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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이 ‘나는 아이입니다’입니다. 동일한 주제로 세 번째 설교입니다. 아마 같은 주제로 이렇게 반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제가 왜 또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또 말씀을 선포하려고 할까요?
이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그 아이가 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2013년에 제가 설교하고 또 2014년에도 설교하고 이제 11년 만인 2025년에 오늘 또 설교합니다. 설교하는 주된 이유는 그 아이가 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등장했다는 건 두 가지 의미예요. 첫 번째로는 그 사람에게 또 이 아이가 등장했다는 의미인 거죠. 그러니까 예전에 등장했던 어른아이 성인 아이가 또 동일한 성도에게 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사람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똑같은 아이가 또 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우리 공동체에 출몰했던 그 아이가 다시 우리 공동체에 또 가정에 출몰했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아이를 우리는 보통 성인 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성인 아이라고 해서 이렇게 좋게 표현해서 부르잖아요. 성인 아이 되게 이렇게 좀 좋은 의미처럼 보이잖아요. 그리고 이 단어를 들으면 되게 착한 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근데 이 성인 아이는 전혀 착한 아이가 아닙니다. 겉은 어른인데 보이는 모습은 성인인데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입니다. 문제는 이 아이가 생각보다는 난폭하다는 거예요. 흉악스럽기도 하고 무섭고 그리고 소름 끼치기도 합니다. 때론 이 아이는 칼로 부모를 찌르기도 하고 불을 지르기도 하고 가구를 다 부수기도 합니다. 때로 이 아이는 쉬지 않고 욕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죄책감 없이 나쁜 짓을 하기도
아무렇지 않게 악한 일을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로 아이라는 이렇게 단어를 들으면 착하고 귀엽고 이렇게 연상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어른아이 그러니까 어른들 속에 있는 아이, 성인 아이는 귀엽거나 착하지 않다는 거예요. 이 아이는 무서운 아이이고 파괴적인 아이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일을 엉망으로 망칠 수 있는 아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쓸모없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해요. 많은 일들을 이 아이가 등장하면 쓸모없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의 수고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고 교회 목회자들의 수고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고 이 아이는 등장해서 주변에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가차 없이 잘 파괴하는 아이입니다.
제가 두 번에 걸쳐 오늘 세 번째 설교라고 그랬죠. 두 번에 걸쳐서 소개한 성인 아이가 여러 종류가 있어요. 분노하는 아이, 화내는 아이죠. 기다리지 못하는 아이, 인내심이 없는 아이, 상처받은 아이, 그리고 핑계하는 아이, 그리고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 여러분 이 성인 아이가 요 정도 종류만 있으면 그러니까 나름 우리가 좀 잘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외에도 성인 아이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미숙한 아이, 자기 중심적인 아이,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아이, 거짓말하는 아이, 중독에 빠진 아이, 몸이 아픈 아이, 의존하는 아이, 인정받고 싶어하는 아이, 열등감에 빠진 아이, 폭력적인 아이, 자기를 학대하는 아이 등 수많은 성인 아이가 여전히 우리 공동체 안에도 있고 여전히 내 안에도 있습니다.
요즘은 정말 좋은 정보들을 쉽게 접할 수 있어요. 저도 그렇지만 제 주변에 보면 이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젯밤에 아내랑 대화를 나누면서 여보 내가 원래는 좀 책을 많이 읽어야 되겠다. 내가 몇 년 사이에 책을 읽는 지에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런 대화를 좀 나눈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책이 아니더라도 몇 권의 책을 요약해 놓은 좋은 정보들이 많이 있고 또 쉽게 접할 수 있고 예전에는 세미나를 참석해야 들을 수 있다면 지금은 온라인으로 다 접속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좋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책이라는 이 매체를 잘 우리가 사용하지 않게 돼요.
근데 알아야 할 것은 책을 읽었을 때 우리의 기억 속에 남고 그리고 내 삶에 작용하는 그 작용들과 영상이나 기타의 어떤 수단으로 그런 정보를 얻었을 때는 많은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독서는 큰 유익이 있습니다.
제가 몇 분 성도에게 말씀드렸지만 올해 읽어야 될 독서가 조만간 정해지고 주부를 통해서 공지가 될 거예요. 그럼 저희가 여러분이 못 사면 교회에 구매해 놓고 교회 올 때마다 이렇게 구매하셔서 1 29 도록 할 것이고 또 개인이 구매할 수 있으면 구매하셔서 읽도록 이렇게 권면하는 일이 있을 겁니다.
