면 충분하다”고. 우리의 광야는 더 이상 모래바람 부는 황무지가 아니라 24시간 열려 있는 라이브커머스의 화면이고, 끝없이 펼쳐지는 추천 알고리즘의 피드이며, 한밤중에도 도착하는 새벽 배송의 박스다. 곳간은 클라우드에 옮겨졌을 뿐, 두 이야기 사이에서 어느 쪽을 따라 살 것인지를 묻는 만나의 시험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5) 사랑의 방향을 다시 잡는 일
‘슬기로운 소비’는 결국 무엇을 사느냐의 문제이기 이전에, 무엇을 사랑하느냐의 문제다. 더 싼 것을 사는 기술도 더 가치 있는 것을 사는 안목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지금 어디로 길들여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청년에게 그것은 이미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일이며, 중년에게는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노년에게는 소비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관계의 깊이를 신뢰하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방향을 다시 잡는 길은 결국 작은 반복에서 시작된다.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박자 멈추어 보는 일, 일주일에 하루쯤 무언가를 사지 않은 채로 보내 보는 일, 가계부의 숫자보다 오늘 누구와 무엇을 나누었는지를 적어 두는 일.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어쩌면 그 정도의 사소한 의례들이 우리의 마음을 천천히 다른 방향으로 길들인다.
사도 바울이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도, 자족이 단번의 깨달음이 아니라 천천히 몸에 익혀 가는 ‘배움’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이 문장은 두려운 말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복음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우리의 사랑이 길들여질 수 있다면, 그 사랑은 다시 다른 방향으로 길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빚어가는 시대, 그러나 여전히 매일 아침 새 만나를 내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늘 무엇을 사랑할지를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슬기로운 소비란 결국 그 선택을 매일 새롭게 하는 일이며, 그 물음 앞에 정직하게 서는 자리가 아닐까.
2. 소비는 내 삶의 고백이다
글쓴이 이재훈은 온누리교회 위임목사, CGN 이사장, 한동대학교 이사장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풍요의 시대는 동시에 가장 불안한 소비의 시대이기도 하다. 클릭 한 번으로 물건이 문 앞에 도착하고, 어제 산 것이 오늘은 구식이 되며, 쓰다 버린 물건들이 지구 어딘가의 쓰레기 산을 이룬다. 소비는 이제 단순한 경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식이 되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현대판 ‘코기토’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교육철학자인 파커 팔머는 평생 하나의 질문을 붙들었다.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이 일치하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듣기 전에, 삶에게 무엇을 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의 외적 행위는 내적 존재의 거울이다. 삶이 말하게 하라. 그 삶에는 지갑도 포함된다. 팔머의 통찰은 소비의 문제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우리가 무엇을 사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넘어,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소비는 영혼의 고백이다.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시장에서는 욕망을 예배하는 분열된 자아는 참된 영성을 살 수 없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내미는 신용카드 한 장에, 우리의 가장 솔직한 신앙 고백이 담겨 있다. 팔머가 몸담았던 퀘이커 전통은 ‘단순성’(simplicity)을 핵심 영적 훈련으로 삼았다.
단순성은 금욕이 아니다. 그것은 물건이 나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내 영혼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우리가 소유에 집착할수록 소유가 우리를 집착하게 된다. 팔머의 언어로 말하자면, 분열 없는 삶, 예배와 지갑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삶이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긴급한 영적 과제다.
‘소저너스’(Sojourners)의 창립자 짐 윌리스는 소비를 사적 선택이 아니라 공적 증언으로 읽는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버는지,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나누는지는 우리의 가장 깊은 가치관에 대한 선언이다.” 윌리스는 그리스도인의 소비 선택을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과 연결한다. 불의한 노동 구조 위에 세워진 기업의 제품을 무비판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그 불의에 조용히 동참하는 것이다. 반대로, 공정한 기업을 선택하고 착취적 구조를 거부하는 소비는, 시장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예언자적 행위가 된다. 그에게 지갑은 투표용지다.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역시 이 차원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그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만 기억하지만, 그는 『국부론』을 쓰기 17년 전 『도덕감정론』을 먼저 출판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몇 가지 행동원리가 존재한다. 이 행동원리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행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 행운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을 얻은 타인의 행복이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스미스에게 경제 행위의 토대는 공감(sympathy)이었다. 도덕 감정을 잃은 시장은 그가 꿈꾼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의 절반만 읽어 온 동안, 소비는 공감 없는 이기심의 무대가 되어버렸다.
