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17년 ~ 1918년)
1917년,
쑨원은 중화민국의 국회와 약법의 복구를 외치며 서남군벌과 연합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반대하는 북양군벌이 강경하게 진압하며 호법전쟁을 일으켰다. 장작림은 북양군벌의 편에 서서 호법전쟁에 가담하여 북양군벌 내부에 입지를 다지고 회군하였다. 다음 해 그는 대총통 쉬스창에 의해 동북3성 순열사로 임명되었다.
1917년 러시아는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키고 전제정치를 무너뜨리고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사회주의로 재탄생한 러시아는 막강한 힘으로 조선 독립운동에게 약주고 병을 주었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결성되어 1925년 고려인들이 무장해제를 당하기 전까지 그리고 1937년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구축될 때 까지 소비에트는 고려인들을 이용하며 감탄고토(甘呑苦吐)를 반복하였다.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소비에트공화국은 독립운동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누는 분수령이 되었고 1940년 말에 연해주에 항일연군을 받아들이고 해방이후 북한 정권 탄생시켰으며 1950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발휘하여 왔다.
1917년 9월까지 북간도에 정착한 조선인 1,427세대가 귀화허가증을 받았으며 2,111세대가 귀화입적 수속을 밟는 중이었다.
❰용정촌조선인민회❱가 용정총영사관 산하에 세워졌다.(8,487명)
❰투도구조선인민회❱가 투도구분관 산하에 세워졌다.(6,667명)
1917년 11월에 조선예수교장로회 함북노회가 조직회로 용정예배당에서 모였다. 회장에 부두일(William R. Footel) 선교사 부회장에 김내범 목사, 서기에 채필근 전도사, 회계에 매도날 (D.A. MacDonald) 선교사가 뽑혔다.
1917년에 세워진 학교는 ❰북일학교❱, ❰원동학교❱, 연길현 구세동의❰숭신학교❱, 연길현 국자가의❰숭신학교❱, ❰광신학교❱, ❰기독교의숙❱, ❰진동학교❱, ❰용지학교❱, ❰협성학교❱, ❰영생학교❱, ❰흑정자학교❱, ❰태흥학교❱, 왕청현의❰계동학교❱, 훈춘현의❰밀강학교❱가 있다.
1917년에 세워진 교회는 ❰낙원동교회❱, ❰무봉촌교회❱, ❰청산리교회❱, ❰영신동교회❱, ❰낙타하교회❱, ❰소홍기하교회❱, ❰송전동교회❱, ❰장성촌교회❱ 총 8개 교회이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청산리교회와 영신동교회를 두 개로 기록하지 않고 청산리 영신동교회로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보면 구룡평교회와 명월구 제흥교회가 설립되었다.
1918년, 해란강에 다리가 놓였다. 나무다리가 놓였고 용정에서부터 화룡, 연길, 왕청, 조양천, 로두구, 명월구, 돈화로 통하는 도로가 완성되었다. 우마차 영업이 활발해졌고 등양자동차회사가 왕청과 돈화행 버스영업을 시작하였으며 연길 행 버스는 매일 2회 왕복하였다.
사회주의 정당❰한인사회당❱이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되었다. 1918년 동양척식회사가❰간도구제회❱의 영업을 인계 받고 용정에 ❰동척❱간도출장소를 세웠다. 동북 각지에 출장소와 지점을 세워 침략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금융대부를 통하여 조선인들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이동휘가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김교헌과 서일이 기초하고 조소앙이 정리하고 39명의 독립투사들이 서명한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서❱가 만주에서 발표되었다.
6월,❰중일 길회선 철도차관❱의 체결을 반대하는 한족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조선인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산하의 제창병원은 30개의 병상을 가진 현대식 병원으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전염병과를 두었다. 소문이 널리 퍼져서 러시아에서 까지 환자들이 오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용정에 간도보통학교 부속학교로 ❰간도간이농업학교❱를 설립하였다.
