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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현대 미술 노트 ;; 진 로버트슨/크레이그 맥다니엘 作
언어 ; 최근의 언어 이론 中 발췌
"언어의 의미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성가신 질문의 분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많은 학자와 철학자, 언어
학자를 비롯해 최근에는 미술가와 미술사가, 미술비평가에 이르기까지 언어 및 기타 기호 체계를 구조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결론은 언어의 의미가 시스템이라는 언어의 조건에서 기인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관점은 언어적 형식에 선행
하는 의미는 없다고 단정한다.
해당 언어의 의미는 문법 규칙이나 다른 단위와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의미 단위처럼 언어의 관습 체계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게임을 배우는 것은 적절한 규칙을 익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언어를 '게임'이라고 강조한 오스트리아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게임의 각 요소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처럼 단어의 명칭을 아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말하는지'를 아는 데 충분
치 않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의미를 수행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을 따라 학자들과 비평가들은 온갖 분야의 지적, 창조적 노력에 기호학적 분석을 적용시켰다.
문화 안에서 미술이 생산되는 방식도 그 중 하나다. ;; '기호'라는 것은 결국 일종의 '약속'이므로.
'언어'가 '의사전달'이라는 본래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존재하는 '문화'안에서 해당 언어에 대한
규칙성/관습성이 정립되어 있어야만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근본적인 믿음이 의문에 부쳐졌다.
언어는 더 이상 사상의 순수한 운반체가 아니다
(여기서 사상은 그 진실성이 언어 외부의 현실에 입각해 평가되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이다.).
대신 언어를 의미의 구조화된 네트워크와 추상적 상징(글자, 단어, 문장부호 등) 네트워크 그리고 그 상징을 이용하는
규칙으로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존재한다.
언어는 사상이 그 속에 구현된 문맥으로 읽히게 되었는데 이때 문맥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언어학/기호학에 의해서 언어는 ;의미'라는 가장 큰 중요성이었던 성질을 잃었고,
이 두가지 학문은 언어를 마치 모종의 수학 공식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음성과 단어의 결합, 단어가 더 큰 의미 단위와 결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문법 규칙과 구문같은 언어의 구조는 인간
조직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구조화 되지 않은 진정 순수화된 '언어'는 사회화 되지 않은 언어인가?),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같은 햑자들은 언어의 가장 근원적인 구조는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개념을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새가 태생적으로 날 수 있듯이 언어를 배우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모든 언어가 기본적인 특성을 공유하며, 인간의 뇌가 진화를 통해 어릴 때 배우는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의 구조가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상 수많은 언어가 존재했으며 오늘날 사용되는 언어 또한 마찬
가지다.
어떤 언어에나 많은 방언이 존재하고, 특정 언어를 구사하는 개인은 각기 말하는 양식이 다르다(영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음이나 어휘 선택은 달라진다).
언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는 어떻게 구조화되는가, 언어가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를 어떻게 특정짓는가, 언어는
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어떻게 구분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서 언어는 인간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와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방식에 있어 중심 요소다.
인간의 사고 과정에서 언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작가들이 주제의 대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언어는
미술의 풍부한 소재로 떠올랐다.
언어의 말하는 방식이나 표기법이 달라도,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언어'의 특징은 여러 언어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안에 내장된 '언어의 근원' 적인 것을 유추활 수 있는가?
....
의미가 문맥과 보는 이의 관습적 지식에 따라 변화한다는 기본 개념은, 보디랭귀지나 상품의 약호화된 배치, 포장처럼
언어와 유사한 시스템을 분석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일상용품도 정체성과 명성, 섹슈얼리티 및 기타 숨겨진 의미를 전달한다.
하워드 싱어맨이 지적하듯 "언제나 똑같은 복제물인 옷, 차, 컴퓨터라는 연쇄의 일부는 필연적으로 합리적이고 차별
적인 교환 체계로 포섭된다.
이 체게는 보드리야르가 언어의 교환에 대한 반영이나 모방이 아니라 정확하게 동일한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소비되는 것은 물질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그 차이, 즉 기호로서의 사물인 것이다;"
특정 품목의 옷을 소비하는 행위는 특정 사회 시스템이 지닌 패션 규범과 의미를 소통하는 것이다.
다양한 부류의 작가들이 제스처나 깃발 도표 지도 방향 표시, 소비문화 속 기업 로고의 기호학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일로나 그라넷과 애슐리 비커턴, 맷 멀리컨, 하임 스타인바흐등이 대표적이다.