성경은 소비를 금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소비는 언제나 ‘청지기직’의 틀 안에 있다. 내가 가진 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신 것이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이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소비는 단순한 사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응답이다.
역사는 ‘거룩한 소비’의 선례를 여럿 남겨 놓았다. 존 웨슬리는 소비의 원칙을 세 마디로 압축했다. “벌 수 있는 만큼 벌어라, 저축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라, 줄 수 있는 만큼 주어라”(Earn all you can, save all you can, give all you can). 그는 수입이 늘어나도 생활수준을 높이지 않고, 늘어난 수입 전부를 구제에 사용했다. 국가의 명령이 아니라 복음의 감화가 만들어낸 자발적 재분배였다.
19세기 영국의 퀘이커 기업가들 중 캐드버리(Cadbury) 가문과 론트리(Rowntree) 가문은 노동자들에게 공정한 임금을 지급하고, 공장 주변에 주거지와 학교를 세웠다. 그들은 이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윤의 목적을 달리했다.
초대 교회는 더 근원적인 모델을 보여 준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행 2:44~45).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성령의 감화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낸 사랑의 경제였다.
‘소비를 영혼의 고백으로 해석하는 거룩한 소비’는 단지 덜 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쓰는가를 묻는 것이다. 공정무역 제품을 선택하는 것, 지역 소상공인을 의식적으로 지지하는 것, 불필요하게 과도한 포장을 거부하는 것, 중고 거래를 통해 자원을 순환시키는 것, 기업의 윤리성을 소비 기준으로 삼는 것, 이 모든 것이 영혼의 고백으로서의 소비의 실천이 될 수 있다.
17세기 영국의 성직자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그의 시(詩) <연금술>에서, 아주 작고 일상적인 행위조차 하나님을 위해 행할 때 거룩해진다고 노래했다. 소비도 다르지 않다.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시여, 나를 가르치소서.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을 보게 하소서.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위하여 하게 하소서. 이 한 가지 이유로 섬기는 자는 고된 일도 거룩하게 만드나니 주님의 법대로 방 하나를 쓰는 자는 그 방도, 그 행위도 아름답게 하는도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내가 무엇에 돈을 쓰는지는,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정직한 고백이다. 소비는 영혼의 고백이다. 그리고 거룩한 영혼은 날마다 작은 선택들을 통해 빚어진다.
3. Q & A, 크리스천은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가?
이상원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과 조직신학 교수로 23년 근무했다.
현재는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 월드뷰 대표주간입니다.
(이승연 취재) 돈 버는 방법 못지않게 돈 쓰는 일도 중요하다. 소비의 시대, 현대인들은 소비를 통해 삶을 만들고, 자아를 세운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는 단순한 ‘지출’이 아니다. 삶의 방향과 가치를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다. 그래서 소비는 취향을 넘어 신념이 되고, 습관을 넘어 정체성이 된다.
특히 소비의 선택이 곧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환경을 생각해 물건을 덜 사는 절제, 공정한 생산 과정을 지지하는 윤리적 소비, 혹은 나눔을 실천하는 기부까지, 이 모든 행위는 “나는 어떤 세상을 지향하는가?”에 대해 드러나는 소신이다. 그렇기에 소비는 신앙을 드러내고 스스로의 삶을 빚어 가는 영적인 ‘고백’이자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어떤 소비를 지향해야 하는가? 이상원 교수에게 물었다.
질문 1) SNS 게시 글 등을 보면 소비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소비문화의 특징을 어떻게 진단하시나요?
☞ 현대인들이 소비에 집착하고 소비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이유는 유물론(materialism)이라는 세계관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은 눈에 보이는 것이 실재의 전부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 하나님이나 영혼이나 기타 정신적인 가치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소유하고 누리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질문 2) 요즘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쇼핑하는 등, ‘나를 위한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과 연결된 소비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현대의 시대사조 가운데 하나는 19세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철학 교수들로부터 시작된 정서론(emotivism)입니다. 정서론은 직관적 감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와 동시에 현대인들은 발달된 산업을 통해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물품들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정과 연결된 소비문화는 정서론이라는 정신적 환경과 산업생산이라는 물질적 환경이 맞물려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질문 3) 크리스천의 소비는 비크리스천의 소비와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할까요?
☞ 비크리스천의 삶의 목적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데 있는 반면, 크리스천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삶의 일부인 소비도 비크리스천은 자신의 즐거움과 필요를 목적으로 하는 반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egocentric) 소비는 본성을 따라가면 되지만 신중심적(theocentric) 소비는 본성에 제동을 걸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가능합니다.