최근에 제가 다른 매체들을 통해 접한 정보입니다. 요즘 SNS가 되게 발달됐잖아요. 근데 SNS에 잘 특화된 아이가 하나 있는데 성인 아이가 있는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예요. 그러니까 SNS 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 또 그것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속에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다는 겁니다.
근데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인정받고 싶어 해요. 그리고 적당한 인정은 신앙생활이나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돼요. 문제는 인정 중독인 거죠.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기능도 그 기능이 너무 강조가 되고 너무 의미가 확대가 되면 중독 현상이 일어나요. 그래서 비물질 중독 중에 인정 중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정의 욕구가 너무 과도해서 인정을 의존하게 되면 인정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인정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인정을 받으면 크게 기뻐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지나치게 기분을 나빠한다는 거예요. 인정받으면 조금 좋고 또 인정을 못 받으면 좋은 나쁜 건 일상적인 거지만 이게 너무 치우친 거예요. 인정을 받았을 때 너무 좋아하다가 인정을 받지 못하면 너무 나빠 기분이 나쁜 그런 상태를 인정 중독이라고 합니다.
인정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삶의 모든 의사결정을 자기가 주체적으로 말씀에 의해서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서 결정을 하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의해서 자기의 삶을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이 사람에게는 자기가 없는 거죠. 자기만 없고 타인의 평가만 남게 됩니다.
특별히 10대들 10대들에게는 더 강력한 인정 중독의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청소년기에는 타인의 인정에 더 많은 쾌감을 느낀대요. 그러니까 타인이 타인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 더 많은 이렇게 호르몬이 분비가 되는 거예요.
10대들에게는 그래서 10대들이 특별히 중독의 잘 빠지는 이유인 거예요. 그러니까 과하게 분배되는 나이가 들면 그 인정을 받아도 그 쾌감이 크지 않아요.
근데 10대들은 이 쾌감이 엄청 커요. 그래서 작게 칭찬해 주고 작게 격려해 주는 것을 큰 의미로 받아들이고 호르몬도 크게 반응하기 때문에 이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면 10대들이 중독 증세의 증상이 중독에 많이 빠지게 되는 겁니다.
문제는 문제가 있어요. 그러면 칭찬이 마냥 쫓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지나친 칭찬은 오히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칭찬을 많이 받으면 좋으니까 칭찬을 많이 해줘라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근거가 없는 칭찬 지나친 칭찬 과대 포장한 칭찬은 오히려 칭찬을 듣는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나요? 사람이 칭찬을 들으면 안정적이 돼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도 문제일 수가 있고 지나치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칭찬 지나친 칭찬은 자녀들이나 성도들을 인정 중독에 빠지게 해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인정해 주면 열심히 일을 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일을 내팽개치고 인정해 주면 막 행복해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불행하게 하는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칭찬을 하되 근거가 있고 행복해하는 칭찬을 하되 근거가 없는 지나친 과대 칭찬은 정말 조심하고 주의해야 돼요.
여러분 부모들이 자녀들을 막 칭찬하고 키웠잖아요. 근데 애들이 좀 이상해요. 키우고 나니까 막 다 잘한다고 그랬는데 그게 잘못된 거였어요. 그래서 칭찬을 칭찬도 조심해야 된다
그러면 솔직히 저도 약간 칭찬받으면 되게 행복하거든요. 저 여기도 보면 없잖아 칭찬 중독 현상이 조금은 있어요. 과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있어요. 그래서 칭찬을 받으면 더 하려고 하고 심지어 어떤 일은 칭찬받기 위해서 계속하는 것도 있고 등등 저에게도 약간 증세가 있고 우리 성도들에게도 증상이 있고 또 요즘 그런 성인 아이가 막 여러분에게 등장하고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지금 우리 인정 중도본 저나 여러분이 해결해야 될 문제인 거예요.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요?
첫 번째로는 사랑하고 존중하는 거예요. 되게 이상하죠. 성경에는 성인 아이 어린아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이미 기록되어져 있어요. 13절입니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인정 중독은 자신이 타인의 평가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을 인정 중독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면 인정 중독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이 자료를 이렇게 보다가 깜짝 놀란 게 하나 있어요. 아마 여러분도 듣거나 보셨을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청년들이 이렇게 취업할 때 면접을 보잖아요. 어떤 사람이 면접을 잘 볼까 그러니까 면접관을 존중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면접을 잘 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면접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 내가 잘 보여서 내가 시험에 꼭 합격해야지 면접에 합격해야지라고 여기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면접관을 존중하는 사람 저 사람이 저렇게 열심히 해서 저 자리에서 면접을 보는 자리에 있네. 나도 열심히 일을 해서 저런 자리라도 가야지라고 면접관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면접을 훨씬 더 잘 본다는 거예요.
