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인사들만 억울했던 것은 아니다.
강원도 동해안 항구 마다, 납북 귀환어부 가족들이 흩어져 산다.
그 중 한사람 김용태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드라마 속의 이야기 같다.
1971년 10월 25일 당시 17살이었던 김씨는 강원도 속초에서 명성3호(승선자 21명)를 탔다가 납북됐다.
안개가 꼈던 그 날, 울릉도 근해에서 오징어를 잡고 속초항으로 귀항하던 중에 갑작스레 납북이 됐다. 이들은 11개월간 억류됐다가 1972년 9월 7일 다른 어부(7척 160명)들과 같이 돌아왔다.
그런데, 가족이 있는 속초 집을 코앞에 두고 경찰들은 그를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속초시청 회의실, 근처 여인숙 두 곳을 오가게 하며 구타·고문을 가하며, 허위 진술서를 작성하게 했다.
조사받을 때마다 수사관이 달라졌다.
"구속영장도 없이 석 달 동안 대공분실 지하에서 고문받은 거예요.
구속영장 떨어지면서 지하실에서 나왔어요.
7월 12일. 이 날짜를 못 잊어뿌리죠. 거짓말도 알아야 하잖습니까. 뭔가 있었으면 더 빨리 나왔겠죠.
없으니까 더 망글(만들)라고 그래서 오래 있었어요.”
“수사관이 제 앞에서 '내가 체면이 있지. 그냥 보내줄 수 없다'고 하면서 고문했어요.
지 체면 살리라고 내를 이렇게 망글었어요. 3명이서 돌아가면서. 제가 마지막에 그랬어요. 이제 고만 때리고 고만 고문해라.
그 대신에 당신들이 하라 하는 대로 내가 다 해줄 게 그랬어요. 그러니까 뭘 갖고 온 줄 아세요?
전에 간첩사건 서류를 갖다 줍디다. 이거 읽어보라고. 그래서 그걸 이틀인가, 삼일인가 읽었어요.
그래 거기에 맞춰서 망글어 썼어요. 긍까 증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강요로 만들어진 허위 진술로 반공법·국가보안법·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일상이 회복될 즈음 다시 경찰이 그를 붙들었다.
1981년(당시 27세) 충남 서산경찰서에 불법 연행됐다. 충남 서산에서 꽃게잡이를 한창 할 때였다.
앞서 처벌을 받은 일이 빌미였다. 이 씨가 불법 연행돼 고문받기에 앞서 외할아버지가 먼저 경찰에 끌려갔다.
외할아버지는 104일, 이 씨는 86일간 불법 구금을 당했다. 경찰은 둘을 한꺼번에 엮으려고 했다. 둘이서 공모해 북한으로 탈출하려고 했고, 군사기밀 탐지, 찬양고무를 했다고 없는 죄를 씌웠다.
"저들도 집에 가면, 형이 있고, 동생이 있고 부모가 있을 건데…. 개, 돼지도 그렇게 안 패요.
일단 수사받기 전에 뭘 물어보지도 않고 팼어요. 물고문도 당했는데, 영화랑은 달라요. 손을 뒤로 묶고 뒤로 넘어지게 해서 수건을 깔고 물을 붓는데…. 이근안만 고문 기술자가 아니에요. 기가 막히게 하더만요.
하도 맞고 고문당해서 지금은 기상청보다 날씨를 먼저 알아요.“
강릉 보안사 영동분실에 끌려가 34일간 전기 고문, 고춧가루 고문,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고문으로 온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손톱이 떨어져 나가고, 이가 몽땅 부러졌다. 어깨 인대도 파열돼 수술을 받았다.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가족들은 연좌제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부인과는 교도소 복역 중 이혼했다.
아버지는 '높으신 검사, 판사가 거짓말할 리가 없다'며 오히려 '아들을 살려두지 말고 사형시키라'고 교도소장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경찰이 되려던 아들은 경찰대 필기시험을 통과했지만, 연좌제 탓에 최종 합격을 하지 못하자 한강에 투신해 죽었다는 소식을 그것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야 했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1954년부터 1987년까지 납북된 어선과 선원은 각각 459척, 3,651명에 달한다. 27척과 이에 승선한 선원 403명은 아직 송환되지 못했다.
최근 결성된 ‘동해안 납북귀환 어부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은 숨어 지내는 납북 어부와 그들의 가족 찾기를 최우선 사업으로 꼽고 있다.
찾아낸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고, 법원에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다.
민주화 인사들만 억울한 것이 아니다.
묵묵히 바다에서 살아가던 어민들은 그 동안 한 마디 말도 못했다.
그들의 가족들은 여전히 동해안 항구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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