❰동불사조선인민회❱가 용정총영사관 산하에 세워졌다.(2,715명)
❰연길조선인민회❱가 연길분관 산하에 세워졌다.(5,128명 )
함북노회 제2노회가 최덕준 목사는 부두일 선교사와 함께 국자가, 용동, 간장암, 잠전동 4개 교회를 섬기고, 이하영 강도사는 목사 안수를 받고 매도날 선교사와 함께 동불사, 관도구, 명신동, 천보산교회를 섬기고, 박례헌 목사는 서고도 (William Scott)와 함께 용정시교회를 섬기도록 허락하였다. 또한 김내범 목사를 투도구, 장은평, 구세동, 태양촌교회 4개 교회의 전임목사로 발령하였다.
1918년에 세워진 학교는❰영성학교❱,왕청현의❰원동학교❱,❰춘흥서당❱, ❰배명학교❱, ❰명진학교❱,❰훈춘보통소학교❱, 훈춘지역 촌민들이 세운❰종명학교(쌍신학교)❱,훈춘 마천자의❰소성자소학교❱ 등 8곳이다.
1918년에 세워진 교회는 ❰전석동교회❱, ❰청산리 백운평교회❱, ❰구호동교회❱, ❰옹성납자교회❱, ❰장낙동교회❱, ❰십리평교회❱, ❰진빙교회❱, ❰동작동교회❱, ❰달나자교회❱, ❰장등동교회❱,❰훈춘 용지향 삼도구교회❱ 등 11개이다.
1919년 초에 시작된 파리강화회의는 1년여에 지속됐고 연합국과 패전국 간에 베르사유조약, 생제르맹조약 등 여러 조약을 낳았다.
3월 2일 레닌의 발기로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이 창당되었다. 1943년 5월 15일 스탈린이 해체하였다.
용정에서 3•13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독립운동단체인 ❰간도국민회❱가 결성되었다.
3월 13일에 용정 서전대야에서 2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모여서 조선독립축하식을 거행하며 항일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간도 일본 총영사관으로 몰려가는 중에 중국 군경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13명이 희생되었고 48명이 부상당하였으며 94명이 체포되었다. 부상자들은 제창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명이 치료 중에 숨을 거두었고 2명은 퇴원한 후에 숨을 거두어 총 19명이 순국하였다. 17일에 수난열사 장례식이 제창병원에서 발인되었으며 푸트 선교사가 집례하였으며 합성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3.13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모든 비밀 모임과 유인물 인쇄 등이 명동학교와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진행되었다.
독립만세시위는 잇달아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 북간도를 무장투쟁의 길로 인도하였다.
3월 14일 투도구에서 5천명, 3월 15일 하광포에서 5백 명, 3월 18일 신흥평에서 5백 명, 3월 20일 훈춘성내에서 5천여 명, 3월 20일 룡두산에서 5백 명, 3월 20일 중남구에서 4백 명, 3월 20일 재피구에서 9백 명, 3월 24일 이도구에서 8백 명, 3월 26일 국자가에서 2만 명, 3월29일 마패시에서 2천 명, 4월 1일 삼도구에서 6백 명, 4월 2일 시건평에서 8천 명, 4월 5일 팔포강에서 3백 명, 4월 13일 용정촌에서 5천 명, 4월 16일 배초구에서 5천 명, 4월 16일 석치시에서 3천 명, 4월 16일 소동구에서 3백 명, 4월 19일 봉오동에서 3천 명, 4월 20일 춘방사에서 5천 명, 4월 26일 송언시에서 3천 명, 4월 27일 뢰자구에서 5천 명, 4월 29일 대감자에서 2천 명, 5월 1일 지신사에서 500 명이 모여 집회를 열고 만세시위를 하였다.
3.13 만세시위 후 수십 개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설립되었는데 가장 규모가 큰 단체는 ❰간도국민회❱였다. 회장은 용정시교회, 하마탕교회를 개척한 구춘선 장로였고 국민회군의 사령관은 안무였다. 간도국민회는 캐나다장로회 산하의 교회지도자들이 교회를 지회로 하여 세운 단체로 처음에는 본부를 왕청현 하마탕에 두었지만 비밀회의와 활동, 토의, 연락은 제창병원 지하실 안에서 가졌고 모든 비밀문서를 병원의 지하실에 보관하였다.
간도국민회는 중부지방회에 총본부를 두고 제1,2지방회를 구성하였으며 서부지방회에는 제1,2지방회를 두고 16개 지회가 소속되었고 동부지방회에도 제1,2지방회를 두고 9개 교회를 소속시켰고 남부지방회에도 제1,2지방회를 두고 8개 교회를 소속시켰고 북부지방회에도 2개의 지방회를 두어 13개의 교회를 소속시켰다.