일레인 라이첵의 작업은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TEXT를 재구성하기"를 주된 것으로 삼은 것이다.;
강력한 권위주의릐 바탕이 되기도 하고 도한 권위주의적이기도 한 남성작가들의 작업물에서 나타난 text를 여성성이
대표격인 자수로 재구성하여 새로운의미와 감각을 도출해냈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순전히 문화적 교육의 소산인가?
부족 문화는 정밀한 기술이 없지만, 언어학 연구는 부족 언어도 여느 언어처럼 언어적인 복잡성 측면에서 정교화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아이들처럼 언어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발달시키는 우리의 놀라운 능력, 이를테면 한 번도 들어본적 없는 의미 있는
문장을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은 언어 습득이 온전히 문화적인 훈련의 결과라고 단언하는 어떤 이론과도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인문학과 예술에서 문화만을 거의 전적으로 강조하는 태도와 이에 수반되는 자연의 중요성에 대한
무시는, 정신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기능하는지를 탐구하는 과학 문파인 인지과학의 실험 겨로가에 의해 도전받을 수
있다.
공간성과 물질성 中 발췌
지난 세기 동안 많은 시각 예술가와 그래픽 디자이너, 실험적인 시인들이 언어를 순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용했다.
대신 그들의 언어는 공간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눈은 공간구성을 여러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시선을 던지고, 언어의 엄격한 선형성은 폐기된다.
공간성이 강한 작품에서 언어는 처음에는 전체 구성이 한 요소로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에야 내용으로 읽힌다
(구체시와 보더니즘 그래픽 디자인 또한 언어를 공간적으로 구성한 예다).
분절을 적절하게 함으로써 '일반적인(이것은 규범적인 이라고 읽어도 무방하다)'단어의 순차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러한 text는 구체시와 text디자인의 '공간성'과는 약간 다르다.
text디자인은 text자체를 디자인적 요소, 즉 도형적 요소로 생각하여 그 공간적 구성이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배치되도록
하는데에 주력(물론 단순한 공간적 요소 뿐만이 아니라 의미를 담기도 한다)하고 있고,
구체시와 같은 새로운 시의 장르는 단어를 분절하기보다는 시의 형태 자체에서 의미를 도출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가예술가들은 제작에 사용하는 매체나 취하는 형태, 심지어 글자 크기에 따라 어떻게 언어가 다른 함의를
품게 되는지 탐색해왔다.
개념미술가 비토아콘치는 「온오애 댜헌 노트」에서 서로 다르게 이용되는 언어의 두 가지 규모를 대조했다.
"페이지에 적혀 있는 언어는 작은 언어고, 대형 광고판에 쓰여 있는 언어는 큰 언어다.
작은 언어는 독자를 그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뒤얽히고 과도하게 구성된다."
아콘치에 따르면 언어는 물리적인 형태, 즉 사물로서 우리가 언어를 바라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콘치는 투명성 개념과 언어의 물리적 크기 사이의 관계를 이론화했다.
"큰 언어는 언어의 요소로 구성된 그림이기 때문에 언어라고 보기 어렵다.
큰 언어는 사물이 되지만, 이때 사물이 반드시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물성은 언어를 견고하게 만들지만 그 과중에서 언어를 파괴한다.
다시 말해 언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투명한 상태로 남아 세상을 본래대로 두어야 한다.
딱닥해진 언어는 사람에서 언어로, 언어에서 세계로 흐르는, 언어의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한다."
의미보다는 시각적인 효과를 의도한 것이기 때문에 광고판 등에 사용되는 언어는 반투명한 성격이 더 강한 것 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언어'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text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 어찌보면, 광고판의 언어는 '읽는 것'이라는 행동을 강조하여 그 이후의 부차적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text일
것이다.
'큰 언어'에 대한 아콘치의 정의는 <이름을 부르는 의자>라는 조각에서 익살맞게 표출된다.
약 1.2 미터 높이의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는 'Ass(엉덩이)'라는 단어의 철자를 구현하는데, 'A'는 의자의 등받이를
이루고 두개의 소문자 's'는 다리 옆면을 구성한다.
이 의자 조각에 안즌ㄴ 관객은 단어의 언어적, 시각적 의미를 육화하게 되는 셈이다.
...
작가들은 언어의 물질적 특서을 일차적으로 강조하는 창의적 왜곡을 통해 글자나 단어를 가림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텍스트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도록 한다.
;앞 소제목의 내용 발췌> 언어의 물질적 특질은 언어가 문법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풍부하게 만들어주거나 수정하면서
의미의 또다른 운반체가 된다.
