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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56. [역경의 열매] 원응두 (1-28) 제주 중문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70여년 신앙의 길
일제강점기 더 혹독했던 제주의 삶
8남 1녀 중 일곱째인 나와 남동생만 생존
일본말 못한다고 초교 면접서 탈락 설움
제주도 서귀포시 색달동 제주중문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비 앞에 선 원응두 장로.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끝이자 시작점이다. 내외국인을 망라해 많은 사람이 한 번쯤은 여행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눈을 감으면 푸른 바다와 부드러운 한라산, 탐스러운 귤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맑고 깨끗한 공기와 노란 유채꽃과 빨간 동백꽃 등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이 나그네의 지친 마음을 치유해준다.
서귀포시 중문은 우뚝 솟은 한라산을 뒤로 한 정겨운 마을이다. 이곳은 관광단지가 있어 제주를 여행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하얀 눈이 덮인 한라산과 예쁜 동백꽃, 노란 유채꽃과 귤이 달린 과수원은 살아있는 캔버스다.
중문관광단지를 지나는 도로를 지나다 보면 제주중문교회라는 커다란 교회 간판이 보인다. 이 교회는 108년 세월의 긴 역사를 지닌 교회다. 이 교회가 내 믿음의 터전인 중문교회다. 나는 이 중문교회에서 70여 년의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다. 원로장로로 은퇴한 지 올해로 20년째다.
나는 1934년 10월 15일 제주의 중문이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매우 빈곤했다. 그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그랬다. 특별히 제주는 더욱 가난했다. 하루 세끼 먹는 날이 드물었다. 부모님은 8남 1녀를 두었으나 일곱 명의 자식을 잃었다. 나는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위의 형들과 누이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아파도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아마 우리 형제들도 그런 것 같다. 9남매 중 나와 동생만이 살아남아 지금은 남동생 한 명만 형제로 생존해 있다. 사촌 형도 있었는데 4·3사건 때 행방불명됐고, 그 가족들은 모두 희생당했다.
이처럼 부모님은 자식을 잃을 아픔을 당하셨기에, 특별히 신경을 쓴 덕택에 어려서부터 나와 동생을 아끼시고 더욱 애지중지하게 키웠다. 부모님들은 늘 우리가 온유하고 성실, 근면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했던 것 같다. 나는 일곱 살 때 동네에 있는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배우고, 명심보감도 배웠다. 서당에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 부름)를 입학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보니 교장 선생님은 일본 사람이었고, 선생님들도 절반 정도는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라 학교나 관공서들을 거의 모두 일본 사람들이 장악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면접을 했는데 그만 탈락하고 말았다. 일본말을 못 한다는 것이 탈락 이유였다. 그때 나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무척이나 실망했다. 빨리 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놀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호기심 많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무척이나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홉 살이 돼서야 일본말을 어느 정도 배우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드디어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꿈만 같았다.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 제주 중문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70여년 신앙의 길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 일제시대 학교서 개명 강요… 한겨울엔 맨발 등교까지
* [역경의 열매] 원응두 (3) 폭도들에 끌려가 죽을 뻔… 곡식·가축까지 모두 빼앗겨
* [역경의 열매] 원응두 (4) 몸이 아파 좋아하게 된 책 읽기… 유독 '예수님'에 끌려
* [역경의 열매] 원응두 (5) 질병 속에 만난 그리스도… 모두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
* [역경의 열매] 원응두 (6) 뒤늦게 현역 입대했지만 몸 약해 1년 넘게 병원 신세
* [역경의 열매] 원응두 (7) 믿음의 싹 틔운 중문교회… 주님 위한 봉사는 늘 '기쁨'
* [역경의 열매] 원응두 (8) 신앙 지키려고 물려받을 재산까지 포기하고 집 나와
* [역경의 열매] 원응두 (9) 30세 젊은 나이에 믿음의 터전 중문교회 장로로 장립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0) 예래교회 섬기며 예배 인도… 교회 학교 부흥에 집중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1) 잡화점 사업 뛰어들었다 출자금도 못 건지고 사업 접어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2)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자금 돌지 않자 사채까지 빌려 써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3) 심한 빚 독촉에 유산으로 받은 땅 다 팔고 빈털터리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4) 자본 없이 창업 가능하단 말에 덜컥 '복덕방' 열어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5) 천신만고 끝에 시작한 귤 농사… 열매 기다리며 5년 정성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6) 처음 심은 귤나무 100주에서 20관 수확의 기쁨 맛봐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7) 많은 시행착오 겪었지만 최고의 유기농 귤로 인정받아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8) 세 가지 농사철학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리라
* [역경의 열매] 원응두 (19) 천금보다 귀한 주님 말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0) 심각한 주차난에 교회 앞 땅 매입, 주차장 부지로 헌납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1)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크다"… 나눔의 행복 실천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2) 자식들 중 하나는 사역자로, 또 하나는 나라를 위해…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3) 새벽기도·가정예배로 키운 육남매, 모두 주님의 자녀로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4) 어렵고 힘든 시기에도 믿음의 끈 놓지 않은 육남매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5) 70세 생일 맞아 제주대학병원에 시신 기증하기로 서약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6) 내 인생은 믿음의 삶…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인도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7) '믿음대로 된다' 말씀 붙들고 포기하지 않는 삶 노력
* [역경의 열매] 원응두 (28·끝) "모두 하나님 잘 믿고 천국에서 만납시다"
약력=1934년 10월 15일생 △1955년 김춘년(90세) 권사와 결혼, 슬하에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 등 2남 4녀 △제주중문교회 원로장로 △제일농원 경영(유기농) △㈜정농회 회원 △국제기드온협회 서귀포 캠프 회장 역임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원응두 (2) 일제시대 학교서 개명 강요… 한겨울엔 맨발 등교까지
선생님 첫 마디가 “조선말 쓰지 말라”
이유도 모른 채 일본 향해 묵념
부모들도 군사 기지서 강제노역
1945년 드디어 해방의 신새벽 맞아
제주 중문초등학교 21회 동기들과 은사님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원응두 장로.
나의 어린 시절은 일제의 압박을 당하던 민족의 수난 시기였다. 어렵사리 초등학교에 입학해 보니 너무나 신기했다. 선생님이 하신 첫 마디가 ‘조선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했고 여러 가지 과목도 일본어로 배웠다. 교복도 일본 군인들이 입는 옷과 색깔이 비슷했다. 모자도 마찬가지였다. 성명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모든 것을 일본식으로 하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성적이 나쁘면 낙제를 시켜 한 해 더 공부하도록 했다. 지금 기억하면 신체 단련이라고 하여 아이들을 겨울에 반바지에 맨발로 학교에 가도록 하고, 여름에는 상의를 벗고 다니도록 했다. 피부는 햇볕에 까맣게 태우도록 했다. 그래야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이면 신사참배를 하게 하고 정오에는 일본을 향해 묵념하도록 했다.
나는 어려서 잘 모르고 자랐지만 부모님은 정말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낸 것 같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는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은 당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겪었던, 힘들고 고달픈 세월이었다. 나도 어린 나이에 이곳, 제주 중문에서 똑같이 어려움을 겪으며 자랐다.
부모님들이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어린 나에게도 너무나 분하고 원통한 생각이 든다. 일제는 부모님들이 1년 내내 애쓰며 농사한 것들을 공출이라고 해서 빼앗아 가고 기르던 소와 돼지, 닭 같은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심지어 집에 있는 쇠로 된 가재도구들도 몽땅 가져갔다.
면에서는 직원들이 나와 주민들이 어떤 음식을 해 먹었나 솥뚜껑을 열어보며 확인까지 했다. 동네 남자 어른들은 일본 군인들이 주둔한 모슬포 군 기지에 동원돼 땅굴을 파고, 대포기지를 만드는 데 강제 노동을 했다. 그리고 산이나 오름에 동굴을 파는 일에도 동원돼 고생했다. 젊은 여자들은 일본에 취직시켜 준다고 하면서 끌고 가기도 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야 말았다. 해방은 역시 새벽같이 왔다. 3학년 중반쯤 일본어 히라가나를 배울 무렵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학교 분위기가 이상했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우리말로 애국가가 들려오고 우리말 동요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일본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고 대신 우리나라 선생님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일본인 교장도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일본 교과서를 모두 반납하고 새로운 한글 교과서를 받았다. 처음에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자유롭게 학교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나이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한글 교과서로 기역 니은 디귿 하면서 한글을 처음으로 배웠다. 노래도 우리말 동요로 배웠고 노래에 맞춰 율동도 배웠다. 나는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3) 폭도들에 끌려가 죽을 뻔… 곡식·가축까지 모두 빼앗겨
파출소 무기고 습격해 총 탈취한 폭도들
마구잡이로 사람 잡아가다 우리 집 덮쳐
아파 떨고 있던 날 끌고 가다 달아나버려
원응두 장로가 제주 4·3공원에서 4·3사건 때 행방불명된 사촌 형 비석 옆에 팔을 기대앉아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그야말로 해방은 새벽같이 왔다. 1945년 8월 15일. 내가 열한 살 되던 해였다. 마침내 대한민국이 일제의 35년간의 압박 속에서 벗어난 날이다. 그러나 해방을 맞았으나 그 기쁨의 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2년 뒤 4·3사건이라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4·3사건은 아주 잔혹한 사건으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설상가상으로 3년 후엔 6·25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들을 안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떻게 이 험한 세월을 지내 왔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런 처참하고 힘들었던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독교 신앙 덕분이라는 것을 새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여섯 글자로 줄이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이다. 이로 인해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었다. 좌우의 이념 문제로 벌어진 민족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때가 내 나이 15살이었다. 제주 전역은 물론 우리 마을 중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년들이 중문파출소에 모였다. 집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순경들과 미군들은 집회를 해산했다. 파출소 무기고를 습격하고 총과 실탄을 탈취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때 미군들이 쏜 총에 맞아 사람이 죽기도 했다. 갑자기 학교 선생님들이 잡혀가고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온 마을이 어수선했다.
