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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 두륜산,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
국토의 최남단 두륜산(해발 706미터)의 골짜기들이 한줄기로 어우러져 큰 계곡을 이룬곳 ‘너부내’라는 평지에 대흥사는 자리잡고 있다. 구림리 윗 동네가 장춘동으로 ‘아홉 숲’에 ‘긴 봄’이라는 의미가 궁금하다.
대흥사로 들어가는 십리 숲길은 해묵은 소나무와 벚나무, 단풍나무, 왕벚나무, 동백나무, 배롱나무 등의 노목들이 하늘을 가리는 나무터널로 이어진다. 대둔사라고도 한 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기로 추정 된다.
두륜산의 원래 이름은 ‘한듬’으로. 국토 남단에 불쑥 솟은 그 형상에서 유래했다. ‘한듬’은 ‘대듬’으로 부르더니 나중엔 대둔산(大芚山)으로 ‘한듬절’은 ‘대듬절’에서 ‘대둔사’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중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에서 동쪽으로 뻗어 백두산이 되고 다시 뻗은 태백산 줄기의 끝이라는 뜻에서 백두산과 곤륜산에서 한 자씩 따서 머리 頭, 산이름 崙의 두륜산(頭崙山)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일제 때 전국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륜’자를 ‘바퀴 輪’자로 바꾸어 두륜산(頭輪山)이라고 하고 대둔사는 대흥사로 바꾸어 놓았다.
해남 두륜산(頭輪山)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치 않다.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이 전해지며 조선불 교의 중심 도량으로 한국불교의 중심 역활을 해온 도량 이다.
181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년 후 완호 스님이 복원 현재의 대흥사가 되었다.
대흥사 가람배치는 전체를 4구역으로 나누었는데, 대웅 보전을 중심으로 북원에는 법당과 승방이 있고, 천불전 을 중심으로 남원에는 강원이 있고, 그 위로 표충사와 부속건물, 대광명전과 부속건물로 갈라놓았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스님에 이르기 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배출되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 으로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의 산실로, 지금 경내에 자리한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보다 국가의 안위를 우선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한다.
대웅전은 1665년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가 중창했으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있고,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 응진전 전 3층 석탑(보물 제320호)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 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여러 성보문화재가 있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 동종 (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 (보물 제1807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광명전 (전남 유형 문화재 제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179 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명승 제9호로 지정,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알려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우리나라의 옛 절집은 대개 불교의 세계관에 따라 아주 치밀하게 구성되여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남섬부주와 수미산 사이에는 7개의 산이 가로 막혀있고, 남섬부 주 와 산과 산 사이에는 다시 8개의 바다로 이뤄져 있다. 이렇듯 남섬부주에서 수미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8개의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사찰마다 반드시 1개 이상의 다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해남 대흥사는 유일하게 8개의 다리를 조성였다. 다리를 건너게 됨은 사바세계인 남섬부주에서 7개의 산을 넘어 신성한 수미산으로 들어 간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흥사 일주문
기둥이 한줄로 일렬로 서 있다고 해서 일주문이라고 한다. 지붕을 제외한 콘크리트식 건물로 겹처마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일주문은 여섯개의 석주를 세개에 한묶음으로 되어있다. 어칸에는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뒤로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조선 후기의 서예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편액. 당대 명필로 “두륜산대흥사”, “팔공산동화사”, "부산 범어사 일주문" 등 여러 곳에 현판과 필적이 전한다.
대흥사 부도전
일주문 지나 우측에 위치. 문이 잠겨있어서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의 부도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부도는 승려 무덤으로 그 유골,사리를 모신 석물이다. 이 부도전에는 서산대사 이래 열세분의 대종사(大宗師)와 열세분의 대강사(大講師)의 납골이 모셔져 있다. 서산대사의 부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산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호는 청허이며, 법명은 휴정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 각지의 승려를 모아서 나라를 구하는데 힘써, 선조는 정2품의 직위를 내리고 나라에 대한 공과 덕을 칭송하였다.
대흥사에는 특이하게 천왕문이 없다.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지리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천왕문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대흥사의 해탈문은 근래에 새로 건립,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그리고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수미산 정상에 제석천 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 해탈문(혹은 불이문, 不二門), 즉 속계를 벗어나 법계에 들어가는 해탈문이 서 있다고 한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해탈문(解脫門)’ 편액(扁額).
특이하게도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를 봉안하고 있다. 문수동자는 석가모니의 지혜를 상징한다. 오른손으로 연꽃을 쥐고 있고 왼손으로는 연꽃 줄기를 잡았으며, 청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보현동자는 석가모니의 수행과 행원을 상징한다. 오른손으로는 연꽃 봉오리를 쥔 모습이고,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즉,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이 지닌 대표적인 두 힘을 형상화한 것이다.
동다실(東茶室)
초의선사에 의해 차 문화의 산실이던 대흥사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지어진 건물, 차향을 즐길 수 있는 공간.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에 근거하며 실제로 화재시 물 공급지의 역할도 한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절묘한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관음전 정면 5칸, 측면 1칸,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범종루(梵鐘樓)
천불전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가허루(駕虛樓)는 사찰 의 중심에 있다. 건물의 정면과 좌우측 벽은 화방벽을 쌓았으며, 뒷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였다.