… '읽히기도 하는 동시에 의식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시각적이면서 언어적으로도 작용하는 이러한 단어들은 반투명
성의 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반투명성은 언어적 강조와 시각적 강조 사이의 균형이나 변동을 의미한다.
진 로버트슨과 크레이그 맥다니엘의 『테마 현대미술 노트』(2011, 두성북스, 2만9500원)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미술을
매우 효율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찾아냈다.
이 책은 1980년부터 2008년까지 최근 30년 사이의 미술을 다루고 있다.
이 30년은 역사라고 하기엔 너무 짧고,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진 시기다.
책은 30년 사이에 벌어진 미술사 안팎의 주요한 사건을 정리하는 일로 시작한다.
기존 매체의 번성 속에서 새로운 매체의 발전, 세계화와 더불어 다양한 문화적 지형도의 형성, 포스트모더니즘 등
이론의 막강한 위력 행사, 미술과 문화의 융합 등이 그들이 주목하는 현상들이다.
저자들은 미술 사조에 의한 분류 대신 정체성·몸·시간·장소·언어·과학·영성이라는 일곱 가지 주제로 현대미술의 흐름을
정리한다.
사조 중심 혹은 매체 중심으로 정리하는 것이 흡족하지 않을 만큼 현대미술은 복잡하게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매체와 형식이 새롭게 등장할수록 내용은 중요해진다.
각 주제와 관련된 이론적인 논의를 요약하지만, 저자들은 작가들의 실천을 이론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저자들은 이론가들의 발언만큼, 실제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와 작품을 하는 작가들의 실천적인 발언을 많이 인용
한다.
책의 목표가 현대미술의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개 양상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디애나-퍼듀 대학 헤론미술디자인 학교의 교수인 저자들은 학생들에게 방대하고 난해한 현대미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이 책을 썼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책은 발간 당시 “현대미술 입문 강좌에서 최고의 교재”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예로 드는 작품에 대한 풍부한 언급들은 단순한 입문서를 넘어서게 한다.
책에서 다루는 일곱 주제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그 함의가 달라
지기도 할 것이다.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주제인 ‘과학’과 ‘영성(spirituality)’이다.
과학과 미술은 언제나 살을 맞대고 발전해왔다.
예컨대 1967년 설립된 MIT의 첨단시각연구센터(CAVS)는 오토 피네(Otto Piene), 토드 실러(Todd Siler) 같은 과학과
깊이 연루된 미술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저자들이 미술과 관련해 주목하고 있는 과학 분야는 생물학이다.
이에 기반한 바이오 아트(Bio Art)의 발전에 대해 저자들은 많은 관심을 보인다.
과학은 예술의 미래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미술에 기술적 발전과 새로운 영감을 주고, 예술은 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인간적인 문제에 답을 주는 오랜
협업 관계는 지속될 것이다.
이 균형적 관계를 염두에 둔 주제가 바로 ‘영성’이다.
마지막 장인 ‘영성’은 이 책의 가장 개성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영성’이란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속하고자 하는 통상적 갈망이나, 삶의 근원과 죽음의 본질을 알고 싶은 욕망, 우주에 작용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해한 힘에 대한 인정 같은 것”을 의미한다.
키키 스미스, 로버트 고버, 제임스 터렐, 게르하르트 리히터, 볼프강 라이프, 아니쉬 카푸어, 아그네스 마틴 등의 작가
들이 거론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맹위를 떨치는 동안 예술은 다양한 지배 구조를 해체시키는 전략의 일환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누락되었던 것이 바로 ‘아름다움’과 저자들이 말하는 ‘영성’의 추구라는, 예술 본연의 기능이었다.
명백하게 특정 종교와 관련을 갖지 않더라도, 결국 작가들이 ‘영성’이라는 주제에 끌리는 이유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저자들은 미술에서 ‘영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주요한 배경을 전쟁·테러·환경문제 같은 인류를 위협하는 재앙의 발발
이라고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수지 개블릭(Suzie Gablick)은 91년 이미 “일종의 영적 치유를 거치지 않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난장판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에 대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저자들이 본격적인 화답을 하게 된 것은 9·11 테러 이후 미국 문화의 자기 반성과
집단적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래의 예측에서 매우 유보적인 태도를 보임에도 저자들은 “인간성의 가장 깊은 측면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힘”, 즉 ‘영성’의 힘을 미술에서 다시 찾기 시작한다.
미술이 가진 휴머니즘적인 측면을 다시 부각시킴으로써 이 책은 지난 30년간을 정리하고 동시에 미래로 나가는 길을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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