그날 나는 죽는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폭도들이 우리 집을 덮쳤다. 쌀독을 뒤지고 쌀독에 있는 곡식을 빼앗아 가고 기르던 가축까지 끌고 갔다. 그들은 겁에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내 손을 잡고 끌어가려고 했다. 그때 나는 몸이 몹시 아픈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나를 조금 끌고 가다가 내가 기운이 없어 축 처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내팽개쳐 놓은 채 달아났다. 데리고 가봐야 짐만 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만약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분명 끌려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폭도들에게 끌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도들은 마을 어귀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총살했다.
길거리에는 경찰들과 군인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밤에는 통행금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마을 역시 돌아다니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를 지킨다고 성담을 쌓고 보초를 세웠다. 어린 나도 방범소년단으로 대한청년회 사무실에 나갔고 밤에는 보초를 서기도 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밤마다 총소리가 들렸다. 그때 우리 집이 몽땅 불타 없어져 동네에 허름한 집을 빌려 살았다. 우리 가족은 살아남은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4) 몸이 아파 좋아하게 된 책 읽기… 유독 ‘예수님’에 끌려
열아홉 살 때 원인 불명의 병으로 앓다
고쳐보려 백방으로 애썼지만 모두 허사
고통 가운데 혼자 책 읽기가 유일한 취미
원응두 원로장로가 1992년 5월 23일 제주 중문교회에서 찍은 아내 김춘년 권사 취임 기념사진. 왼쪽 위 작은 사진은 1955년 결혼 기념사진.
나는 역사적인 혼돈의 시대에 예수님을 만났다. 놀라운 기적을 맛보았다. 특히 제주도라는 시골에서 기독교를 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 사람이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교회에 갔다. 성장기에 먹을 게 없어 궁핍한 시절을 보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교회에서 주는 사탕과 선물을 얻는 재미로 동네 아이들과 교회에 간 것이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였다. 그때가 유년 주일학교 시절이었다. 선물과 먹을 것을 주는 교회가 좋았다. 나는 원래 예수를 안 믿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 교회에 열심히 나가지는 못했다. 결국 교회와 멀어졌다.
어려서부터 병을 달고 살았다. 가난으로 영양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병치레를 많이 했다. 열아홉 살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았다. 당시 제주에는 병원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한의사가 있어서 침술로 병을 고치던 때였다. 부모님들은 내 병을 고쳐보겠다고 민간요법을 썼고 심지어 굿도 했다. 하지만 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 보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셨지만 이렇다 할 효과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병명은 폐디스토마와 늑막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폐디스토마의 경우 5년 정도 지나면 자연적으로 치료가 된다고 믿고 있었다. 늑막염 역시 일종의 유행성 병으로 알고 있었다. 나중에는 고산이라는 곳에 있는 병원에 찾아갔으나, 병을 고치지 못하고 그냥 아픈 채로 지냈다. 그래도 늑막염은 다른 한의원에서 물을 빼냈다. 나는 병을 치료하지 못한 채 그렇게 몸이 아픈 상태로 그냥 하루하루 고통 가운데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밖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노는 것보다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다. 돈이 생기면 먹을 것을 사 먹는 대신 틈틈이 책을 구해 읽었다. 책이 흔치 않은 때라 많은 종류의 책은 없었다. 하지만 구할 수 있는 대로 책을 구해 읽었다. 몸이 아프니까 오히려 책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특히 철학과 종교 서적에 눈길이 갔다. 예수 석가모니 무함마드 등 위인전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런데 그중에 유독 예수님에 관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예수님에 관한 책을 읽는 중에는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관한 내용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해도 쉬웠다. 의심이 생기거나 믿지 못하겠다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그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병중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라면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때마다 교회 유년 주일학교에 다니던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빨리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6·25전쟁 당시 전란을 피해 제주도로 피란 온 분을 만났다. 이웃에 살던 그분이 동네를 다니며 노방전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책도 한 권 주었는데 ‘요한복음’이라는 빨간 쪽복음이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5) 질병 속에 만난 그리스도… 모두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
내 마음 사로잡은 ‘요한복음 3장16절’
이 말씀 읽는 동안 몸과 마음의 병 회복
날 믿음의 세계로 이끄는 계기 돼
원응두 원로장로가 성경 최고의 구절로 꼽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고 묵상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말씀이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동안 고통스럽고 아팠던 몸이 서서히 회복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마음의 병이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건강을 되찾았다. 몸도 많이 회복되고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많은 사람이 경험했지만 이 사건은 나에게 인생 전환점이 됐다. 질병 속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한때는 병이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 일로 믿음에 대한 확신으로 생활이 바뀌고 기쁨의 삶으로 충만했다.
결국 이 병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의 목표와 삶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육신의 안녕과 정신적 평안에만 열심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부터는 나 자신의 행복과 안락엔 별 관심이 없었다. 병으로 고통 가운데 있었기에 더 갈급한 심정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성경 말씀이 더 마음에 다가온 것 같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람 마음의 변화가 한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성경 한 구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기적적으로 그것이 나를 믿음의 세계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런 일은 사람의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어려운 시절에 하나님을 모르고 병으로 고생하던 내가 성경을 알고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알기에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결단했다. 그리고 전도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때 예수를 믿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
비록 병중에 예수를 알고 믿게 됐지만 이것은 절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미 계획해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다시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질병이 나를 한때 고통스럽고 힘들게 했지만, 이 병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쳐 주시고 질병으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성경 말씀은 기적을 낳는다. 아흔이 된 이 나이에 딱 한 가지 비밀을 얘기하라면 언제든지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본다. 그것이 좋은 일을 통해서 일 수도 있고 때로 어렵고 힘든 고난이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어떻게 붙잡느냐 하는 것이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6) 뒤늦게 현역 입대했지만 몸 약해 1년 넘게 병원 신세
훈련소 신검 ‘폐디스토마’로 불합격
2년 뒤 재소집, 전방 부대 자대 배치
심한 훈련 받을 때 가래에 피 나오고
가끔 피 토하자 야전 병원으로 후송
원응두 원로장로가 입대 당시 중문교회 청년들과 촬영한 송별 사진. 뒷줄 왼쪽 네 번째가 원 장로.
1956년 6월 6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현충기념일(현충일)에 국민의 3대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를 결심한 날이기 때문이다.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징집통지서를 받았지만 입대를 결정했다.
화순항에서 대형 선박을 타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에서 화물열차를 타고 논산 훈련소에 도착했다. 곧바로 신체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폐디스토마’라는 질병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2년 뒤 재소집을 받았다. 제주읍에서 1000명 정도의 장병들과 함께 또다시 징집되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입대해 교육을 받았다. 병참 병과를 얻어 전방 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해 여름은 전국이 물난리로 처참했다. 사라호 태풍으로 제주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나는 후방 부대로 옮겼다. 그러나 전방 지역에 보병 수가 적어 얼마 후 전방 부대로 차출되었다. 경기도 전곡이었다. 그곳에서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막사를 짓고 소대별로 생활을 했다. 훈련도 하고 사역도 하면서 군 생활을 해 나갔다. 나는 병사 중 나이가 많아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 나보다 어린 병사들의 배려로 군 생활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몸이 약해서 심한 훈련을 받을 때는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때때로 피를 토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때마다 연대 의무실에서 약 처방을 받았다. 그러나 효과가 없어 의정부 야전병원으로 후송돼 2주간 치료를 받았다. 이후 큰 병원으로 이송돼 10개월간 병원 신세를 졌다.
병원에는 독서실이 있어서 많은 책을 읽었고 성경도 수십 번 완독했다. 병원에는 전도사님이 계셔서 주일에는 함께 시내 교회로 나가 예배를 드리고 일반 음식(사식)도 먹고 시내 구경도 했다.
그때 마침 담당 간호장교가 기독교인이어서 간호를 잘 해주었다. 간호장교는 강원도 출신이었고 동료 중엔 제주 출신 간호장교도 있었다. 특히 약조 과장이 고향 제주 중문 출신이었다.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병원 생활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년 이상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진급도 안 되고 휴가도 때를 놓쳐 못 가게 되었다. 병이 어느 정도 치료가 되어 다시 원래의 전방 부대로 복귀했다. 복귀하고 보니 동료들은 병장 계급을 달고 있었고 후임들도 상병 계급을 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이등병 계급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후배들은 ‘선배님’이라 하며 존중해주었고 동기들도 ‘원 병장’이라 불러줬다. 입대 후 2년 만에 특명을 받아 휴가를 받았다. 휴가 복귀 후 전방 OP(관측소)에 파견 근무를 받아 몇 개월 동안 혼자 근무를 했다. OP에 근무할 때도 성경을 계속 읽었다. 부대에서는 내가 병원 생활을 오래 했기에 제대가 늦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전역 명령을 받았고 28개월 만에 만기 제대를 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7) 믿음의 싹 틔운 중문교회… 주님 위한 봉사는 늘 ‘기쁨’
초등 4년 때 친구와 함께 교회 첫 출석
몸은 힘들지만 교회 봉사 즐겁고 기뻐
예배시간엔 종 치고 청소까지 도맡아
1915년 2월 24일 창립된 제주 중문교회 초창기 모습.
중문교회는 2025년이면 설립 110주년을 맞는다. 1915년 2월 24일 창립 예배를 드렸다. 신앙 선배들의 땀과 헌신, 희생의 피를 흘린 결과였다. 항일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신 믿음의 용사가 계셨고 4·3사건과 6·25전쟁 속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믿음의 선배들이 지키고 섬겼던 자랑스러운 교회다.
신앙 선배 중에는 오공화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다. 나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신 분이다. 중문교회 초대 장로로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온갖 열정을 쏟으셨다. 얼마나 열심히 전도했던지, 장로님은 중문 마을 집집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전도를 했다. 내가 교회에 나가기 전 우리 집에도 장로님이 찾아오셨던 기억이 있다. 장로님은 아버지에게 예수 믿으라고 몇 번을 권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그러나 집안 제사 문제 등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다.
