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교육부서 말씀일기 본문은 시편 71편 14-24절인데
어제 시편 71편을 통째로 올려서
오늘은 교회전체 말씀일기 본문인 욥기 8장을 정리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기독교 서점에 가면 책과 기독교용품들이 함께 있습니다.
수많은 용품들이 있는데,
그 가운에 가장 많은 구절이
욥기 8:7절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가게에 가보면,
가장 많이 보이는 액자나 현판이 ‘욥기 8:7절’입니다.
그런데 욥은 처음에 미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망했습니다.
갑자기 망한 욥이 ‘만일 하나님을 찾으면, 나중이 창대하리라’는 말은
그저 빌닷의 생각 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빌닷의 말을 타당한 말로 여기기에
욥기 8:7절의 성경구절을 벽에 걸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내 하는 사업이 비록 미약하게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창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는 사업이 잘 되어 대박이 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구절을 인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탐심을 성경구절로 포장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성공하면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전도도 잘 되고,
세상을 하나님 뜻에 맞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십일조와 주일성수 만이 아니라,
각양 감사도 해야 하고,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찾으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교회에 충성 봉사하였는데,
교회당 건물은 창대하고, 온갖 종교 사업은 번성하였지만,
과연 그렇게 헌신한 사람은 창대하여졌습니까?
세상의 썩어질 것의 창대함이 아니라, 그 영혼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까?
본문 20~22절.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빌닷의 결론입니다.
지금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죄가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악한 자는 붙들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 돌아오면
웃음이 네 입에 있을 것이며,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악인의 장막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빌닷의 말을 우리가 반박할 수 없는 것은
성경에는 빌닷과 말과 같은 내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과 오늘 본 욥기 8장의 빌닷의 말이 겉으로 보기에 같은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구별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하지만,
그렇지 않는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이런 악인들을 심판을 당하고 망하게 되지만 의인은 형통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시편 73편은 어떻습니까?
시편 1편의 말씀대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롭게 살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은 온갖 재앙과 고난을 당합니다.
반면에 악인은 얼마나 형통한지 날마다 소득은 늘어나고 죽을 때에 고통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고서 실족할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도 결론은 악인은 결국 졸지에 망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73편도 이해가 됩니다.
빌닷의 말이나 시편 1편도 겉으로 보면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닷의 말을 우리가 반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말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렇게만 해석하고 적용을 하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가 없게 됩니다.
자신이 복을 받거나 못 받거나, 영생을 받거나 영벌을 받는 것도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해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엘리바스의 말이나 빌닷의 말이나 소발의 말이 더 일리가 있게 들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죄인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88편은 아무리 부르짖고 간구하여도 여호와의 응답이 없습니다.
정말 죽게 되었다고 탄식을 합니다.
죽어버리면 더 이상 찬송도 할 수 없는데 왜 이렇게 내버려 두시느냐는 탄식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응답도 소망도 없이 이 시편은 그대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에 들어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런 말씀을 통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유 없이 고난당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죄 없이 죽으신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유일한 의인의 부르짖음을 끝끝내 외면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도록 버려 두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자신이 죄가 되어 죽으신 자리입니다.
이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논리나 정의개념으로 풀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들에게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베드로전서 2장 21~25절.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다’는 것은
‘죄 없이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는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이유 없는 고난’이 반드시 닥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우리가 원수를 갚지 않고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 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빌닷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면 ‘창대하리라’고 하였지만,
성경의 결론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창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이유 없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크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고난 가운데 주님을 더욱 바라보고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묵상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