당시 간도의 캐나다장로회는 함북노회 산하에 있었으며 간북, 간서, 간동시찰회가 있었다. 당시 북시찰회에 조직교회가 26개 있었는데 대표 교회는 하마탕교회, 와룡동교회, 간장암교회, 잠전동교회, 국자가교회, 적안평교회, 만진기교회, 모아산교회, 영고탑태성교회, 의란거우교회, 동거우교회, 석현교회였다. 이들 중 북부(하마탕)시찰회의 12개 지회는 간도 국민회 북부의 제1지방회와 제2지방회에 소속되었으며 국자가에 중심에 있는 14개의 교회는 중부지방회의 제1지방회와 제2지방회에 소속되었다.
서시찰회에는 조직교회가 16개 이였고 대표 교회는 관도구교회, 동불사교회, 명신동교회, 천보산교회, 두도구교회,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 태양동교회, 명월구교회 이였다. 이 교회들은 서부지방회의 제1,2지방에 소속되었다.
동시찰회에는 조직교회 30개가 있었고 대표 교회는 명동교회, 양무정자교회, 용정교회, 남양촌교회, 전선촌교회, 황거우교회, 훈춘성내교회, 토성보교회, 훈춘상하4개 교회, 화룡현 두만강 연안교회들이다. 이들 중 용정 무산간도 중심의 17개 교회는 남부지방회 제1,2지방회에 소속되었고 남양촌 종성간도 중심의 13개 교회는 동부지방회 제1,2지방회와 훈춘지방회에 소속되었다. 이렇게 캐나다장로회 산하의 함북노회 3 시찰회에 속한 백여 개의 교회는 간도국민회 5부 13지방회로 편제되었다.
일제는 간도 불령선인의 상황을 조사를 마친 후, “국민회의 운동기관 및 계통에는 간도 용정촌 캐나다장로파 야소교회에 속한 기독교신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은 간도 각지를 야소교 전도구역으로 하여 지역에 구장을 배치하고 구장은 국민회 운동에 관한 불온간행물을 취급하여 기부금을 모집한다.”고 하였다.
❰3.13만세시위❱직후에 조선국민의사회, 자위단, 충렬대, 대한신민단, 청년맹호단, 건국회, 의형제단, 야단, 구제단, 자유공단, 대의전사회 등 십여 개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만들어졌고 4월 이후에는 한당의사부, 의군부, 훈춘대한민국의회 지부, 대한국민회, 대한독립군, 독립운동의사부, 창의단, 오숭단, 정명단, 대한광복단, 훈춘대한애국부인회, 대한독립의사회, 서북청년회, 보황단, 소년단, 간도청년단, 북로군정서, 대한적십자회지부, 대한의민단 등 십여 개의 무장독립단체가 결성되었다.
4월 11일에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5월 4일 중국전역에서 5.4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 독일이 중국에서 가졌던 모든 이권을 승전국 일본이 계승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이에 격노한 베이징 학생 3,000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일시에 학생들의 수업 거부, 상인들의 철시, 노동자들의 파업이 진행되어 중국 정부는 6월 28일에 베르사유조약을 거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1918년에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였으며 1919년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에 반하여 레닌은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약속하며 피압박민족대회를 열어 제3인터내셔널로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1919년 3월 ❰간도시보❱가 창간되어 신문이 발행되었다.
❰팔도구조선인민회❱가 연길분관 산하에 세워졌다.(2,503명 )
서일이 총재로 있는 북로군정서가 왕청현 서대파에 근거지를 두고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였다.
1919년에 설립된 학교는 ❰두도구 상촌서숙❱,❰동명학교❱,❰숭신학교/양무정자, 모아교회, 호천포교회, 만진기교회, 국자술교회 산하에도 숭신학교가 있었음.❱,❰숭례향 사립 제1소학교❱,❰숭례향 사립 제2소학교❱,❰숭례향 사립 제3소학교❱,❰숭례향 사립 제4소학교❱, ❰숭례향 사립 제5소학교❱,❰용신학교❱ 등이다.
1919년에 세워진 교회는 ❰신흥교회❱, ❰중강자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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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6일 금요일 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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