내가 처음 중문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1946년 초등학교 4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된다. 친한 친구와 함께 교회에 갔다. 친구는 거칠고 시비를 잘 거는 친구였다. 그런데 나에게는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하지만 함께 교회 생활을 하는 중에 그 친구가 교회에 불만이 많아 결국에는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교회에 나갔다. 그러면서 정식으로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학습도 받고 세례도 받았다.
중문교회를 나가면서 나의 생활도 달라졌다.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모든 것을 제쳐 놓고 교회로 향했다. 그런 게 너무 즐겁고 좋았다. 때로는 몸이 힘들어도 마음은 기뻤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시지는 않았지만 내가 교회 가는 것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으셨다. 아마도 내가 병도 낫고 몸도 건강해지고 하니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 교회에 나가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하다 보니 차츰 믿음도 쑥쑥 자라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좋았다. 그때마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당시에는 교회 재정이 어려웠다. 교회를 관리하는 사찰을 둘 형편이 못 되어 대신에 교회 관리를 나 혼자 맡아서 관리했다. 그때는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을 쳤다. 새벽기도회를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종을 치고, 모든 예배 시간 전에 종을 쳤다. 교회 청소하는 일도 도맡았다. 바닥 마루를 닦고 물걸레질을 했다. 그때는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램프등(燈)을 사용했다. 나는 램프등을 관리하는 일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집사직을 받아 봉사했고 주일학교 부장 겸 교사로 활동했다.
지금도 나는 시간이 나면 어디를 가나 손바닥 크기의 전도지를 돌린다. 그 옛날 오 장로님이 하셨던 대로 말이다. 내가 교회 문턱을 밟게 된 것처럼 믿지 않는 이들도 언젠간 나처럼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었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는 능력의 말씀을 믿는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8) 신앙 지키려고 물려받을 재산까지 포기하고 집 나와
제주에서는 조상 제사 지내지 않으면
유산을 받지 못하는 당시 관습 있어
제대로 된 믿음생활위해 미신과 결별
교회학교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지내
원응두(원 안) 장로가 믿음의 고향인 중문교회 교인들과 야외예배를 드리고 기념촬영을 했다.
제주도엔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속설이 있다. 신당(神堂)이 500여곳, 절이 500여곳이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무속신앙과 불교가 판을 치고 있었다. 예전에 제주에서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웠다. 교회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핍박도 심했다. 제주 사람들은 대부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곤 했다.
우리 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난 모든 것을 감수하고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기로 하고 미신과 결별했다. 예수를 믿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유산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그래서 나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들과의 관계도 소원했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는 아이들이 놀 만한 곳이 없었기에 학교가 끝나면 동네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100명 가까운 아이들이 교회로 갔다. 교회에서는 혼자 교회학교를 감당할 수 없어서 중학생들을 교사로 임명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교회가 늘 편안하고 평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 생각지 못한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났다.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왜 교회에 이런 일들이 생겨야 하는지 마음이 아팠다.
당시 교회는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과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으로 나누어져서 여러 가지 문제로 서로 감정이 상해 싸움이 생기게 되고 결국엔 예배도 양쪽으로 나누어 드리곤 했다.
나는 예장에 속해 있었는데 예장 쪽 청년은 나 혼자였다. 장로님 한 분과 안수집사 등 다섯 가정으로 모두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기장 측은 청년들도 많았고 교인 수도 100명이 넘을 정도가 되었다. 갈등이 심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혈투가 벌어져 교단 대표들은 서귀포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나누고 기장 교회가 따로 나가기로 결정됐다.
기장 교회 측 장로님은 면 의회 의장이라 면사무소 의회실에서 예배를 드렸고, 우리 쪽 예장은 교회 본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기장 교회는 새 부지를 마련해 석조 건물로 웅장하게 교회당을 지었다. 분쟁 속에서 우리 예장 교회는 함석지붕까지 뜯기고 풍금마저 빼앗겨 버린 채 허름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다행히 이웃교회(보목교회)에서 풍금을 마련해 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후 전도사님을 모시고 정상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다.
분열된 두 교회는 아픔을 털어내고 1956년 3월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기쁨을 누렸다.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어려운 문제도 술술 풀렸다. 성도들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서로 희생할 때 다시 올바로 세워진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9) 30세 젊은 나이에 믿음의 터전 중문교회 장로로 장립
내 삶의 이정표이자 날 구원의 세계로
이끌어 주고 믿음 키워 준 중문교회서
정성 다해 주를 위해 헌신하리라 다짐
원응두(셋째 줄 왼쪽 여덟 째) 원로장로가 1964년 5월 15일 중문교회 제2대 장로로 장립 받고 교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나는 30세가 되던 1964년 5월 15일 젊은 나이에 장로 직함을 받아 중문교회 제2대 장로가 됐다. 오문찬 장로님과 함께 장립을 받았다. 지금은 우리 교단에서 장로가 되는 연령이 40세이지만 당시는 장로 나이는 30세도 가능했다. 아마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장로로 세워주신 것 같다.
장로 장립을 받던 감격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 마음속엔 내 신앙이 부족한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정성을 다해 주님을 위해 봉사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나는 그때 사업이 잘은 안 되었지만 어려운 상황일수록 믿음의 길을 걸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만난 예수님,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키워준 교회가 있을 것이다. 늘 예수님을 만났던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자신을 이끌어준 교회를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힘들 때마다 그때를 기억하면서 힘을 얻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예수님을 만나던 때와 믿음을 키워준 교회 모두 소중하고 귀중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면서 믿음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중문교회는 그런 점에서 내 삶의 이정표요 흔들릴 때마다 십자가를 의지해 굳건히 서게 한 믿음의 터전이다. 나는 이 분명한 사실을 믿고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정성을 다해 헌신하리라 결심했다. 교회에 가면 늘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이런 일들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6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2004년 중문교회에서 은퇴했다. 교회는 그동안 여러 차례 건축을 했다. 이전 교회당 모습은 오간 데 없지만 지금도 예배당 앞에 서면 어렵던 시절이 생각나고 그리움이 몰려온다. 늘 감사할 뿐이다.
중문교회는 내 젊은 시절이 묻혀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큰아들 원희종 제주 하영교회 목사와 둘째 아들 원희룡 국토건설부 장관 등 6남매가 자란 교회이기도 하다. 나는 기도한다. 중문교회가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다.
한국교회를 위해 눈물과 땀으로 기도하면서 교회를 지켜내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해 본다. 나는 후세에 믿음의 후배들에게 이와 같은 믿음의 선배로 기억되길 원한다. 나는 중문교회를 변함없이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다.
지난 60년을 돌이켜보면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때는 교회에 어려움과 시련들이 있었다. 혼란과 갈등으로 교회가 나누어지는 아픔도 있었지만 다 치유해주고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다. 중문교회는 나를 구원의 세계로 이끌어 주고 믿음을 키워 줬다.
하나님께서 중문교회를 한 세기 넘도록 굳건히 지켜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주님의 명령을 시행하라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도 나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위해 기도한다.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가 깃들길 말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0) 예래교회 섬기며 예배 인도… 교회 학교 부흥에 집중
경제적 자립이 힘든 옆 동네 ‘예래교회’
예배 인도할 교역자 모실 형편 안 돼
예래교회 당회장 권유로 교회 맡게 돼
원응두 원로장로가 한때 섬겼던 예래교회는 없어지고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내가 중문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던 때에 이웃 동네에 있는 교회를 섬긴 적이 있다. 예래라는 마을의 교회였다. 예래는 중문 옆 제법 큰 마을이었으나 예래교회는 자그마했다. 동네는 규모가 있었지만 교인이 많지 않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예래교회는 교역자를 따로 모실 형편이 안 돼 중문교회에서 장로들이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인도하기로 했다. 그때 예래교회 당회장을 겸하고 있던 서귀포제일교회 목사님이 나에게 교회를 맡아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이 동하지 않아 그저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교회를 섬기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봉사를 하겠다는 결심이 서 승낙했다.
중문 집에서 예래교회까지는 약 5㎞ 정도 된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건천이었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문제가 없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사람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넘치는 곳이다. 장마철엔 다른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은 5㎞를 우회해서 예래교회로 가곤 했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는 비포장도로였다. 마을엔 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걸어서 마을로 가야 했다. 어떤 때는 새벽에 가기도 하고 한밤중에 가는 일도 있었다.
교회의 교세는 약해서 장년 성도는 남자 5명, 여자 10명 정도였다. 주일학교는 30명 정도 아이들이 있었고 중등부는 10명 정도 학생들이 나오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교회는 30평 정도의 석조 건물이었고 사택도 15평 정도 됐다. 그런대로 모양은 갖춘 교회였다. 대부분 작은 시골교회들이 그랬듯 재정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나는 감사하게도 약간의 사례비를 받곤 했다.
예래교회는 1947년 세워진 교회다. 이 교회는 경찰관인 김두혁이라는 분이 초등학교 교사인 정영기라는 분과 함께 예래 마을 청년들을 전도하며 세웠다. 김두혁은 경찰 관직을 마치면서 전도사가 되어 예래교회를 이끌어 왔고 그런 애씀을 통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해 석조 건물 교회당까지 건축했다.
그러나 전도사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교회는 다시 어려워졌고 곧바로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는 과정에서 중문교회 오공화 장로님께서 열심히 예래교회를 도왔다. 이후 다시 전도사님을 모시고 교회를 운영해왔지만 쉽게 부흥은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봉사하게 된 것이다. 감사하게도 교회는 약간씩 회복되었고 부흥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교회학교에 집중해 기도하면서 교회를 이끌었다.