인정받으려고 하면 관계가 깨어지지만 사랑하고 존중하면 건강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정 중독의 해결 방법은 내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정 엄마 아버지를 존경하면 자녀들이 있는 인정 중독의 현상은 사라져요.
여러분이 목장 교회를 다니면서 제가 훌륭하진 않죠. 그렇지만 어쨌든 이 교회의 리더로 있으니까 저를 존중하고 사랑하면 여러분에게 있는 영적인 종 인종 중독의 증세도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를 여러분 스스로를 인정받아야 되는 대상으로 보지도 않고 또 저를 여러분에게 인정하는 자로 보지도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 나는 저 목사님이 좋고 존경한다 이렇게 관점으로 보게 되니까 굳이 인정받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인정 중독을 해결하는 방법은 사랑하고 존중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고도 남편에게 인정받은 아이 아내가 있기도 하고요. 또 어떤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자녀들이 있어요. 자녀들 입장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데 아니라는 거예요.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 오히려 더 행복한 삶이라는 거예요
인정을 받아서 행복한 것보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고 합니다. 인정 충독을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겁니다. 참 수없이 들었던 말이죠.
여러분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더라고요. 그 꿰면 다 여러분과 저도 이미 다 들었던 말이고 다 아는 말인데 꿰어서 내지를 못했던 거예요.
여러분 대부분 인생의 문제점은 내 주변에 있어요. 해결제는 내가 깨어가지고 내 것으로 삼으면 다 해결돼요. 근데 우리에게는 이것을 꿰는 능력이 지혜가 부족해서 못 깨는 거죠.
제가 지금까지 한 이 말 중에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한 게 뭐가 있어요? 들어보지 않았던 게 뭐가 있나요? 다 들어본 거잖아요. 근데 우리가 잘 깨워서 내지 못했던 겁니다. 인정 중독을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을 인정하는 거예요. 남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우면 자기를 인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타인을 인정하기가 되게 어려워요. 생각보다 그렇죠 그러면 자기를 인정하라는 거예요.
자기를 왜 그럴까요? 왜 왜 타인을 인정하기 어려우면 자기를 인정하라고 할까 타인에게 인정받기 어렵고 타인을 인정하기 어려우면 왜 자기를 인정하라고 할까요?
여러분 우리의 뇌가 되게 이렇게 바보예요. 여러분 이미 들었죠? 가짜로 웃는 것과 실제로 웃는 것이 뇌는 큰 차이 없이 받아들여요. 마찬가지로 뇌는 나와 타인에 대한 정보 처리가 거의 일치한대요. 별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타인에 대한 것과 나에 대한 것이 그러니까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니까 나를 존중하면 곧 타인을 존중하게 되고 나를 사랑하게 되면 곧 타인을 사랑하는 것으로 너는 그렇게 이해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정 중독을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부정하면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게 되고 나를 부정하면 곧 타인을 부정하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와 타인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등장해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일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사역도 그만두고 신앙생활도 그만두고 심지어 삶까지도 포기합니다.
혹 여러분의 아내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아이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이 막 좌우되지는 않나요?
누가 조금만 잘해주면 너무 행복해하다가 누가 조금만 못해주면 너무 불행하고 여러분 우리 삶이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하나님은 내 힘든 삶을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외형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시험 걸리게 하셔서 넘어지게도 하시고 그러니까 외적인 좋은 상태를 굳이 좋아할 것도 아니에요. 그게 언제든 시험거리가 돼서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근데 중독에 빠지면 이런 복합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어떤 사고를 할까요?
되게 획일적인 사고를 하는 거예요. 인정받으면 행복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불행하고 나머지는 없어요. 나머지는 없어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를 그냥 두면 인생의 행복이 사라집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삶을 살게 되고요. 결국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행한 감정에 휩싸이게 돼요.