질문 4) 물질을 사용할 때 ‘누릴 자유’와 ‘절제해야 할 책임’ 사이에서, 크리스천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이 기준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표현하는 제유법적 표현으로, 탐욕에 기울지 않으면서 인간의 필요와 건강한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정도의 물질을 뜻합니다. 검소하면서도 맛있는 음식, 일상 업무에 필요한 자원, 건전한 문화 활동에 필요한 재료 등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범주 안에서는 물질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으나 이 범주를 벗어나 탐욕 충족을 위한 물질 추구는 절제되어야 합니다.
질문 5)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 “이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단정히 행하고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2)는 말씀은 소비 생활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신용카드 구매도 단정해야 하며, 과도한 구매로 신용카드가 정지되는 등의 사태를 피해야 합니다. 두 가지 원칙을 지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로, 한 달에 쓸 총액을 정하고 신용카드에는 한 달에 한 번 그 총액만 넣고, 그 이외의 수입은 신용카드 연동이 안 되는 적금 통장에 예치합니다. 둘째로, 신용카드에 넣어 둔 한도 안에서만 구매합니다.
질문 6) 요즘은 현금보다 카드나 간편결제를 사용하다 보니 실제로 돈을 쓰는 감각이 많이 무디어진 것 같습니다.
☞ 제가 아는 어느 기독교인 경제학 교수는 지금도 전혀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현금으로만 소비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조금 극단적이고 반문화적이라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 동기는 눈여겨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 교수가 현금만 사용하는 이유는 자신이 구매할 수 있는 한계를 시각적으로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계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한계를 인식하는 데 한층 더 세심한 주의와 계산이 필요합니다.
질문 7) 많은 사람이 “이건 꼭 필요해서 샀다”고 말하지만, 돌아보면 충동구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소비가 반복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충동구매는 어떤 물건을 보고 그것을 소유하고 즐기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소유와 쾌락에 대한 인간 욕구의 특성은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제약된 환경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은 이성적인 계산을 통해 한계를 설정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필요라고 합니다. 사람이 욕구에 집착하게 되면 이성적 판단 능력이 급격히 둔화되어 계산이 안 됩니다. 충동구매가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질문 8) 충동구매를 줄이기 위해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알려 주세요.
☞ 첫째로, 구매 충동이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무조건 그 자리에서 구매하지 않고 하루 정도 뜸을 들인다는 원칙을 세워 놓는 것입니다. 구매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감정이 많이 실렸다는 뜻입니다. 감정은 솟아오를 때는 강력해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게 되어 있습니다.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이성적인 계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둘째로, 성령께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도록 잠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질문 9) 소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낸다는 것은, 일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는 말씀에서 ‘보물’은 ‘소비’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소비는 크리스천의 마음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을 향하여 드러내는 창(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중적입니다. 특별 은총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교회 운영과 선교 활동, 그리고 구제를 목적으로 한 소비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가정과 직장, 학교 그리고 국가기관을 위한 소비는 일반 은총으로서의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드러냅니다.
질문 10) ‘가치 소비’, ‘착한 소비’, ‘나눔 소비’ 같은 흐름이 소비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 사랑의 대강령 후반부(마 22:39)는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라는 요청입니다. 황금률(마 7:12)은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앞서 언급한 소비 행태들은 사회와 환경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여 소비를 절제하고, 소비 방식을 바꾸거나, 자신의 소비를 이웃과 나누려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비라는 구체적인 영역 속에서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며, 크리스천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 볼 만한 소비 태도입니다.
질문 11) 크리스천은 어떤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의 소비를 돌아봐야 할까요?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이 두 말씀은 크리스천이 추구해야 할 근본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합니다. 크리스천은 삶의 목표가 물질의 향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안녕에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면서 항상 새롭게 행동 방향을 조정해야 합니다.
질문 12)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행복한 소비는 무엇인가요?
☞ 관건은 ‘잘 사는 것’과 ‘잘 쓰는 것’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으로부터 ‘잘 쓰는 것’을 분리하면 금욕주의에 빠지고, ‘잘 쓰는 것’만을 ‘잘 사는 것’으로 보면 유물론에 빠집니다. 시장에 나오는 모든 상품은 하나님의 문화 대명령(창 1:28)의 선한 결과물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실현하는 일을 돕고, 이웃과 향유의 즐거움을 나눈다는 목적을 분명하게 설정하고 소비한다면 행복한 소비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