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비밀 노트(2) / 곽주현
그녀가 친구의 근황을 물었다. 섬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잘 몰라서 우물쭈물했다. 미심쩍어하는 눈빛이기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이쯤에서 일어서려는데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며 옷깃을 잡는다. 섬 이름이 무엇이고 어떤 배를 타야 갈 수 있냐고 꼬치꼬치 묻는다. 아주 먼 곳이어서 하루에 갈 수 없고 바닷길도 험하여 올 곳이 못 된다고 했다.
강풍주의보가 내리지 않아도 풍랑이 거센 날이 있다. 그런 날 배를 12시간 타고나면 건강한 사람도 멀미와 피로감으로 녹초가 된다. 출발 날짜도 기상 상태에 따라 들쑥날쑥해서 종잡을 수 없다. 여객선이 항해하다가도 파도가 높으면 중간 기항지에서 닻을 내리는 때도 있다는 등 몇 가지 이유를 더 들었다. 더구나 여자가 혼자 가기에는 여러모로 위험하다며 살짝 겁을 줬다. 혹시나 찾아오면 두 사람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랬다.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더니 옆자리를 의식하지 않은 듯 깊은 한숨을 몇 번이나 내뱉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를 바꿀 무슨 말을 해야겠는데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차를 나르는 아가씨를 불러 냉수 두 잔을 부탁했다. 나는 반 컵만 마셨는데 그녀는 거의 다 비웠다. 또 한숨을 쉰다. 처음 본 사람 앞에서 그러니 그게 버릇인가 싶기도 했다. 찻집을 나왔다. 서로 갈 길을 갔다.
육지로 나간 지 일주일이 지나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막걸리를 앞에 놓고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았다. 이럴 때는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해야 제격이다. 보고 들은 대로 그에게 알렸다. 얼굴이 수척해 보이고 자네를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더라고 했다. 내가 따라 줄 틈도 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 연거푸 술잔을 기울인다. 술이 거나해지자, 자기가 나쁜 놈이라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계속하더니 급기야는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곰 울음소리를 낸다. 서울 찻집에서처럼 이럴 때 또 난감하다. 여전히 해줄 말이 궁하다. ‘이것들이 나한테 푸닥거리하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술김에 횡설수설하는 말이라 단언은 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뚜렷한 이유가 없는 듯했다. 그는 밤을 지새우며 그들의 러브스토리를 길게 풀어냈다. 철썩거리는 무심한 파도 소리는 배경음악이 되었다.
다음 날, 친구는 별일 없었던 것처럼 마을 분들과 어우러져 어장에 나가기도 하고 밥도 가끔 얻어먹고 들어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운동회 때문이었던가? 학교에 큰 행사가 있어 늦게 퇴근했다. 방앞의 좁은 마루 밑에 못 보던 신발이 있다. 하나는 친구 것인데 다른 것은 여기서 쉽게 볼 수 없는 까만 단화(短靴)다. 그것도 여자용이다. ‘설마?’ 하면서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긴 생머리를 한 여인이 벌떡 일어섰다. 당황스러웠다. 서로 바라만 보고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서 있었다.
“어려운 걸음 했네요. 고생하셨습니다.”라고 겨우 인사를 건넸다.
찻집의 그녀가 여기까지 와 버렸다. 목포에서 제날짜에 배가 뜨지 않아 서울 출발 나흘 만에 도착했다며 그 과정을 무슨 무용담처럼 말한다. 어쩌겠는가, 함께 지낼 수밖에. 내가 거처하는 곳은 상하 방이었다. 출입문은 하나고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방이 두 개로 나누어졌다. 내 것은 입구 쪽, 그들은 안쪽 방을 사용했다. 둘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나는 어째 좀 속이 거북했다.