여러분 인생이 우리의 사역의 중심이 돼서는 안 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서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하나님께 합격점을 받기 위해서 예배하는 건 차이가 있어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과 그 사람에게가 칭찬받기 위해서 그 사람과 좋아하는 건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그래서 인정받는 건 가벼운 인정들은 긍정적이고 되게 좋은 효과를 가져오지만 지나치게 인정을 의존하는 것 중독 중세가 있는 규모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우리의 신앙을 많이 해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걸 버렸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버렸으니까 어른이 된 거예요. 장성한 후에는 아이의 일들을 버려야 돼요.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어린아이의 속성을 우리가 버려야 되는 거예요.
근데 나이가 들고 이미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 어린아이의 속성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이 아이를 활동하도록 우리가 방치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설교를 자세히 들으면 설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잖아요. 어떤 말씀으로 마무리 짓겠지만 여러분이 좀 고민해 보시라고 좀 생각해 보시라고 제가 하여튼 나름 전공을 살려서 말씀을 좀 이렇게 준비해 봤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버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 일들, 어린 아이의 일들을 신앙이 없었을 때의 일들을 자기 속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완전히 가치 없게 쓸모없게 좀 더 심하게 하면 다 박살 내서 사라지게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더 이상 이 어린아이가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 거예요. 어린아이의 일들로 인해서 어린아이 같은 성품으로 인해서 자기의 사역이나 삶이 괴롭지 않은 거예요.
예전에 예전의 무사들은 더 이상 칼을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힘줄을 잘랐어요. 죽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칼을 못 쓰도록 이 손이나 발에 있는 힘줄을 이렇게 탁 잘라서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동안은 이제 칼을 못 쓰는 거죠. 칼을 사용해 그래서 누군가를 죽인 일은 이제 그게 끊어졌으니까 더 이상 못하는 거예요.
마찬가지죠. 옛일 어린 아이의 일들을 지금 내 삶에서는 이제 쓸모없게 만들어 버려야 돼요.
이게 또 등장하고 그러면 또 우리는 어린아이 같은 삶을 또 살아가요. 근데 말했잖아요. 이 아이는 좋은 아이가 아니라 난폭한 아이라고요. 폭력적인 아이라고요. 교회도 얼마든지 망가뜨릴 수 있고, 가정도 얼마든지 망가뜨릴 수 있고, 한 개인의 삶도 얼마든지 망가뜨릴 수 있는 나쁜 아이라는 거예요.
영적으로도 똑같아요.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을 힘들게 했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여러분을 불행하게 했던 사역을 엉망으로 망치게 했던 성인 아이가 또 등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 안에도 혹 이런 아이가 또 등장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여러분의 가정에는 또 이 아이가 등장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가정이 성숙하냐 성숙하지 않느냐의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그 기준에 하나는 그 가정에 성인 아이가 있느냐 없느냐예요. 보세요. 부모가 아버지가 성숙하지 않으면 자녀가 성인 아이일 가능성이 되게 높아요. 그럼 부모가 고쳐져야 아이의 성인아이 기질도 고쳐지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자녀에게 모든 핑계를 대요. 내가 어려서 그 아이의 어린아이가 막 힘을 쓰고 막 폭력적이고 난폭하게 된 것인데 우리는 나는 책임이 없고 아이에게 다 덮어 씌우는 거예요.
저 아이가 문제가 있다고 그렇게 우리가 살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성인 아이를 그냥 버려두면 주변과 자신 사람들은 불행해지고요. 하나님의 일을 망치기도 하고요. 사랑하는 가족들을 힘들게도 합니다. 성인 아이를 그냥 버려두면 어쩌면 여러분과 저의 삶이 파탄이 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가정에 아픈 사람이 있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 때문에 이제 교회에 오지 못한 성도들도 있으니까 근데 이거는 정말 힘든 일이에요.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견디기는 하지만 힘든 일이에요. 왜냐하면 이 아이를 돌보다가 이 아픈 사람을 돌보다가 자기 인생이 없어지니까.
그런데 성인 아이도 우리에게 똑같은 경험을 주는 아이예요. 내 안에는 성인 아이를 관리하다가 내 인생이 다 허이 돼요. 한 번 더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어른의 모습으로 교회를 섬기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이 아이를 달래다가 평생의 시간을 다 써요. 조금 빛이죠. 조금 있으면 일을 안 하려고 하죠. 조금 있으면 또 이렇게 말하죠. 행동 조그마하면 어디 가서 막 자기를 포기하고 막 밤새 게임을 하고 살지 않는 이 아이 달래려고 평생의 시간을 다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가정에 중병이 걸린 가족이 있어서 그 가족을 키우다 보면 가족도 병이 들어요.
