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위 성지 → 여산 성지→ 백지사터→ 여산 동헌→ 여산 숲정이 성지
어느새 마지막 날이다
비오던 어느 날, 200주년이었던가? 천막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미사드리던 날이 생각 나는 나바위 성지로 출발!!!
처음엔 화산 성당이라 불렀으나 화산동과 구분하기 위해 1985년부터 나함 지명을 따서 나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당 앞은 배가 다니는 뱃길이었다고 한다
1882년 공소가 설립되고 1897년 본당으로 지정되었다
1906년 베르모렐 신부가 안대동 성당에 기거하면
서 짓기 시작해서 1907년에 완공했다
부여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을 사서 벌목해 목재와 흙을 사용해 지었다고 한다
지금 마룻바닥은 그 때의 그 통나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겨울엔 추우니 마룻바닥을 다른 걸로 바꾸자는 신자들의 의견에 이병호 주교님이 안된다고 하여 지금도 그 때 그 모습으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팔괘 모양의 창문은 이 성당을 지을때 일꾼들이 중국사람들이어서 그 영향을 받았고 또 환기를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가운데 기둥은 남녀자리를 구분하기 위함이고 예비자는 성찬전례시 퇴장해서 회랑에서 따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한 곳에 정리된 봉헌함 바구니의 모습이 특이했다
단체 사진 한컷!!!
다음은 역사관(사제관으로 쓰던 곳을 역사관으로 개조)이다
나바위 성당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역사관을 나와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그리고 도착한 김대건 신부의 착지처!!!
김대건 신부는 이 곳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리고 향한 여산 성지
이곳에 도착했을때 신자들이 성가연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 성가연습을 잠시 멈추어 준것에 대해 감사했다 ^^
여산 성지는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외가이며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본가이다
세종때 여산구로 지정되면서 여산군을 장악하고 왕족을 제외한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수 있는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어 그들에게 바가지를 주며 밖에 나가서 먹을 것을 얻어먹으라 했더니 다들 얻지 못하고 돌아오자 도망가라고 내보내준거라 말했다고 한다 그들이 처형될 때 보니 그들의 옷에 솜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
먹을게 풍족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며 봉헌의 기도를 바치기로 했다
여산 성당은 신기한 게 많다
여산을 지킨다는 성모님! 여산에만 있다고 한다
봉헌금을 넣으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봉헌 초
이 곳을 방문하는 분들이 돌아가며 쓰는 성경 이어 쓰기 등이 이것이다!!!
여산성지를 지나 밑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백지사터가 나온다
신자들의 얼굴에 백지를 덮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순교하는 바람에 주님을 믿는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는 순교터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 대신에 사도신경을 바쳤다
백지사터 위로 조금 올라가면 여산동헌이 나온다
김제 동헌과 달리 여산 동헌은 단촐한 집 한 채와 순교터만이 남아 있었다
동헌 한 귀퉁이에 이곳을 오랫동안 지킨 듯한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백지사터를 떠나 100여미터를 걸어가면 숲정이 성지가 나온다
숲정이 성지에서는 감옥에 갇혀서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면서 순교하신 성인들을 위해 풍족한 현대사회를 되돌아보며 봉헌의 기도를 바쳤다
5주 동안 신자들과 함께 순례를 계획하고 많은 공부를 해오신 이수현 로렌죠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차량봉사에 협조해 주신 사목회장님, 두 부회장님, 여성협의회장님, 전례부장님, 애령회장님, 총무님, 연락과 제반사항에 협조해 주신 사무장님, 그리고 함께 해주신 신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순례를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 ^^
첫댓글 마리아 자매님. 신부님과. 성지순례길. 수고하셧습니다. 사진과 글을 보니. 까먹었던신부님의. 강의가 새록 되살아납니다. 또한 요약해서 자세히 올 려주신. 나바위에 위례. 정말감사드려요. 수고하셧습니다. 건강하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