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同期인터뷰 2]‘왕회장’ 최규록
최규록 동문과의 인터뷰는 울릉도·독도 2박3일 탐방길 쾌속선 ‘선플라워’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2시간여 그의 지나온 인생역정을 듣는 것은 아주 흥미로웠다. 아니, 내성적이고 백면서생인 나로서는 경이로웠다. 사실 그와 동기동창이라고 해도 3년 동안 같은 반이 한번도 아니었고, 수인사도 제대로 없었기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낯설다면 낯선 사이였다. 2008년도 회장으로서 동기회에 헌신하는 것을 보고 감명받아 당시 편지 한 통을 공개적으로 날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썼다(일부 공개).
음식점을 경영하면서도 동기회를 위해 동분서주 애쓰는 자네를 보고 ‘참 무던한 친구구나. 어쩌면 그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지극할까’ 생각했다네. 언제나 자네를 보면 친구들에게 늘 밥과 술을 못사줘(본인은 한잔도 못하면서) 안달이고, 맨날 만나지 못함을 아쉬워하더군. 심성이 후덕한 자네에게 ‘인우(仁雨)’라는 호를 바치네. ‘어진 비’가 있는지는 몰라도 푸근한 느낌을 주지 않은가. ‘인우’는 아마도 농작물에살이 되고 피가 되는 봄비이자 단비일 걸세. 자네의 건강과 건승을 비는 마음 가득하네.
아래 글은 인터뷰 후에 정리한 그의 짧은 자전적(自傳的. self-biographic)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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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원광대 농대) 다닐 때부터 명색이 이미 ‘사업가’이자 ‘실업가’였다. 풍남초등학교와 해성중학교를 졸업했다. 초교때에는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주에서 가장 잘 나가는 레스토랑(240여평)을 운영했다. 연극배우 추송웅씨를 단독초대하여 공연했을 정도면 알만하지 않은가. 24세때 동전주JC(청년회의소)에 회원으로 가입했는데, 아마도 최연소였지 않을까. 사업가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타고난 듯. 선친 역시 목욕탕과 슈퍼마켓(당시 전주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등을 경영했다. 나는 레스토랑, 스탠드바, 디스코클럽 등을 7년여 동안 경영하다 어찌어찌하여 88년 서울 역삼동에 ‘고향집’이라는 해장국집을 차렸다. 식당을 하면서도 강남 목화예식장 인근 부지를 임대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결혼축하 관광버스 등을 유치하는 주차사업을 벌였는데, 나의 노력만큼 대박이 났다. 30분에 1500원은 당시 서울에서도 파격적인 주차료였다. 하루 24시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여 1년여만에 ‘큰 것’ 한 장을 모으기도 했다. 골프가 중요한 사업아이템이 될 것이라며 골프화를 사주신 선친의 선견지명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골프를 배우다 골프장옆 부지를 구입, 해장국집(기흥IC 근처)을 낸 것이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지금껏 ‘효자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장사가 아주 잘 되는 바람에 누님 가족 등의 도움도 받아야 했다. 특히 지금도 현역으로 음식점에서 활약하시는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헌신과 은혜는 대체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4년 전부터는 참한 고교후배(8회)와 함께 의료약품 납품업체(LTM)를 수원에서 경영하고 있다. 그 후배를 만난 것도 골프장이었다.
고교시절 공부는 즐겨 하지 않았지만, 잡기(雜技)에 능했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재수할 때에도 동창 3명과 신설동에서 자취하며 공부는 뒷전이고 놀기에 바빴다. ‘덕인회(덕진동과 인후동에서 학교를 다닌 친구들의 모임으로 회원이 10명이다)’라는 우정(友情)의 모임을 90년대초 만들어 1년에 두 차례 부부모임을 하고 있으니, 자랑이라면 자랑이고 재산이라면 재산일 것이다. 그뿐인가. ‘막동이클럽(집안에서 막동이인 일곱 친구의 모임)’도 계속 하고 있다. 그때 그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삶도 그렇겠지만, 남은 생(生)이 얼마나 재미없고 팍팍하고 삭막했을까 싶다. 아찔한 생각까지 든다. 친구 부인들까지 포함하여 ‘한 가족’같은 우리의 우정은 앞으로도 계속되고 영원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 하나, 죽어도 못잊을 것은 배우자와의 만남이다. 흔히 남자로 태어나 3가지 선택의 순간이 있다고 한다. 친구와의 만남, 평생 옆지기인 아내와의 만남, 평생 일할 직장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친구와의 만남에 이어 본격적으로 이성(異性)에 눈을 떠 ‘눈을 밝히고 다니던 시절’이 아마 20대초인 79년이었을 것이다. 졸업을 한 해 앞두고 사업구상을 본격적으로 실천하려던 때, 어느 친구모임에서 눈에 확 띄는, 요즘말로 필(Feel)이 팍 꽂히는 여성을 만났으니, 현재 잠실5단지에서 같이 살을 섞고 살고 있는 두 아들의 엄마이자 나의 평생동지인 오경옥(53) 여사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의 따님답게 정숙했으며, 한껏 도도하기도 했다. 하기야 평생직장을 잡을 생각도 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요식업을 하겠다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덤비는 나에게(더구나 외모까지 저팔계나 소도둑처럼 생기지 않았던가) 첫 순간부터 호감이 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떻게든 자리를 한번이라도 더 가지려고 온갖 궁리를 다 짜냈다. 먼저 최대의 응원군인 친구들과 그 여자의 친구들의 환심부터 사는 게 급선무였다.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만 믿고 무모하게 시작한 ‘나홀로 짝사랑’이 7년을 넘어가고 있어 속이 바짝바짝 탔다. 초조한 마음에 끽연(喫煙)도 즐긴 ‘골초’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나의 옛 연애시절을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집 한 채 값은 너끈히 날렸을 것”이라고 농을 할 정도로 매달렸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님은 저처럼 꼼짝하지 않는데/나 보고 대체 어쩌란 말이냐> 어쩌고하는 시 구절이 생각나 때때로 절망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꿈에 그리던 그녀가 결혼을 선선히 승낙하는 게 아닌가. 더구나 아버지 사업이 기울고, 내가 일으킨 사업도 거의 망해 지리멸렬한 상황이었을 때였다. 86년 꿈같은, 꿈에 그리던 결혼에 골인했다. 그것이 지금도 노래방에만 가면 언제나 나의 ‘18번’이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가 된 까닭이다. 훗날 왜 그때쯤에서야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느냐고 물으니 “내가 가서 망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해 또한번 나를 감동시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까지 흘렸을 것이다. 이러니 나의 연애(戀愛)도 성공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말이다.