학생들은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 생활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 학생들 부모님들은 대개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들은 나중에 교회의 주역이 됐다. 학생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냈다. 그때 학생들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모습을 기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1) 잡화점 사업 뛰어들었다 출자금도 못 건지고 사업 접어
교회 분리되는 과정에서 교회 재정이
어려워지는 것을 본 고 전도사 권유로
제대로 봉사하기 위해 잡화 가게 열어
제주 서귀포시 상예동으로 옮겨 세워진 예래교회 모습.
예래교회를 세운 김두혁 경사는 신의주 출신으로 해방 이후 북한 공산당 간부가 되라는 말을 거부했다가 반동분자로 찍혀 홀로 월남한 분이다. 그는 영락교회 교인으로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자 서귀포에 파견된 분으로 주민들을 전도했다. 이후 김 경사는 교회가 부흥되자 경찰직을 내려놓고 목사가 됐다.
지금 예래교회는 예전에 있던 곳이 아니라 서귀포시 상예동으로 이전했다. 이곳에 아담한 예배당을 건축해 예배를 드린다. 예래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시련과 은혜를 경험했다. 사업은 잘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지만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다. 약 2년 6개월 정도 교회를 섬기면서 몸과 마음이 서서히 안정됐다. 이 시기는 나에게 더 없이 귀중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발견하는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교회학교 출신 중에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 많다. 이때 활동했던 학생들이 후에 목회자가 되기도 하고, 관공서 등에서 봉사하는 귀한 일꾼들로 성장했다. 손으로 꼽으라면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서울 강서구 늘빛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강정훈 목사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주일학교 교사의 자질 향상과 교육 자료 제공을 목적으로 1962년 창간된 월간지 ‘교사의 벗’ 전 발행인으로 타고난 글쟁이다. 어려운 시절을 잘 견디고 훌륭하게 성장해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업(장사)은 예래교회에서 시작했다. 그때는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경제 사정이 어려운 시기였다. 제주 역시 경제가 어려워 돈이라고는 쉽게 만져 보지 못했다. 유채 농사를 하거나 고구마를 수확하는 추수기에야 겨우 돈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교회 봉사를 제대로 하려면 재정이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고성용이라는 전도사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고 전도사는 원래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큰 장사를 해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갑자기 장사가 어려워져 고향으로 돌아와 예래교회를 섬겼다.
고 전도사는 교회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교회 재정이 어려워지는 것을 보고 당시 5만원을 출자하면서 나에게 장사를 시작해 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일단 동갑내기인 강 집사와 함께 장사를 시작했다. 마침 교회 사택이 도로변에 있었다. 그곳에 가게를 마련하고 15만원을 가지고 고 전도사님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잡화 가게를 시작했다. 고 전도사와 나는 큰 희망을 걸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열심히 장사에 뛰어들었다. 제주읍과 모슬포, 서귀포에서 도매상을 통해 물건을 사가지고 와서 가게에서 팔았다.
처음엔 장사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갑자기 주변에 경쟁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돈도 생각만큼 벌리지 않았다. 그래서 강 집사와 다시 의논해 가게 규모를 줄이기로 했다. 그때 나는 가정을 책임지고 농사도 짓고 있던 중이라 강 집사에게 가게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사업에서 손을 뗐다. 출자한 자본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첫 사업을 접은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2)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자금 돌지 않자 사채까지 빌려 써
송 집사 권유로 고무신 장사 시작했다
재미 붙여 교회사택 고쳐서 가게 독립
이웃들 딱한 사정 들어주며 외상 주다…
원응두 원로장로가 고무신 장사를 하던 당시 중문 마을 모습.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 장사였다. 6·25전쟁 때 월남한 송경호 집사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옷감을 파는 가게인 포목점(布木店)을 운영했다. 부산에서 물건을 사 와 제주에서 팔았다. 어느 날 송 집사가 자신의 가게 한쪽에 고무신을 팔아보라고 권유했다. 고무신 운반 값으로 한 켤레당 1원씩을 공제하고 수익금을 반반씩 나누자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고무신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
무자본으로 가게까지 얻게 된다는 것에 감사했다. 다행히 초기에는 고무신 장사가 잘됐다. 그 당시 사람들은 거의 다 고무신을 신었다. 가게에 영업에 집중해 열심히 하니까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송 집사가 이제는 독립해서 나 혼자 장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귀가 솔깃했다. 나는 교회 사택을 고무신 가게로 꾸몄다. 처음에는 부산에서 고무신을 떼다 팔다가, 제주읍 동문시장에서 사서 팔았다. 가게 손님 모두 이웃사촌이었다. 현금이 없을 때라 대부분 외상 거래였다. 가을에 추수해서 갚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답답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손님들의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약해 딱한 마음에 외상으로 물건을 주었다. 돈이 생기면 갚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좀처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수금은 애초 약속대로 되지 않았다. 그냥 고무신을 가져간 사람 중에는 얘기도 없이 이사 가는 사람이 생기고 병들어 죽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외상이 쌓였고 자금이 잘 돌지 않아 고무신을 떼어 오기가 어렵게 됐다.
하는 수 없이 비상수단을 썼다. 물건을 사기 위해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래야 장사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리대금업자의 이자 이율은 4%에서 10%에 달했다. 그리고 더 힘들었던 것은 각 처에 장돌뱅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골치가 아팠다. 그 사람들이 질 낮은 싸구려 고무신을 가지고 와서 깡이라는 이름으로 헐값으로 고무신을 파는 바람에 우리 가게의 고무신은 잘 팔리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한두 켤레 파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한 켤레도 팔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결국 빛 더미에 앉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3801㎡(1150평) 되는 밭을 팔아 빚을 갚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기장 교단 측이 가져갔던 예배당 부지를 오공화 장로님이 넘겨받아 무임으로 나에게 땅을 빌려줬다. 나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다시 그 땅에 66㎡(20평) 규모의 상가를 지었다. 다시 한번 도전을 했다. 이번에는 고무신만이 아니었다. 고무신으로는 수입이 너무 적었다. 고무신과 함께 다른 상품을 진열해 잡화 가게를 겸하기 시작했다.
실패한 경험이 있어 열심히 장사에 매달렸다. 욕심이 넘쳤다. 현재하고 있는 장사들이 마음의 양에 차지 않아 물건 종류도 대폭 늘렸다. 여기에 또 식료품까지 함께 팔았다. 장사는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실망감에 빠져들었다. 많은 고민을 했다. 그렇지만 당장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3) 심한 빚 독촉에 유산으로 받은 땅 다 팔고 빈털터리
사람 죽이던 독약이 농약으로 둔갑 판매
양심의 가책과 외상값 때문에 장사 접고
신문보급소와 서점 열었지만 잘 안 팔려
원응두 원로장로가 사업할 당시 3남매 모습. 원희종 제주하영교회 목사,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원진희 갈릴리교회 집사의 어린 시절(왼쪽부터).
장고 끝에 악수를 뒀다. 종묘 사업에도 손을 댔다. ‘흥농종묘사’라는 이름으로 농약과 종자를 팔았다. 중문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곳이어서 사업을 하면 잘될 것 같았다. 제주시에서 농약과 종자들을 가져다가 팔았는데 장사가 제법 잘됐다.
손님들은 새벽부터 가게 문을 두드리면서 물건들을 사러 왔다. 당시 논과 밭의 곡식엔 진딧물과 ‘멸강나방’이라는 해충이 생겨 피해를 주었다. 이때 농협에서는 ‘파라치온’과 ‘마라치온’이라는 극독성 농약을 판매했다. 나도 이 농약들을 팔았다. 그런데 이 농약은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 때 인명 살상용으로 사용했던 약품이다. 이것을 농약으로 만들어 판매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 농약이 별로 개발되지 않아 농민들은 이 농약을 살충제로 사용했다.
농민들은 해 뜨기 전 서늘할 때 약을 뿌려야 하는데 농협은 아침 일찍 문을 열지 않아 대부분 우리 가게를 이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농약을 사용하는 순간 중독이 되는 것이었다. 독성이 강해 기절하기도 하고 심하면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는 신앙적 양심의 가책이 오기 시작했다. 우리 가게에서 파는 농약으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약을 취급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손님들의 외상은 여전했다. 손님 대부분 농민이라 돈은 수확이 끝나야 생기기 때문에 외상으로 물건을 가지고 가서 나중에 갚았다. 외상 수금은 쉽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장사를 접기로 했다. 그래서 농약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인도하기로 하고 농약 가게를 그만두었다. 여러 가지 장사를 해보았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되는 게 별로 없었다.
결국 생각하다가 신문보급소와 서점을 하기로 했다. 중앙일보 신문을 보급했다. 그리고 책은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가서 중고 책을 사다 팔았다. 그런데 신문 대금 역시 수금이 잘되지 않았다. 책 역시 잘 팔리지 않았다. 중문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각각 하나밖에 없었다. 관공서라고는 경찰서 농협 면사무소뿐이었다. 그래서 책 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옆 마을 서귀읍은 학교도 많고 관공서도 많아 큰 서점이 있었다. 그리고 사무용품 가게도 제법 큰 가게가 있어 잘되는 편이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서점도 접고 장사를 그만뒀다.
빚 독촉이 심했다. 하는 수 없이 또 땅 한 필지를 팔아 청산했다. 장사해서 돈을 벌어 보겠다고 애썼는데, 결국에는 유산으로 받은 땅 두 필지를 다 팔고도 빚을 정리하지 못해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다. 이젠 빈털터리가 되었다. 하다 하다 나중엔 초등학교 동창이 경영하는 극장에서 매점을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해 나갔다. 참으로 허탈하고 허망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서점은 망했지만 망할 때 가지고 나온 그 책들이 우리 자녀들의 지식 세계를 넓혀주는 살아있는 놀이터가 됐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4) 자본 없이 창업 가능하단 말에 덜컥 ‘복덕방’ 열어
대부분 복덕방에 대해 모르던 시절 제주에서 세 번째로 부동산업 시작
원응두 원로장로가 사업할 당시 중문교회 야외예배 때 중문해수욕장에서 부인 김춘년 권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 중 ‘복덕방’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당시 제주읍에는 제주부동산이란 곳이 있었다. 서귀읍에는 매일시장 쪽에 한 노인이 경영하는 복덕방이 한 곳 있었다. 당시 제주도민은 30만명 정도로 대부분 부동산이나 복덕방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기심이 생기면 못 참는 성격이라 나는 부동산업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해서 제주에서 세 번째로 부동산업을 하게 됐다. 그때 부동산업은 면사무소에 가서 신고하고 면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신고제였다. 허가를 받기 위해 신고를 하러 면사무소에 가보니 총무계장도 부동산업에 대해 처음 듣는 얘기라면서 알아보고 허가증을 내주겠다고 했다.
