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1. 공직자
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②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음
③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
④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침
2. 교육자
①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② 과거시험준비나 출세를 하기 위한 학문 풍토를 개선함
③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함
④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상을 확립함
⑤ 제자를 사랑하는 올바른 스승상을 정립함
3. 문학자
①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4. 사상가
①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②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과 독자성을 정립함
③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줌
5. 생활인
①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② 합리성을 존중하여 현실에 맞는 예법을 시행함
③ 한 평생 '경'의 태도를 실천하여 인격자의 모범을 보여줌
④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함
조선의 대표적 학자이자 율곡 이이 선생은 덕수 이씨(德水 李氏)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일곱 남매 중 셋째 아들로, 중종 31년(1536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율곡 선생의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이에 얽힌 이야기가 강원도 평창의 판관대와 봉산서재에 전해지며, 어렸을 적 이름도 현룡(見龍)이라 하였고 선생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불렀다 한다.
선생은 어린 시절을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보냈고, 6세 때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후 선생의 집안이 있는 파주를 자주 찾았던 것 같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3세에 글을 읽었고, 8세 때 화석정시(花石亭詩), 10세 때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 13세 때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선생이 16세였던 1551년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를 공부했으나 1년만에 하산하고, 글공부에 전념했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해 첫부인을 얻었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한 후 아홉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 병조, 형조,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율곡 선생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런 학문 경향은 정치 경제 교육 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사창(社倉) 설치, 대동법 실시, 십만양병설 주장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 선견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선조 17년(1584년) 음력 1월 16일 48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법원읍 자운산 기슭, 현재의 자운서원에 묻혔다.
저서로는 학교모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 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으며,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인조 2년(1624년)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숙종 7년(1681년) 문묘에 배향되었다.
율곡 선생과 관련이 깊은 지역은 모두 세 곳이 있다. 그중 첫째가 경기도 파주, 둘째는 강원도 강릉, 셋째는 황해도 해주의 석담이라는 곳이다. 경기도 파주는 대대로 율곡 선생의 집안이 자리를 잡아 살던 곳이다. 현재도 화석정, 자운서원 등 율곡 선생과 관련된 유적이 있다.
강원도 강릉은 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6세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현재도 오죽헌과 송담서원이 남아 있다. 해주의 석담은 율곡 선생의 셋째 부인의 고향이다. 율곡 선생은 아들을 얻지 못해 부인 셋을 두었는데, 셋째 부인이 첫 아들을 낳았고 이어 둘째 부인이 둘째 아들을 낳았다. 첫 부인인 곡산 노씨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일찍 죽고 더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율곡 선생은 이중에도 파주와 석담을 좋아했던 것 같다. 시간이 날 때면 파주와 석담을 들렀으며 대부분의 학문 연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이이 선생의 호인 율곡(栗谷)과 석담(石潭)은 각각 이 두 지역의 지명을 그대로 딴 것이다.
< 율곡이이선생의 일화 >
1. 율곡이 관직에 있을 때는 그런대로 녹봉을 가지고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 해주에서 100명이 대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식량이 떨어질 경우도 있었다. 율곡의 남녀 형제들에게는 파주에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있었는데, 율곡이 31세로 이조좌랑이 된 겨울에 남매가 모여앉아 각기 분배 상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100여 식구의 생계를 꾸려가는데 충분하지 않았다.
이항복이 문집에서 밝힌 것에 의하면, 율곡은 해주에 살면서 대장간을 세우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였다고도 하는데, 그 역시 대식구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지라 해주 석담으로 와서는 점심을 들지 않았다. 제자들이 까닭을 물으면 양식이 떨어져서 하루 한 끼만 먹으려 한다고 하였다. 딱한 사정을 안 어릴 적 친구 최립이 재령 군수로 있을 때 쌀을 보낸 적이 있는데 받지 않았다. 자제들이 양식이 떨어졌는데 거절하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하였다. "나라의 법에 장죄(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부정하게 재물을 탐한 죄)가 심히 엄하여 받는 자도 동일하게 처벌한다. 우리나라의 수령이 나라의 곡물 아니고서는 다른 물건은 없다. 그러니 무릇 수령이 주는 것은 모두 받아서는 안된다. 최립은 어릴 때 벗이니 만일 자기 집의 재물로 구제해준다면 어찌 받지 않을 이치가 있겠느냐."
2. 4번의 판서를 지냈으나 청렴하여 사후에 남긴 재산이 없어 염습을 친구들이 부조한 수의로 하였으며, 서울에서는 항상 집을 세내어 살았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이 거처할 곳이 없어 친구와 제자들이 집을 사서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
출처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