졸지에 세 식구가 되었다. 모두 같은 집 하숙 밥을 먹었다. 그때 난생처음 먹어 본 생김 된장국과 민어탕의 맛을 잊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그들은 섬 이곳저곳을 흩고 다녔다. 들꽃을 한 움큼 꺾어 빈 소주병에 꽂아 놓기도 하고, 소라나 전복을 잡아 오기도 했다.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은지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도 돌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하도 그렇게 싸 다니까 도대체 뭣 하는 사람들이냐고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흘기는 마을 분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은 그런 눈총을 전혀 개의치 않고 손을 잡고 섬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그때만 해도 남녀가 그렇게 해동하는 건 흉이었다. 더구나 작은 섬마을에서 그랬으니 소문이 날마다 다르게 퍼졌다.
그렇게 20여 일을 잘 놀며 함께 보냈다. 입대일이 가까워졌다. 일주일 남았는데 나가려는 낌새가 전혀 안 보인다. 준비하려면 내일이라도 배를 타야 할 것 같다고 넌지시 말했다.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오는 대답이 폭탄선언이다. 입대를 안 하고 병역을 피하겠단다. 둘이 여기서 눌러살면 누가 잡으러 오겠냐며 나를 쳐다본다. 기가 탁 막혔다. “이런 미친놈이 없네.”하고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버렸다.
퇴근하고 저녁밥을 먹고 나면 셋이서 매일 뒷산으로 올라갔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인적이 뜸한 자리를 골라 앉아 입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는 가겠다고 약속하더니 오늘은 또 못하겠다고 고개를 숙인다. 안 되겠다 싶어 두 사람을 분리해서 따로 만나 설득했다. 친구는 ‘자기 애인이 서로 떨어지면 못 살 것 같다며 가지 말라 한다.’ 하고, 여자는 ‘남자가 자기 혼자 놔두고 도저히 군 생활을 할 수 없다며 떼를 쓴다.’라고 말한다. 남녀의 말이 서로 달랐다. 병역은 대한민국 남자라면 꼭 마쳐야 하는 국방의무다. 그러니 꼭 가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그놈의 사랑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한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군대에 안 간 남자를 모두 조사해서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까지 다 잡아들이는 서슬이 시퍼럴 때였다. 며칠간 난상토론(?)만 하다가 어느덧 입대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여자에게 ‘안 보내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니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당장 여기를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 또 길어져서 다음에 이어가겠습니다.
첫댓글 오메 참말로 왜 그러신대요? 이야기를 끝맺어야지 또 계속을 만드시네. ‘이것들이 나한테 푸닥거리하냐?’라는 말에 빵 터졌습니다. 둘 다 어리긴 하네요. 아무리 그런다고 군대를 안 간다고 하는 사람이나 그걸 말리지 않는 여자나 똑 같아요. 남 연애 이야기라 재미있긴 합니다.
너무 재밌어요! 단편 소설로 내면 좋겠어요. 아니면 연재 소설? 인물들이 살아 움직입니다. 내 속에서 으이구 하고 한숨이 나오는 걸 보면요.
다음 편이 벌써 궁금한데 내년에 읽을 수 있는 건가요?
아이고 또요?
소설로 써야할 것 같아요.
밀당의 고수 곽 선생님!
다음 이야기를 고대합니다. 몇 편 예정인지요? 궁금합니다.
수필도 다음 편이 있네요. 기대하겠습니다.
아이고, 다음이라 하면 내년인가요? 선생님때문에 내년에 글쓰기반에 또 등록해야겠네요.
왐마,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되죠. 어떻게 3월까지 기다려요?
그런데 정말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니죠. 하하하.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선생님! 겨울방학에도 계속 글을 써 주셔야 겠어요. 하하하, 재미있습니다.
선생님, 정말 재밌습니다. 생활의 모든 것이 글감이 되는 선생님의 글 읽으며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제목 부터가 남다르잖아요. 저도 내년을 기약 해야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아니! 저번 글 읽고 엄청 기다렸는데 또 이렇게 끝내시다니...아이들이 웹툰 기다리는 마음이 이해되네요. 그러면 내년인가요? 세상에...
내년은 안 되지요. 이번주에 마무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엄청 재밌네요. 바로 다음 회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