‘가허루(駕虛褸)’라는 편액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글씨다. 조선의 3대 명필이다.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U자 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긴 가허루 문지방
‘龍華堂(용화당)’ 건물은 전남 유형문화재 제93호이다.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가허루와 맞닿는 쪽은 맞배지붕이고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조로운 건물이다. 승려의 강당 겸 선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가 1813년에 준공한 것이다.
자연석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왼쪽에서 여섯 번째 기둥만이 네모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두리기둥 에 는 배흘림을 두었다. ‘龍華堂(용화당)’ 편액은 성당(惺堂) 김돈희의 글씨이다.
‘奉香閣(봉향각)’ 편액이 걸려있는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천불전은 높이 쌓은 석축단(石築壇) 위에 자연석 주초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앞면 어칸에는 삼분합문을, 좌우협칸에는 이분합문을 달았고, 문의 청판에는 안상을 그렸고 정교하게 새긴 국화문양과 연화문양의 꽃창살문이다. 이 꽃창살은 내소사 꽃창살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꽃창살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천불전(千佛殿)’ 편액(扁額)
'보물 제1807호. 천불전'은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스님이 중건하였고, 천불은 쌍봉사 화승 풍계대사의 지휘 아래 경주 옥석으로 10명의 대흥사 스님들이 참여하여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천불로서 그 조각 자체가 정교하며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중앙의 목조삼존불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보처에는 문수. 보현 보살상을 모셨다. 그리고 천불상은 현재 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상에 전해오는 이야기
경주에서 조성된 천불(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11월 18일 경주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흥사를 향하여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불을 실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나타나서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 다음 해 7월14일 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 옥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가사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어느날 경상도에 사는 신도의 꿈에 나타나 여러 차례 가사 불사를 해 줄 것을 현몽하여 서둘러서 가사를 만들어 입혀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4년마다 새로운 가사로 바꿔 입혀드린다, 그리고 헌 가사는 가사불사에 동참한 신도들 가정에 소장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장애가 없어진다고 한다.
대흥사의 명물 연리근 느티나무.
연리지(連理枝) 혹은 연리근(連理根)을 풀이하면, 결(理)을 이은(連) 가지(枝) 혹은 뿌리(根)라는 말이다. 같은 나무나 서로 다른 개체의 두 나무 가지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된 나무를 연리지(連理枝)라 하고, 서로 다른 두 나무의 뿌리가 붙어 있는 나무를 연리근(連理根)이라고 부르는데, 줄기가 이어지는 연리지는 가끔 볼 수 있으나 이렇게 큰 느티나무의 뿌리가 붙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가지와 가지는 맞닿을 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더라도 바람에 흔들려서 좀처럼 붙기 힘든다. 흔히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하여 '부부나무' 또는 '사랑 나무 '라고 부른다.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일화가 전해오는 대웅보전이다
침계루
북원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출입하며, 대웅보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건물로 하층은 화방벽(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하였고,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강당이다. 건물 외부는 대웅전을 향한 내벽을 제외하고 삼면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하였다.
침계루 원교 이광사가 쓴 ‘침계루(枕溪樓)’ 편액이 걸려 있고, 그 배면(대웅보전 쪽)에는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편액.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대향각(大香閣)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백설당 처마에 걸려있는 '白雪堂(백설당)' 편액은 구한말 의정부참정과 탁지부대신을 지내고,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것이다.
백설당에는 또 다른 편액이 걸려 있는데, 제주도 유배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에게 써주고 간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이다. 또한 동국선원에 걸린 ‘一爐香室(일로향실)’과 ‘東國禪院(동국선원)’ 편액도 추사의 글씨이다.
대웅보전
1669년에 심수 스님이 3년에 걸쳐 중창한 조선후기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 외이출목이며, 건물 전면은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청판에 치장하였다.
이외에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도깨비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에 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대들보 사이에 용두와 칠보문양을 단장하였으며, 대들보는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했고, 대들보 위로 뽑아낸 충량의 용두(龍頭)는 불전의 신성함을 보여준다. 이외 불단 우측에 근래 조성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천수천안관음탱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 상부에 서수를 탄 동자들이 비천하는 목조각이 장엄되어 있다.