내가 ‘제일부동산’이라는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개업하니 동네 사람들이 와서 ‘부동산이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또 ‘무엇을 파는 곳이냐’며 묻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들면서 부동산 사무실은 쉬어가는 장소가 됐다. 나는 결명차를 끓여 오는 손님들을 대접했다. 사무실은 나중엔 동네 사람들의 쉼터가 됐다.
이때가 1973년이었다. 정부의 제주개발계획 정책에 따라 중문에 국제관광단지가 조성된다는 말이 나오자 외부인들의 땅 투기가 시작됐다. 이들은 중산간 지대 땅과 임야들을 매수하기 시작하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동안 사무실은 잘 돌아가 무척 바쁘게 일을 했다.
이렇게 부동산업을 운영하는 중에 서울에서 한 중개인이 내려와 자신은 장로의 아들이고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 물건들을 서로 연결하면서 함께 동업하자고 제의했다. 중개인이 땅을 매수할 사람을 보내고 나는 땅을 매입해 등기 이전까지 해 서류를 보내면 대금을 받는 형식이었다. 처음엔 서로 믿고 일을 잘했다.
어느 날 그 중개인은 내 명의로 돼 있는 수천 평 임야가 필요하니 자기에게 이전해 주면 대금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집사를 믿고 모든 절차를 밟아 그 땅을 이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는 금방 주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는 대금을 주지 않았다. 땅 대금을 주지 않아 독촉하니 자신의 빌딩을 팔아 갚겠다고 했다.
하지만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깜깜 무소식이었다. 결국 대금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중개인은 빌딩은 안 팔리니 자신의 별장이라도 팔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내용을 알고 보니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그는 노름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는 형편에 있었다.
그때 손해 본 금액이 5000만원이었다. 당시 돈으로는 꽤 큰 돈이었다. 결국 나는 모든 재산을 또 탕진하고 부동산도 그만두고 셋방살이를 살았다. 여러 곳으로 이사 다녔다. 부동산을 하며 자본이 잘 돌아갈 때 교회 근처에 부지를 마련하고 그곳에 제법 큰 2층집을 지어 생활했지만 그 집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아 부채를 청산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5) 천신만고 끝에 시작한 귤 농사… 열매 기다리며 5년 정성
2000평 과수원에 귤나무 100주로 시작
나머지 땅엔 집 짓고 원예작물도 심어
노력한 만큼 주어짐을 농사 통해 배워
원응두 원로장로는 사업에 실패한 후 과수원을 시작해 지금까지 귤 농원을 경영하고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고 했다. 당시엔 한 끼 식사도 어려운 형편이라 사실 고생이라는 단어조차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안 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일을 벌이고 접는 것을 밥 먹듯 했다. 고무신 장사를 시작으로 잡화점 식료품점 종묘상 서점 부동산업까지, 돈 버는 장사라면 실패를 걱정하지 않고 도전했다. 결과는 늘 빈털터리였다. 하지만 신앙의 힘은 남부럽지 않았다. 우리 가족 모두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삶은 한결같았다. 빚을 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았고 무슨 사업이든 작은 가능성만 보이면 겁없이 뛰어들었다.
눈앞이 캄캄할 때면 성경을 펴놓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시 126:5~6)는 말씀이 큰 위로와 희망이 됐다. 어릴 때 서당에서 배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至大本)이라는 교훈이 떠올랐다. 농사가 천하의 큰 근본이라는 뜻으로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접고 농사를 짓기로 했다.
제주에는 밭농사 말고는 할 만한 농사가 없다. 보통 고구마를 심고 보리 유채 깨 등을 심는다. 마침 그때가 제주에서는 서서히 귤나무 재배가 시작되던 때였다. 과수원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귤나무를 재배하기로 하고 귤 농사를 시작했다.
전세방을 정리하고 과수원 밭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6600㎡(2000평) 정도 되는 땅에 극조생 50주와 온주 50주 등 모두 100주를 심었다. 5940㎡(1800평) 정도의 땅은 정리되지 않은 미개간지였고 일부는 밭이었다. 그래서 그곳 16㎡(5평) 정도의 땅에 집을 짓고 부엌과 방 하나를 만들어 네 식구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식구가 하나둘 늘어 가면서 담을 쌓고 흙을 이겨 바르며 조금씩 집을 확장했다. 과수원을 늘이기 위해 가시덤불과 돌들을 치워가면서 조금씩 넓혀갔다. 남은 땅에는 원예작물을 심기도 했다.
귤 묘목 심을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귤나무를 심었다. 새벽에 밭에 나가 자갈을 줍고 밭을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나무를 심었다고 해서 금방 귤을 따는 것은 아니다. 그 나무가 자라기까지 돌봐야 한다. 탱자나무를 심어 접붙이면서 감귤나무 묘목을 늘려 갔다. 겨울엔 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짚으로 나무들을 싸서 보호해야 했다. 정성을 다해 농사일에 전념했다. 틈틈이 영농서적을 구해 읽어 가면서 공부를 했다. 귤 농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앞날을 바라보며 열심히 귤 농사에 빠져들었다.
1968년 희룡(국토교통부 장관)이가 여섯 살 때 깨달은 게 있다. 농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명이자 가장 정직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수고하고 노력한 만큼 주어진다는 것을 귤 농사를 통해 배웠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농사는 욕심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나무들이 어려 귤이 달리지 않았다. 애가 탔지만 5년 정도 땀을 흘리며 기다려야 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6) 처음 심은 귤나무 100주에서 20관 수확의 기쁨 맛봐
다음 해엔 100관, 해마다 두 배로 늘어 국내 유기농업 선구자 오 집사 만난 후
친환경 농업에 대해 새로운 인식 갖고 해오던 농법 버리고 유기농 재배 결심
원응두(화살표) 원로장로가 유기농법으로 친환경 재배를 하면서 정농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모습.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는 말씀이 있다. 옛 속담의 종과득과(種瓜得瓜) 종두득두(種豆得豆)라는 말과 같다.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다’는 뜻이다. 처음 심은 귤나무 100주에서 75㎏(20관)을 수확했다.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귤 농사로 첫 수입을 얻고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 해에는 376㎏(100관)을 수확했다.
해마다 두 배로 수확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했던가. 이번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아침엔 해 뜨기 전 집을 나와 일하다 저녁 때는 캄캄해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했다. 몸은 힘들었다. 그러나 마음은 편했다. 부지런히 일하면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중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집을 찾았다. 채권자들이었다. 내가 빚을 다 갚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때마다 사정사정해 매달렸다. 이자를 복리로 계산해 차용증서를 써주곤 했다. 빚을 갚으려고 틈틈이 품팔이를 했다. 하지만 그 수입으로 조금씩 갚기는 해도 이자를 갚기란 버거웠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큰아들(희종)이 교육전도사로 봉사하는 경기도 남양주 한샘교회 오재길 집사라는 분이었다. 그는 유기농업을 하라고 말했다. 오 집사는 초대 정농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그 조직을 이끌어 왔다. 어려서 일찍이 월남해 자수성가한 분이었던 오 집사는 국내 유기농업 분야에선 선구자였다. 그는 내가 제주에서 귤 농사하는 것을 알고는 유기농으로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었다.
당시는 유기농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던 때였다. 나 역시 유기농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 집사를 만나 친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많은 것을 배웠다. 나도 친환경으로 귤을 재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귤 농사를 유기농으로 하기로 하고 유기농법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관련 도서도 사고 유기농을 한다는 사람을 수소문해 직접 찾아가보기도 했다. 내가 유기농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과거 종묘사를 하면서 인체에 해로운 독성 농약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양심의 가책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해롭게 하는 농약을 팔아 왔다는 생각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래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기로 했다.
나는 정농회와 오 집사를 만나 ‘뿌린 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말씀을 확실하게 배웠다. 친환경 농업에 대해 새로운 인식도 갖게 됐다. 지금까지 해오던 농법을 과감히 버렸다. 정농회 회원으로 가입도 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친환경 운동에 참여했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새롭게 하기로 작정하니 하늘을 나는 새가 되는 기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7) 많은 시행착오 겪었지만 최고의 유기농 귤로 인정받아
농약 대신 흑설탕 식초로 만들어 쓰고
화학비료 대신 자연 퇴비로 토질 바꿔
몸에 좋은 먹거리 제공하기 위해 노력
원응두 원로장로가 2000년 11월 열린 친환경 농산물 축제 품평회에서 한갑수 농림부 장관으로부터 받은 과일류 부문 최우수상장.
처음엔 유기농법을 몰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배워야 했다. 책을 사서 읽었고 강연회도 찾아다녔다. 당시 제주에서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1호였다. 나는 화학 성분 농약 대신 흑설탕·식초 농법을 썼다. 흑설탕에 현미식초를 섞어 농약 대신 살포했다. 이것은 화학 약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흑설탕과 식초를 1:1로 섞은 것이다. 내가 직접 만든 친환경 제품으로 이를 그대로 사용했다.
또 고급 유기질 비료도 만들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그대로 보전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지금까지 화학비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땅이 산성으로 변화했고 나무가 독성을 먹고 자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산성화된 땅을 알칼리 성분이 많도록 토질을 바꿔야 했다. 그래서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것을 중단했다. 자연 퇴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유기농법으로 자체적으로 만든 약을 사용하다 보니 병충해가 잘 듣지 않았다. 귤 모양도 형편없고 윤기도 나지 않았다. 상품 가치도 없어 보였다. 수확량도 전보다 떨어졌다.