친고아 배우자의 만남이 20세를 전후한 최고의 행운이었다면, 일생일대 최고의 행운은 30대초 극적으로 ‘인생멘토(mentor)’ 최재충(崔載忠)이라는 수수께끼같은 분을 만난 것이다. 그분은 미국 어느 대학 자연과학대 교수, 일본 기상청 고문 등을 지낸 철학박사로 88년엔 ‘고마쑥뜸’에 대한 특허를 냈으며 못고친 병이 없다고 소문난 ‘재야의사’였다. 86년 결혼하여 가장 힘든 시절일 때, 큰아들의 심장관련 병을 고치지 못하여(솔직히 천만원이 웃도는 수술비가 없었다) 전전긍긍 속을 태울 때, 선생님을 알게 되고, 자주 뵈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아들의 병은 차도가 있었고, 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틈만 나면 말씀하시길 “아낌없이 주고 베풀 아는 사람보다 큰 것은 없다. 어차피 빌린 삶이요, 돌려줄 목숨이라면 이 비움을 참된 마음으로 가득 채우자. 이것이 사람 사는 보람이며 창조적 삶이다. ‘참’이라는 말 자체가 ‘차다(채우다)’의 뜻이다. 삶의 빈 그릇을 사람의 선의(善意)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워보자”고 하셨다.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할까. 사업도 점차 풀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얼마나 암담했을까. 마치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는 듯한 느낌, 인격적으로 내가 성숙해지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거칠었던 성격이 놀랍게 유(柔)해졌다. 지극한 겸손을 배웠다. 우리말과 글의 뿌리에 대해서도 너무나 많이 배웠따. 쑥뜸 뜨는 법도 배웠는데, 이 이야기는 몇 시간을 해도 부족할 것이다. 선생님처럼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경위가 바르고 ‘한밝사상’ 등 조선 상고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이제껏 만나본 적이 없다. 인생의 멘토라는 말로도 부족한 ‘큰 스승’이엇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거의 10년 동안 선생님댁을 찾아 유족들과 함께 제사까지 지냈을까. 선생님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만남’은 2008년 재경전라고6회 동기회 회장을 맡으면서 고교시절 전혀 몰랐던 친구들을 무더기로 만난 것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떼로 말이다. 동시대에 같은 교문을 3년 동안 왔다갔다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두 번 만나 금세 급속도로 친해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1년여 동안 시산제(始山祭)를 시작으로 ‘6山회’라는 월례 산행모임을 만들고, 6월6일 동창부부 50쌍이 추억의 설악산-하조대 수학여행을 가고(쌍륙절 소풍은 지금도 이어져 ‘전설(傳說)’이 되고 있다), 한 달 두세 번의 번개팅을 통하여 그들과 쌓은 우정은 덕인회나 막동이클럽과는 또다른 삶의 재미를 안겨주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2011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경총동문회 회장을 선뜻 맡은 것은. 그곳에는 또다른 많은 선후배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한 달에 10-20번의 크고작은 모임에서 만난 가계의 동문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들을 인간적으로 알게 된 것이 즐겁고 고마웠다. 이렇게 어울려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운동(골프, 배드민턴)을 하는 친구들과의 만남도 그렇다. 건강을 다지며 건실한 사회활동을 영위하는 것만큼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아침마다 만나는 민턴클럽 회원들과의 시간이 짧은 것이 안타깝다. 회장을 맡는다하며 정치를 꿈꾼다고 생각하면 오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뉴스레터 ‘전라인열전’ 대상 동문으로 정치인을 배제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마지막 주인공으로 내가 선정된 것은 필자가 이 인터뷰의 주제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라는 뜻일 것이다. ‘인덕(人德)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일까?
50대 중반을 헤쳐나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비즈니스로 만나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우정이 깨지기도 햇으며, 서운한 일, 후회스런 일도 많았지만, 부정적인 만남보다 긍정적인 만남이,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문득 정호승 시인의 짧은 시 한 편이 생각난다.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나는 그 섬에 가고 싶다>. 재경총동문회 회장의 임기가 끝나간다. 생업(生業)보다 동문들의 각종 모임 참석을 최우서능로 바쁘게 뛰었다고 말할 수 있다. 2년 동안 만난 수많은 선후배들의 면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회장직을 맡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좋고 훌륭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걸 생각하며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참 행복한 놈”이라고. 고맙다.
* 이 글은 2012년 12월쯤 ‘전라고재경총동문회’에서 펴낸 ‘e메일 뉴스레터’에 실렸다. 일독(一讀)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