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또 다른 시작 / 최미숙
12월 첫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달이기도 하다. 항상 똑같은 날인데도 이상하게 1월과 12월은 느낌부터 다르다. 첫 달은 계획을 세우고, 마지막 달은 왠지 엄숙해지고 무엇인가를 반성해야 할 것만 같다.
며칠 전까지 봄날처럼 따뜻하더니 갑자기 추워진 탓에 체감 온도는 영하다. 이제야 비로소 겨울 날씨답다. 사흘 전(28일) 수석 교사 연수 때문에 여수에 갔더니 호텔 입구 벚나무에 때아닌 꽃이 피었다. 생태계 모든 생물이 계절에 맞게 나고 자라는데 이상 기온으로 기이한 현상을 본 것은 처음이다. 그런다고 12월인데 벚꽃이라니 반갑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세상에 날씨까지 미쳤나 보다 생각했는데 이제야 계절도 제자리를 찾은 모양이다. 그래 이렇게 추워야 겨울이지.
점심 먹고 수업 자료 만드는데 기다리던 택배 문자가 왔다. 책을 배달한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이렇게 일부러 맞춘 듯이 11월 30일이라니. 가슴이 떨렸다. 완성본을 빨리 보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니 문 앞에 상자 일곱 개가 쌓여 있다. 현관문을 열고 낑낑거리니 놀란 남편이 나오더니 어디에 두냐며 들고 간다. 뭐가 이리 많냐고 묻길래 그냥 책이라고만 대답했다. 개봉 박두 하며 놀라게 하고 싶었다.
끈을 자르고 상자를 열었더니 예쁜 꽃 그림 표지가 유난히 돋보인다. 눈이 부셨다. 책 한 권을 꺼내 거실에 있는 남편에게 그동안 쓴 글로 만든 책이라며 내밀었다. 놀란 얼굴로 받아 한참을 보더니 ‘최미숙 수필집’문구가 눈에 띈 모양이다. 그제야 감을 잡았는지 “고생 많았네”라며 한마디 한다. 표지 앞뒤를 몇 번이나 살피고는 저녁 준비하는 동안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실은 3년 동안 글 쓴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화요일 일곱 시부터 열 시까지 연수 듣는다고 했기에 그런 줄만 안다. 큰 유세나 떠는 것 같아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비치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결과물(책)로 보여 주리라 생각했다. 책 내려고 할 때야 비로소 표지 그림 부탁하느라 오빠와 올케, 애들에게 말했을 뿐이다. 고민 끝에 그림을 바꾸기는 했지만 글을 쓰고,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는 방문을 닫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에 남편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자기 모르는 사이 혼자 책까지 낸 것에 내심 놀란 눈치다.
처음에 손위 오빠에게 표지 그림을 부탁했다. 부부가 취미로 그리기를 시작하더니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과 전시회도 하고, 가족 초상화도 그려 주곤 했다. 그런데 평생 갈 것인데 잘못했다가는 책 버린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꾸역꾸역 우겨 그림을 받았다. 속마음은 오빠가 그린 그림을 싣고 싶었다. 그랬는데 막상 만들고 보니 썩 내키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때마침 올케에게 전화가 왔다. 책 나올 시기가 넘었는데 연락이 없다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하란다. 내 마음을 읽은 듯이 그렇게 말해 줘 고맙다며 뒤늦게 화가이신 최 교장님 사모님께 부탁했다. 표지 그림이 나오기까지 4일이 걸렸다. 원래 계획보다 1주일이 늦어졌다.
책에 집중하느라 밥 먹으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지 몇 번을 부르고서야 일어선다. 모임 선생님들에게도 한 권씩 주며 자랑하라 했더니 ‘독박 육아’를 읽으면 자기에게 한마디씩 할거라며 멋쩍게 웃는다. 자신을 소재 삼았다고 안 좋은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니 그래도 속은 있는 모양이다. 내가 글 쓰는 줄 알았냐고 물으니 ‘연수 받는구나’생각했단다. 저녁에 가족 단톡방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대단한 일 했고, 축하한다며 전화가 빗발친다. 애들고 기뻐한다. 쑥스러웠지만 스스로가 대견했다.
책꽂이에 걸어 두었던 손대지 않은 달력은 2022년 1월을 가리키지만 나는 열한 달을 훌쩍 넘어 12월과 마주했다. 한 해를 돌이켜 봤다. 특별할 것 없는 생활의 연속인데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그래도 그중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글 쓴 지 3년(5학기) 만에 첫 수필집을 냈으니 일단 목표 하나는 달성한 셈이다. 그동안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한다는 생각에 행복하고 뿌듯했다.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날마다 말썽꾸러기들과 만나고, 책 출간 준비로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또 힘들 때면 좋은 사람을 만나 기운을 얻었고, 훌륭한 글쓰기 스승이 있어 든든했다. 올해는 참 복을 많이도 받았다.
2022년 글쓰기 반 마지막 글이다. ‘시작’이라는 주제를 받고 고민했던 일이 얼마 전 같은데 벌써 마무리라니 세월 참 빠르기는 하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책을 낼 정도면 글 한 편은 금방 뚝딱 쓰겠거니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적지 않은 고통이 따른다. 아픈 허리 때문에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하고 누웠다 일어났다, 썼다 지웠다, 쓴 문장 복사해서 적당한 부분으로 옮기기를 반복한다. 그러니 아직 초보 신세다. 그래도 일단 쓰기 시작하면 글이 글을 부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힘들다.
지금까지 새해 계획을 세운 적이 한 번도 없다. 인생이 생각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냥 주어진 대로 바쁘게 살다 보면 이루고, 잃는 것이 생겼다. 그때 반성하고 고치기도 한다. 2023년도도 마찬가지다. 글을 계속 쓰다 보면 또 욕심이 생겨 무엇인가를 시도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