그래도 유기농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고집스럽게 이 같은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은 사람들에게 유기농이 많이 알려지고 유기농에 대한 이해와 유기농 상품을 선호해서 친환경 농산물이 인기가 있다. 이렇게 친환경으로 귤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땅에 지렁이도 생기기 시작했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풀이 너무 빨리 자라 힘들었다.
귤나무 아래 풀에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풀을 그대로 베어내어 그 풀을 다시 거름으로 사용했다. 풀을 거름으로 사용하니 땅들이 살아났다. 땅이 비옥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기농으로 농사하기란 절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살리고 땅을 살리기 위해서는 정말 필요하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유기농법은 필수적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나는 이런 유기농 방식을 알게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유기농에 대해 무지했을 때 귀한 분을 만나 올바른 농사법을 배웠다. 친환경 농산물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정농회를 연결해주셨고 회원으로 활동하는 기회도 주셨다. 땀을 흘린 만큼 기쁨의 열매는 풍성했다. 농사만큼 정직한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유기농 재배로 귤 농사를 하면서 정직과 성실이야말로 최고의 신용이라는 것도 배웠다. 힘들게 수확한 귤을 친환경 상품을 유통하는 한살림과 정농회가 인정해 줬다. 그러는 중에 우리 농장에서 재배한 귤이 2000년 11월 17일 전국 농산물 경진대회에서 과일류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농림부 장관상장을 받고 부상으로 쌀 두 포대(20㎏)를 받았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자연을 보전하고 사람을 살리는 유기농법이 확산되는 운동을 계속해나갈 작정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8) 세 가지 농사철학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리라
주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직업인 농사
땅의 정직함 알고 욕심 부리지 않으며
신토불이·삼건·생명농업 원칙 꼭 지켜
원응두(오른쪽) 원로장로와 부인 김춘년 권사가 지난달 7일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 제일농원에서 신앙으로 일궈온 농원 이야기를 하면서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다.
나는 농사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통해 땅을 일구고, 땅의 열매를 얻기 위해 땀 흘리는 평범한 농부다. 지난날 많은 사업도 해봤고 실패도 수없이 경험했다. 그러나 농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돈이 속이고 사람이 속이는 법이다. 나는 땅은 정직하다고 믿는다. 사람이 땀 흘리고 수고한 만큼 땅은 우리에게 준다. 농사를 지으면서 신앙도 배웠다. 정직하게 주어진 일에 열심히 땀을 흘리며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선물을 주신다는 것을 말이다. 대자연 앞에서 욕심부리지 않고 차곡차곡 해나간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직업이자 소명이기 때문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눕는 생활을 90 평생 이어오지만 늘 새롭다.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는다. 힘이 부치면 쉬고 기력이 나면 일한다. 대가를 바라서 일하는 게 아니다. 노동의 대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도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하라고 했다.
가끔 자식들에게도 땅의 정직함을 이야기하곤 한다. 땅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아흔을 넘겼지만 아직도 밭에 나가 일하는 데 지장이 없다. 동갑내기 아내도 마찬가지다. 일할 때는 즐겁고 기쁘게 일한다.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내가 농사일을 하면서 깨달은 지혜다. 사람들은 이제 좀 쉬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든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와 아내는 농장에 거름도 주고 전정도 하고 귤을 따고 판매하면서 지낸다. 농장 이름은 ‘제일농원’이다. 그 이름에 합당하게 농사를 지으려 한다. 가을에는 귤을 수확해서 주문 들어오는 것을 택배로 판매한다. 요즘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있어서 귤 판매가 훨씬 수월하다.
탐스럽게 달린 노란 귤들을 보면 힘이 절로 난다. 정성을 다해 나의 힘닿는 데까지 일을 할 생각이다.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내가 배운 세 가지 농사철학을 지킬 생각이다. 먼저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나는 이 신토불이라는 말을 어디를 가든 잊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우리 농산물을 애용하자고 전한다.
다음은 ‘건토’(健土) ‘건식’(健食) ‘건민’(健民)이다. 인간의 행복은 건강에 있다는 ‘삼건’(三健) 원칙과 기준을 지키며 살 것이다. 마지막은 ‘생명농업’(生命農業)이다. 농약이나 비료 대신 퇴비나 한방 영양제 등을 사용해 자연환경과 인체에 해가 없는 농업을 지향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이자 기도이다.
이 세 가지 농사철학, 건강한 몸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며 순종하는 마음이 농부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신앙생활을 통해 깨달았다. 과거 중문교회는 동네 한가운데 우뚝 서 있어서 중문 어디서나 교회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회가 모든 생활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19) 천금보다 귀한 주님 말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성도들 기도와 땀으로 성장한 중문교회
장로로 섬기면서도 순종을 제일로 삼아
중문교회 통해 믿음을 얻고 은혜 입어
원응두(가운데) 원로장로가 믿음의 터전인 제주중문교회에서 장로들과 함께하고 있다.
대물림이라는 말이 있다. 가게나 기업 등을 후손에게 남겨 주어 자손이 그것을 이어 나간다는 뜻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조용기 목사님이 세우신 여의도순복음교회도 처음엔 천막 교회였다. 영락교회 명성교회 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 연세중앙교회 등도 처음엔 보잘것없이 작고 초라했다. 갑자기 대형교회가 된 예는 없다. 신앙도 그렇다. 목사와 장로, 권사와 집사도 되고 싶다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교회도 농사와 같다. 뿌린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배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한자성어가 생각난다. 사람이 하는 행동에 따라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로 돌아오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우리 격언이나 속담도 비슷한 고사성어가 많다.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이치에 대한 함축적 지혜를 담고 있으므로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관련된 고사성어가 있는지 찾아보곤 했다. 인과응보 사필귀정 결자해지 권선징악 출이반이 등이 그것이다.
평생 교회를 섬기면서 가장 보람된 일은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뛰놀던 철없던 아이들이 어느덧 장성해 집사 장로 교역자가 되어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 한량없이 기쁘다. 아이들이 어른이 돼 또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마 교회는 이렇게 이어져 가는 것 같다. 중문교회도 옛날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었을 때가 있었지만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게 된다.
중문교회는 108년이란 세월 속에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와 땀 위에 세워졌다. 이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정말 수고하고 애쓴 분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지금도 한평생 같이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장로로 섬기면서도 순종을 제일로 삼았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물론 목회자에게도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때때로 내 생각과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순종하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하고 조건 없이 순종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17∼23)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다. 이 중문교회를 통해 믿음을 얻었고 이 교회를 통해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무엇을 드려야 할지 늘 고민했다. 장사할 때는 헌금을 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구겨진 지폐를 그대로 드린 적이 없다.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림질해 봉투에 담았다. 형식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정성을 다해 헌금했다.
중문교회에는 중보기도팀이 있다. 젊은 여자 집사들님과 권사님들이 일주일에 1시간 이상 기도하는 모임이다. 나는 기도 모임에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심야 기도와 금식 기도는 물론이다. 믿음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성경을 묵상하고 꾸준히 기도하는 길밖엔 다른 방법이 없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0) 심각한 주차난에 교회 앞 땅 매입, 주차장 부지로 헌납
중문 관광단지 들어서며 외지인 몰려
관광객들 주일 예배드리러 교회 왔다
불법주차로 스티커 끊기며 낭패 당해
2003년 6월 부산 해운대호텔에서 열린 제37차 한국국제기드온협회 전국대회 모습.
교회는 세상의 변화보다 한발 앞서 가야 한다. 뒤처지는 순간 성도들은 하나둘 등을 돌린다. 중문교회는 지역 사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늘 크고 작은 문제가 많았다.
중문관광단지는 한국관광공사가 1978년부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 대포 색달동 일원에 조성한 관광단지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따뜻한 기후로 이국적 정취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관광 1번지이다.
제주도는 한반도 최남단 평화의 섬이기도 하다. 2018년까지 중문관광단지엔 하얏트호텔 신라호텔 롯데호텔 스위트호텔 하나호텔 씨에스호텔 켄싱턴호텔 부영호텔 부영콘도 한국콘도 등 숙박시설 10개소와 중문골프장(18홀), 제주국제컨벤션센터·제주국제평화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또 91년 4월 한·소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미·중·일 등 열강들의 정상회의를 비롯한 각종 대형 국제회의가 개최돼 세계인의 시선을 끌었다.
관광단지가 들어서자 중문에도 많은 외지인이 몰렸다. 성도도 점차 늘었다. 관광객 중엔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교회에 사람이 몰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차를 가지고 교회에 오는 성도와 여행객들이 많아지면서 주차난이 심각해졌다. 교회는 넓은 주차장이 필요하다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아무 데나 주차를 했고 그러면 주차 단속반이 나와 스티커를 끊었다. 예배 드리러 교회에 왔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왕왕 생겼다. 그런데 어느 주일예배 후 교회 문을 나서는데 교회 앞에 있는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차장 부지로 제격이었다. 991㎡(300평) 정도 되는 땅이었다. 80년 당시 그 땅 가격은 2500만원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땅을 매입해 교회에 헌납했다. 그렇게 골칫거리였던 주차장 문제를 쉽게 풀었다.
교회 주차장 문제는 해결했지만 정작 우리 집의 교통난은 해결하지 못했다. 운전을 매우 하고 싶었지만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빚을 갚고 여유가 있을 때 하겠다고 하다가 그만 때를 놓치고 말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차를 몰고 다닐 수 없으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조그마한 가방 속에는 한국 국제기드온협회에서 만든 전도지와 협회에서 발행하는 조그마한 신약전서, 시편·잠언 성경책을 담고 말이다.