근데 우리 안에 있는 이 성인 아이를 우리가 돌보다가 어떤 경우는 남편 아내에 있는 성인 아이 때문에 아내가 병이 들고, 어떤 집안은 아내 아에 있는 성인 아이 때문에 남편이 병이 들고 어떤 집안은 자녀 하에 있는 성인 아이기 때문에 부모의 온 평생이 불행한 거예요. 이 아이를 다루다가 이 아이를 다루다가 이 나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평생 말도 되지 않는 일에 아무것도 아닌 일에 휩싸여서 시간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하고 열정을 낭비하게 됩니다.
낭비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망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성숙하지 않은 아이가 또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성인 아이가 등장하지 않고 있나요?
여러분 내 안에 성인 아이가 하나 있어요. 근데 이놈이 되게 독특한 게 얘를 방치하잖아요. 또 하나를 또 만들어요. 또 그대로 방치하잖아요. 또 한 놈 놈이라고 죄송합니다. 또 한 놈을 또 만들어요. 이제 어감을 좀 세게 해야 여러분이 잘 알아들으니까 또 이제 3명의 성인 아이가 있잖아요. 이 20명의 성인 아이는 또 한 놈을 또 만들어요. 더 나쁜 놈이니까 이거는 새끼죠 새끼. 그래서 처음에는 성인 아이가 하나였는데 나중에 둘이 되고 셋이 돼요. 엉망이 되는 거죠. 귀신 들은 것과도 똑같습니다.
귀신이 하나가 들면, 그리고 두 개 들었을 때와 3개 들었을 때 그 사람의 삶과 정신 상태가 달라요. 복합적으로 귀신 든 사람을 봤는데 이거는 장난이 아니에요. 다 파괴돼져 있어요. 모든 게 완벽하게 파괴되어져 있어요.
성인 아이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인 아이는 성숙한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성인 아이는 거룩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나이 많은 어른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필요합니다. 자기 삶에 있는 성인 나이를 극복한 성숙한 어른들, 자기 내면 속에서 날마다 자신의 감정과 신앙을 흔들어 놓는 성인 나이를 극복한 어른들이 교회는 필요합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이 성인 나를 극복하지 못하면 평생 나쁜 아이와 살아야 돼요. 얼마나 불행해요 이 나쁜 아이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도 엉망이 돼요. 이 나쁜 아이 때문에 성도들과의 관계도 엉망이 되고요. 이 나쁜 아이 때문에 자녀들과의 관계도 엉망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삶에 있는 나쁜 아이를 완전히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더니 성인아 일을 버렸더니 어른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공동체나 내 내면에 있는 이 나쁜 아이를 극복해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비전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고, 여러분의 가정도 하나님의 비전을 품을 수 있는 가정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사회가 이 성인 아이들로 골치를 아파요. 그러니까 시대가 품어지지 않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거예요. 이 민족의 혼란의 중심에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정치인들이나 사회 지도자 속에 다 자리 잡고 있어요. 다 자리 잡고, 그래서 어른 일을 못하는 거예요. 어른의 말도 못하고, 어른의 결정도 못하고, 어른의 대화도 못하고, 어른의 소통도 안 되고 안 되는 거죠.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거룩한 일을 멋진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기 때문이죠. 표현에 의하면 죽였기 때문인 거예요. 어린아이의 목숨을 끊어버렸어요. 자기를 괴롭히고 힘들어했던 과거의 자기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이 사도 바울이 어른의 일을 하면서 멋진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품으면서 그의 마지막 생명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목장 교회에 성숙한 어른이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싸우십시오. 그놈은 되게 나쁘다고 말씀드렸죠. 아주 나쁜 놈이에요. 싸우셔야 돼요. 80이 돼도요. 어린아이가 그대로 있는 분들이 많아요. 90이 되어도 어린 아이가 그대로 있어요. 심지어 더 늘어요. 나이가 든다는 건 되게 힘든 건데 이 아이가 더 느니까 더 힘들어요. 분명히 70대까지는 어린아이가 한 명인데 80이 되니까 둘을 대고 90이 되니까 셋이 된 거예요. 도대체 인생이 불행하고 막 다 막 힘든 거예요. 그분이 움직이면 집안이 난리가 나요.
자녀들이 막 고통스럽고 힘들어요. 왜요? 이 어린아이를 버리지 않았더니 어린아이가 많아진 거죠.
아무쪼록 여러분이 여러분 내면에 있는 이 나쁜 아이를 잘 싸워서 이기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