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장(藏)은 감추어져 있다는 뜻인데요.
아뿔사, 오늘날 그 대장(大藏)은 신비로운 구석도 없이 다 드러나 버렸습니다.
영화자막의 엑스트라마냥 누구에게도 눈길을 받지 못하던 그 것만을 남겨두고 말이죠.
아래는 그 홍도여관을 복원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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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홍류동 깊은 계곡의 해인사 앞에 홍도여관이 있'었'다.
일제 때부터 해인사를 찾던 유명 인사들이 들렀고, 6.25 때도 폭격을 받지 않아 온전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다.

1939년 나온 '조선의 관광' 중 해인사의 여관을 말하고 있다.
'해인사 산문 앞에 조선식과 내지식 객실로 이루어진 홍도여관이 있다. 수용인원은 만원이다.'
홍도여관은 내방객들과 관광객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의 해인사 직영여관이었다.
나혜석은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에 상처받은 신세가 되어 해인사를 찾는다.
울창한 숲 사이로 들어서 꼬부랑꼬부랑한 길을 따라 숨을 몰아쉬며 어넉에 올라서니
산중에 지엘 보기 싫은 함석지붕 하나가 나타난다.
이것이 해인사 지정 여관인 홍도여관이다. 방 하나를 청구하여 행장을 풀고나서 여관 1,2층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니 도회지에서도 볼 수 없을 만치 설비가 되어 있으며
만원이 될 때는 이삼백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한다. 반찬이며 대접이 놀랐다.
라고 적고 있다.
조선인들은 일제식 '함석지붕'을 대체로 싫어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그 안에 들어가서는 놀랐다고 했다
조선 여관과 조금 고급(일식) 여관의 첫번째 차이는 '서비스' 정신의 유무였다.
소설가 김동리도 막 필명을 날리기 시작하던 무렵, 해인사를 들렀는데 홍도여관이 비싸서 하룻밤인가 자고는 그다음날 인근 민가로 옮겼다고 자서전에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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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사찰앞에 번듯한 여관이 있던 것은 해인사만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복작복작했던 부산 통도사 앞에도 이렇게 마츠다야(증전옥) 여관/호텔이 있었다.
이것도 직영여관일 가능성이 없지 않겠다.
전후 1960년경 나온 지리산 개발 관련 책자에 의하면,
관광 지리산의 제일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지리산 자락 그 어디에도 여관이 없다는 것으로 적는다.
일제 때 일본인들과 좀 사는 조선인들은 관광과 여행을 즐겼고,
따라서 사찰은 수익사업으로 여관을 운영했던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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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홍도여관의 홍도(紅濤)는 무슨 뜻인가.
6,70년대 수학여행 온 - 아마 그들은 한글세대였을 것이다 - 고등학생들이 홍도여관을 지나치면서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아아가 있다'라는 노래를 불러 주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나 역시 아마 그 홍도가 이 홍도라고 이해했을 것인데.
홍도의 '도'는 파도 도이다. 그래서 육군 노도부대는 '성난파도'라는 뜻이고,.
일제떄 인기 절정의 원산 송도원해수욕장은 솔향이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뜻이겠다.
홍도는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 계곡의 '홍'을 따서 만든 붉은 단풍이 온산을 물들인다'쯤 될려나.
지금 해인사 앞에는 '홍도'라는 상호를 가진 식당이 하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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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는 여기이다.

지금은 역시 사라진 신령스러운 연못인 영지를 사이에 두고 있다.
건물이 두채임이 확인된다.
일제 때 수많은 귀빈 탐승객들이 찾았건만, 홍도여관의 모습은 그러나 전후 처음으로 확인된다.
우리의 공군 장군에 의해 해인사는 폭격되지 않아 여관도 살아남게 된다.
그것도 B급 자료들에 의해서 말이다.

비석군 저쪽으로 근대식 건물이 눈에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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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부터는 저 건물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과 돈과 정열을^^ 쏟아부은 건데,
막상 모아보니 조금은 조촐하다는 거.

1960년경 모습이로 호텔 입구의 모습이다.
입구좌측의 기둥에는 전등이 오른쪽 기둥에는 '홍도여관'이라는 간판일거다.
그 오른쪽에는 게시판이 잇는데., 무엇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단체여행명? 식사명?

오른쪽 건물의 모습.
전형적인 일제식 2층 건물이다. 지금도 군산 울릉도 등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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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 대학생들로 보이는 - 아마 졸업여행이나 입학여행- 뒤로 홍도여관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들의 사진첩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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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홍도여관 안으로 들어가보자.
1956년 이화여대 산악부는 동계 가야산을 오른다.
그때 그들이 숙박한 곳은....
추가 2022 06) 이화여대 산악부가 머문 곳은 해인사내 암자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홍도여관일 것이다.
당시 이렇게 쾌적한 그리고 꽃무늬의 여관은 여기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문턱을 보면 일본식이 아닌가 싶다.

벽을 들어내면 이렇게 단체여행객들도 수용할 수 있다.
촛불을 두루 켜고...사과와 과일을 놓고 도란도란...미제 캔틴에는 술이 있겠지.
홍류동 물소리는 밤새 그침이 없는데....
홍도여관 그 속을 엿보다 --> 여기를
해인사 관광첩에서 본 60년대식 우리네 사랑 이야기 --> 여기를
1960년대 해인사 관광사진 기념첩 리스트 ---> 여기를
1959년 전설같았던 해인사 사진들 -=----> 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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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것들은 오래전에 이미 석학들이 다 헤쳐 놓았고.
늦게 태어난 죄(?)로 가을걷이 끝난 논에서 흘리고 간 볍씨 줍는 신세와 다름없다.
허나 '홍도여관' 하나를 복원했다는 점에서 추억이 있는 가야산 해인사에 뭔가 일을 한 느낌이다.^^

첫댓글 ^^ 짝짝 배꼽인사와 함깨 물개 박수를...
^^ 통도사 앞 여관이 소박한 사진자료를 발견한 건 최근 발행된 8권의 그림엽서집입니다.
절집의 국유림 사유화와 이윤의 극대화에 연장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