손바닥 크기만 한 작은 그 성경을 볼 때마다 내가 회심하게 된 요한복음 쪽 복음을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공항에 가서도 성경책과 전도지를 나누며 전도했다. 육지에 갈 기회가 생기면 버스 비행기 지하철 기차에서도 전도했다. 지하철에서는 통과하는 역마다 내려 전도하곤 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전도의 중요성을 알고 전도할 수 있는 기관에 적극 참가했다. 극동방송과 기독교방송 등 여러 방송 매체의 회원과 이사로 참여했다. 이제 나이가 아흔에 이르다 보니 직접 현장에서 성경을 나누는 활동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내 기도는 멈추지 않고 있다. 북한 땅에 복음의 꽃이 활짝 필 때까지 말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1)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크다”… 나눔의 행복 실천
제일농원 경영하며 원칙 첫 번째는 수확한 귤의 20% 선교 후원금 사용
6남매 양육과 신앙으로 가정 꾸리며 도와준 아내에게 고마움 전하고 싶어
원응두 원로장로 부부(앞줄 의자에 앉은 이)와 가족들이 지난해 추석을 맞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통은 나누면 절반으로 줄어들고 행복은 함께하면 두 배가 된다.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크다고 했다. 제일농원의 경영 원칙 첫 번째는 수확한 귤의 20%는 복지시설이나 교회 선교 후원금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정했다. 정성을 들여 생산한 귤을 교인들과 나누어 먹기도 하고 제주에 여행 왔다가 중문교회에 예배드리러 온 분들에게 선물로 귤을 나눠준다. 틈틈이 복지시설이나 목사님들에게도 귤을 보내곤 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진 게 없어 드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음의 중심을 드리면 된다.
중문교회는 우리 집안 믿음의 고향이자 내 젊은 시절이 오롯이 담긴 교회이다. 나의 사랑하는 육남매 자녀가 자란 곳이기도 하다. 나는 믿음의 후배들에게 ‘중문교회를 변함없이 사랑한 신앙의 선배’로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한다. 영원토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말이다. 나아가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한반도가 통일되는 그날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할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뤄지지 않으면 천국에 가서도 쉬지 않고 기도할 작정이다.
살아오면서 고마운 사람이 있다. 돌아보면 은혜의 도가니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믿음 생활을 하고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차츰 건강을 회복했다. 몸이 건강해지자 광복을 맞이하고 4·3사건을 지내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그런 중에 이웃에 있는 동갑내기인 김춘년과 결혼했다. 그때가 21살이었다.
이웃에 있는 어르신이 중매를 서주셨다. 처가는 바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를 나가면서 신앙으로 가정을 꾸려 나갔다. 아내도 처음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 원래 믿지 않는 가정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처음엔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사업을 할 때도 크게 반대하지 않고 묵묵히 도와주었다.
연속되는 사업 실패에도 크게 탓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해 권사 직분을 받고 지금까지 함께 신앙 동지로 신앙 1세대가 됐다. 생각하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함께 잘 지내 온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2남 4녀를 두고 있다. 큰아들 희종이는 24살 때 낳았다. 둘째 희룡이와는 6살 차이가 난다. 위로 아들 형제이고 밑으로는 모두 딸이다. 당시 웬만한 가정은 자녀들이 6~8명이 되곤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장사하는 시기라 늘 교회에서 지냈다. 아이들도 교회 가는 것을 좋아했다. 때로는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니곤 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이들을 놓고 새벽기도회를 갔는데 큰 아이가 잠에서 깨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혼자 교회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큰아들은 서원대로 목사가 됐다. 자식들은 6남매이지만 서로 싸우지 않고 우애가 돈독한 믿음의 형제로 자랐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2) 자식들 중 하나는 사역자로, 또 하나는 나라를 위해…
평소 목사님과 전도사님 존경했기에
늦게라도 공부해 목회자 되려 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성경학교 진학 포기
마음속에는 늘 목회자에 대한 꿈 간직
장남 원희종(가운데) 목사의 인도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다.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장남은 처음엔 서울에서 부교역자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다 2009년 서울 송파구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이후 7년 정도 목회하다 제주에 내려와 제주하영교회를 개척했다. 자체 건물이 없이 세를 얻어 목회하고 있지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아내는 아들이 세운 교회에 출석하고 나는 아직 중문교회를 섬긴다.
둘째는 현재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서울 양천구에서 국회의원 3선을 거치고 제주 도지사로 일하다 지금 장관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딸들의 이름은 ‘진 선 미 신’을 넣은 진희 선희 미희 신희이다. 큰딸은 결혼해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남편과 함께한다. 둘째 딸은 제주에 살면서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다니고 있다. 셋째와 넷째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 그래도 모든 자녀가 믿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을 늘 감사한다.
아이들이 자랄 때에는 환경적으로 교육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공부만큼은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가운데 자녀들 모두 대학까지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사업상 육지에 갔다 올 때마다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샀는데, 과자나 장난감보다는 만화책이나 교양서적 등을 사다 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한글을 깨우치고 책 읽기를 좋아했다. 공부에도 다들 소질이 있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인간성이 좋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나의 교육철학이었기 때문에 비뚤어지거나 잘못된 생활 태도에 대해선 방관하지 않았다. 때로는 매를 들어 혼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자율성에 맡겼다. 공부하는 데에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신앙에 대한 것만은 철저히 가르치려고 했다.
매일 저녁 식사 후엔 가정예배를 드렸다. 예배시간에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도 돌아가면서 하도록 했다. 교회 예배 참석하는 것만큼은 철저히 했다. 신앙교육은 철저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훈도 누가복음 2장 14절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정했다.
1970년대 중후반 아마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작은 아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로 기억한다. 이때는 사업에 실패해 과수원으로 들어와 생활했던 시절이다. 집에는 전기도 없었다. 호롱불과 촛불 밑에서 아이들이 자랐다. 당시 대부분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 갔다 오면 농사일을 도왔다.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키웠다.
나는 공부를 많이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평소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존경했기 때문에 늦게라도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주노회에서 운영하는 고등성경학교에 가보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반대해 진학을 포기했다. 마음속에는 늘 목회자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래서 자식 열매 중 하나는 사역자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작정했다. 또 하나는 나라를 위해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3) 새벽기도·가정예배로 키운 육남매, 모두 주님의 자녀로
부모가 대신할 수 없는 자녀들의 어려움
마음 아프지만 오직 기도로 주님께 맡겨
목사 된 맏아들 외 자녀들엔 자율권 줘
원응두 원로장로가 지난해 5월 31일 아내 김춘년 권사와 함께 장남이 섬기는 제주하영교회 창립 6주년 감사 예배를 드린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의 평생 일터 제일농원은 한라산 기슭 얕은 경사지(8264㎡·2500평)에 자리 잡고 있다. 귤을 크기별로 분류하는 선과장 옆 자재창고에 아내 김춘년 권사와 살고 있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단출한 살림살이다.
누구든지 그러겠지만 자식들을 키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그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도 나의 자녀들이 나도 모르는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부모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다. 오직 기도로 도울 수밖에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키워 주신다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늘 다짐하곤 한다.
목사가 된 맏아들 외 다른 자녀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줬다. 차남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어려서부터 영특해 한글도 일찍 깨우쳤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공부를 무척 잘해, 주위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초중고 시절 1등을 놓친 적이 없어 원‘일’룡으로 불렸다. 원 장관은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 암송대회를 하면 산상수훈의 마태복음 5장, 주기도문이 담긴 6장,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로 시작하는 7장 등을 내리 외워내곤 했다. 중학교에 가서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는 제주시에 있는 명문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82년 수능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노동운동을 하다 뒤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2000년에 정치에 입문했다.
원 장관을 볼 때마다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내가 고무신 가게를 할 때다. 중문 5일장에 고무신을 가져다 놓고 팔았다. 5일장으로 짐을 옮길 때 손수레를 이용했다. 그날도 아침 장사할 물건을 싣고 5일장으로 가는 데 큰 아이는 뒤에서 손수레를 밀고 둘째 아이는 옆에 매달려 손수레를 타겠다고 졸라대며 손수레 옆에 매달려 쫓아 왔다. 나는 정신없이 손수레를 앞에서 끌고 가는데, 갑자기 둘째 아이의 비명이 들렸다. 놀라 뒤돌아보니 작은 아이 왼쪽 발가락이 손수레 바퀴의 살에 끼어 발가락이 부러진 것이다.
나는 허겁지겁 피 흘리는 아이를 안고 동네 의원에게로 달려갔다. 그때는 정상적인 병원이 없어서 임시로 봉합만 하고 나중에 수술해 주리라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자라도록 수술을 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수술하지 못한 채로 지내고 있다. 늘 마음이 아프다. 이것 때문에 군도 면제되고 특별히 양천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나는 6남매를 새벽기도와 가정예배로 키웠다. 주일예배는 당연한 거고 예배 후에도 외식을 삼가고 집에서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누가복음 2장 52절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말씀 그대로 아이들이 알아서 오순도순 사이좋게 자라나 줬다. 딸들도 권사나 집사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손자 손녀를 합치면 여덟 명인데 신앙 안에서 자라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4) 어렵고 힘든 시기에도 믿음의 끈 놓지 않은 육남매
사고 후 건강 회복해 목회중인 큰 아들과
가시밭길 공직자 길 걷고 있는 둘째 아들
병중인 큰 딸과 나머지 세 딸들 바라보며
1980년 원응두 원로장로 부부와 2남 4녀 자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뒷줄 오른쪽 교복 입은 학생이 당시 제주제일고 재학 중이던 원희룡 현 국토교통부 장관.
돌아보면 시련도 많았지만 6남매 모두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 큰아들 원희종 제주하영교회 담임목사는 서울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다.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고 목회를 할 수 없을 수도 있었는데 무릎 수술만 받고 건강을 회복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둘째 아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도 어려움이 많았다. 서울대 재학 시절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4년에는 대학 동기 4명과 함께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오거리에서 노학연대 데모를 위한 유인물을 나누어 주다가 경찰에 붙잡혀 구속 위기를 맞기도 했다. 구로공단의 한 교회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했다. 또 인천 금속공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하루 일당 2900원을 받으며 살아갔다.
이런 운동의 결과로 희룡은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세상이 야속하고 원망도 들었지만 어찌할 수 없는 때였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아들을 믿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은 절대 포기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다행히 아들은 복학하고 졸업까지 했다. 늦었지만 사법시험도 보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돼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바라기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시기하고 질투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공직자의 길은 늘 가시밭길 같다.
제주 도지사 시절 얘기다. 제주도에는 한라산신제라는 행사가 있다. 이 행사를 할 때 도지사가 ‘초헌관’이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제단에 첫 잔을 올리고 절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원 지사는 절을 하지 않고 부지사에게 맡겨 그 제사를 치르게 했다. 이것 때문에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신앙의 힘으로 잘 견뎌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큰딸 진희도 학창 시절 작은 오빠와 마찬가지로 운동권 학생이었다.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현장에 있을 정도였다. 늦게 의사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진희는 2008년 18대 총선 서울 양천구 갑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빠를 돕다가 뇌경색이 와, 수술하고 반신마비 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차츰 경과가 좋아져 이제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병중에 있으면서 당한 아픔을 생각하면 아비로서 마음이 쓰리다. 건강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다.
나머지 세 딸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비로서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팠다. 자식 향한 모든 부모의 마음이겠지만 자녀들이 그저 건강하게 지내며 하는 일들이 잘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열매다. 부모는 자녀가 좋은 열매가 되도록 밑거름을 잘 줘야 한다. 그 길은 오직 기도하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도 기도한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로 온전히 세워지기를 말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5) 70세 생일 맞아 제주대학병원에 시신 기증하기로 서약
“너는 흙이니 흙으로…” 성경말씀 따라
신체·유골을 병원에 실험용으로 기증
기증사유 설명하고 가족들 동의 받아
70세를 맞는 생일에 제주대학에 시신 기증을 서약한 시신기증서.
2004년 70세가 되던 날이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고희(古稀)를 축하해줬다. 모든 식구가 집에 모여 큰아들 원희종 제주하영교회 목사의 인도로 감사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치고 나는 자식들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시신 기증 동의서였다. 나는 이미 제주대학병원에 시신을 기증하기로 작정하고 서약서를 작성했다. 가족들의 동의만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죽은 후 신체와 유골을 해부 실험용으로 기증하기로 서약했다. 제주대학에는 100번째로 기증하는 것이다. 후세들의 의학 연구를 위해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서약은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가족 동의 없이는 시신을 기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두 아들의 동의를 받기 위해 가족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누구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차분하게 시신을 기증하게 된 사유를 설명했다. 가족들은 모두 말없이 들었다. 드디어 두 아들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홀가분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나 역시 시신 기증을 결정하고 서약서를 쓰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고민도 많았다. 그러나 이미 정한 것,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동의서에 도장을 찍는 두 아들의 마음과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나는 수없이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움 없이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어느 날 성경을 읽는 중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말씀이 마음에 닿았다. 문득 우리 모든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죽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봤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열매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아무리 공을 들여 자녀들을 길러도 인도하시는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원한다고 다 내 뜻대로 자녀들을 키울 수 없는 법이다.
내가 자식들에게 줄 것은 별로 없음을 나는 잘 안다. 물려 줄 돈도 없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물려 줄 것이 없다. 다만 유일하게 물려 줄 수 있는 건 믿음과 신앙뿐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밖에 없다. 아마 자식들도 큰 기대를 안 할 것이다. 물려줄 세상 유산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럴 것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들에게 좋은 것, 많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내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이웃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가정의 가훈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6) 내 인생은 믿음의 삶…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인도
질병, 사업 실패, 믿었던 이의 배신 등
역경 있었지만 믿음 안에서 살아가며
짧지 않은 삶이지만 자녀들 건강하고
교회 섬기고 기도 할 수 있어 감사
원응두 원로장로가 농사를 시작하면서 겪은 일 등을 기록한 영농일지.
시신기증서약을 하기 전까진 솔직히 막연했었다. 이전까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지금까지 여러 유명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죽음에 대해 들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정말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우리 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내가 죽는다면 시신을 기증하자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죽어서라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육체가 유용하게 쓰인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온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 질병으로 많은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업을 한다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세상이 말하는 실패를 여러 번 경험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속기도 했고 배신도 당했다. 세상적인 물질과 풍요를 마음껏 가져 보지도 못했다. 늘 궁핍하게 살았다. 그래도 오늘까지 잘 살아왔다. 몸은 쇠하여 가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그 은혜로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그 열매들을 기대하는 믿음이 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내 나이 이제 89세다. 제주 중문 마을에선 손꼽을 만큼 나이든 축에 들어간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지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절대 짧지 않은 인생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일, 숨 막히도록 괴로웠던 일이 있었고 반면 기쁘고 행복했던 날들도 많았다. 마침 이렇게 지면을 통해 지나온 내 모습을 뒤돌아보게 해준 국민일보에 감사를 드린다.
원고를 쓰면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그저 부끄러운 마음이다. 마치 어제 일인 듯하다. 하나님을 알고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하셨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나의 삶은 어쩌면 믿음의 삶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미숙한 점도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다. 비록 가진 것은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차고 넘친 것 같다. 그래도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게 지내고 아직도 건강한 몸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사람을 믿는 편이다. 어떤 때는 그것이 내게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사람으로 실망도 하고 좌절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모든 사람이 나를 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하게 믿는 것은 그런 사람에 대한 믿음을 통해 또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을 믿고 나름대로 일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런 믿음이 깨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에 실패하면서 빚에 내몰리자 채권자들이 집을 찾아와 돈을 달라며 욕하고 협박하고 달려들 때는 정말 힘들었다. 특히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돈을 갚으라고 재촉할 때는 정말 괴로웠다. 도망도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잘 이겨내 여기까지 왔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7) ‘믿음대로 된다’ 말씀 붙들고 포기하지 않는 삶 노력
괴롭고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면 안돼
그 역경 통해 새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
남은 인생 동안 받은 사랑 갚기를 소망
원응두 원로장로 부부가 2004년 고희연을 마치고 6남매와 한자리에 모였다. 맨 오른쪽이 맏아들 원희종 목사, 왼쪽 첫 번째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지금까지 자식들 앞에서는 집안 살림이나 돈 문제 등에 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살았다. 그렇지만 자녀들은 눈치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늘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한 가지 소망은 자식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기도할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만난다. 건강도 잃고 사업도 실패하기도 한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무너지고 자녀도 고난에 처할 수 있다. 나는 평생 신앙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모든 고통엔 이유가 있고 역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괴롭고 힘이 들어도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주님은 그 역경을 통해 새로운 일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씀을 믿고 쉽게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의지했다. 앞으로 내 삶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준비가 돼 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제 그 사람들에게도 나 역시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장로로서 40년간 한 교회에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쉬움뿐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 바른 것이었는지는 자신할 수는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좀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사실이다.
사람은 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나 역시 그렇다. ‘왜 그렇게밖에 못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겠지만 다시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건강하게 인도하신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 나도 그렇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에서도 지금까지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남은 생명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날까지,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나는 사업 실패 후 한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살아왔다. 그렇기에 남은 삶도 농사꾼이며 곱게 늙은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하나님 나라가 나의 본향임을 믿는다. 아브라함의 고백처럼 우리 삶은 나그넷길과 같다. 늘 어디론가 향하여 날마다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는 기쁜 일도 있겠고 괴롭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마다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다. 그리고 놀랍게 하나님은 그때마다 힘을 주셨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갈 생각이다.
***[역경의 열매] 원응두 (28·끝) “모두 하나님 잘 믿고 천국에서 만납시다”
한 알의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수많은
수고와 사랑의 손길이 있어야 하듯이
세상 살 동안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원희룡(뒷줄 왼쪽 네 번째) 국토교통부 장관의 부친 원응두 원로장로와 김춘년 권사가 낳은 6남매와 직계 가족들이 2004년 9월 27일 고희 잔치를 끝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이 많은 위로와 힘을 주었다. 성경 말씀 중에 시편 23편은 내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붙들고 즐기며 암송했던 말씀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한마디로 감사한 나날들이라 하겠다. 구순 문턱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아프지 않고 성경을 읽으며 교회에 나가 예배하며 믿음 안에 서 있을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나그네임을 잊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주님이 오라는 그 날까지 찬송가 315장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덧 초여름 날씨다. 과수원에서 굳건하게 서 있는 귤나무들은 지난 추운 겨울을 이기고 새로운 싹들이 돋아 올랐다. 그 추운 겨울을 무사히 지내고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 귤나무들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뛴다. 이제 곧 뜨거운 여름이 오고 풍성한 열매가 열리는 가을이 올 것이다. 그 탐스러운 열매는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무더운 여름 햇살을 이겨내야만 맛있는 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한 알의 열매가 맺어지기까지는 수많은 수고와 사랑의 손길이 있어야 함도 알고 있다.
나는 농사를 시작하는 날부터 영농일지를 쓰면서 하루에 일어났던 일들을 꾸준히 기록해 왔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 낡은 노트들을 다시 꺼냈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 속에 지나간 날들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 기록을 적으면서 느끼던 감정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 같다. 이제 마지막 날까지 꾸준히 하루 일들을 적어 나갈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우리 인생에는 중요한 문제들이 많다. 먹고 사는 문제도 중요하고 자기 꿈을 이루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 인생에는 누구나 끝이 있다. 누구든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결국 죽는다. 그러나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죽음 이후 인생이 완전히 갈렸다. 하나님을 믿은 나사로는 낙원에,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부자는 음부의 고통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을 때 우리는 세상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한다.
모세와 여호수아 등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후손들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하나님을 잘 믿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분께서 주시는 상급을 기대하라는 얘기다. 덧붙이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맡겨주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당부하신 말씀이다. 나도 미리 유언을 남긴다. “모두 하나님을 잘 믿고 천국에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