그리고 '지붕 위 용마루 한가운데 청기와는 동(銅)으로 된 기와로 천둥번개로 인한 벼락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해 주는 피뢰침 역활을 한다. 물론 조선초기에 절집과 궁궐에서 중국의 청기와 지붕을 본따 우리나라에서도 청기와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청기와가 일반기와보다 만들기가 까다롭고 재료비가 많이들다 보니 백성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준다하여 조선후기에 와서 청기와 제작을 금지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린 자료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절집에서도 청기와 제작이 금지되면서 상징적으로 몇 장의 청기와를 올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청기와 건물로는 창덕궁 선정전이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의 간청을 받고 서산대사는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 승군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다. 또한 대구 동화사도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께서 영남지방의 승군을 총괄하는 본부(사령부)를 두고 승군을 지휘하였기 때문에 봉서루에 '嶺南淄營牙門(영남치영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대웅전 용마루 위에 청기와 한장이 올려져 있다보니 호국사찰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특히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 귀향길에 추사는 전주,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다. 귀양살이 가는 처지임에도 추사는 그 기개가 살아있어 대흥사의 편액 글씨를 비판하며 초의에게 하는 말이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추사의 극성에 못이겨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가 써준 ‘무량수각’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 7년 3개월, 햇수로 9년. 추사는 유배 중에 부인이 상(喪)을 당하고, 본인이 회갑을 맞았으나 위로와 축복을 해주는 이 없는 외로움을 맛 보았다. 처음에 찾아주던 제자들의 방문도 뜸해졌다. 그런 중에도 변치않고 책을 구해다 주는 조선후기의 시인 이상적(1804~1865)의 마음에 감동해 “날이 차가운 후(歲寒然後)에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고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추사는 귀향살이를 하면서 외로움과 억울함,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글씨를 쓰고 또 썼다. 한나라 비문체와 각체를 익혔던 추사는 여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듬뿍 실은 개성적인 글씨를 만들어내게 되니 그것이 바로 추사체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1848년 12월, 추사는 63세의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를 만나 회포를 풀던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어디에 있나?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 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그는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체득한 것이었다.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이리하여 다시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리게 되었고, 그 왼쪽에 있는 승방(백설당)에는 추사가 귀양가며 썼다는 ‘無量壽閣(무량수각)’ 현판이 하나 걸려 있는데, 원교의 글씨는 가늘고 빳빳하여 글씨의 획에서 힘찬 기세를 느끼게 하는 반면, 추사의 글씨는 획이 쌀찌고 윤기가 나는 아름다운 느낌(美感)을 보여준다. 조선의 두 명필이 보여주는 예술의 정수를 다시 새겨보게 한다.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석가삼존상(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는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하는 고리 뒤에 용두를 조각하여,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대웅전 앞의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 머리(귀신상, 도깨비상) 한 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 범어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 초입에도 벽사의 의미를 가진 석수상(石獸像)을 볼 수 있다. 침계루 앞의 심진교에도 '불기 2967년'이란 조성 연도가 각자 되어 있어 소맷돌 석수상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측된다.
대웅보전 좌측의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ㆍ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건물로 막돌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2벌대의 장대석을 쌓고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어칸에는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應眞堂(응진당)' 편액
사리탑 응진전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이 하나로 줄어들고 옥개석 받침이 4개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요사채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건물 전후에 툇마루를 가설하였고, 스님들의 후원으로 사용.
명부전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 .‘명부전(冥府殿)’ 편액 구한말 미불체의 대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 내부는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이고,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의 삼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그 좌우로 10분의 시왕과 판관ㆍ녹사ㆍ사자 등의 권속들을 배치하고 있다.
초의대선사상
호국문(護國門) 표충사(表忠祠)로 들어가는 솟을삼문으로 외삼문에 해당하는. 호국문에 그려진 태극문양은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성리학에서는 우주만상의 근원이며, 인간생명의 원천으로서 진리를 상징한다. 보통 이태극과 삼태극이 혼재하고 있는데, 삼태극은 천지인 삼재를 상징한다. 사찰건축에서 나타난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은 경주 감은사지 석재에 새겨진 삼태극문양이다.
표충사(表忠祠)의 호국문(護國門)을 지나면 내삼문인 예제문(禮齊門)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으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다. 특히 표충사 사액(賜額)은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이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까지 받았다. 어서각은 위당 신관호의 필적이다.
표충사 편액이 걸린 건물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사명대사)ㆍ처영스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조사전(祖師殿) 표충사당 좌측편에 있는 세벌대(3단)의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화상을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하여 배치하고 있다.
보물 제88호 탑산사명 동종 (塔山寺銘 銅鍾) - 고려 시대 만들어진 높이 79㎝, 입지름 43㎝의 종으로 신라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종 꼭대기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매다는 곳인 용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부분에는 연꽃으로 띠를 둘렀고, 그 아래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사각형의 유곽 안에는 가운데가 돌출된 연꽃을 9개 두었는데, 신라 때의 유두보다 훨씬 납작해진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 있는 글과 양식으로 보아 종의 제작시기는 고려 명종 3년(1173)이나 고려 고종 20년(1223)으로 추정된다. 전체 형태는 상원사 동종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며, 각종 조각 수법이 빼어나 고려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윤왕좌(輪王坐)의 자세로 앉아 있는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1547호)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해남 대흥사 영산회상도 괘불탱.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협시는 문수와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고 본존불의 얼굴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의 모습이 보이는 구도의 괘불이다.
보물 제1357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 - 해남 대흥사 박물관에 있는 유물로, 임진왜란때 승군(僧軍)으로 나선 서산대사를 승군 대장 도총섭으로 임명한 '교지'와 정조가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을 친히 적은 '서산대사화상당명' 총 2점이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을 받아 팔도도총섭이 되어 73세의 노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군 1,500명을 모아 활약하는 등 전쟁에 공을 세웠다. 교지는 임진왜란 초 발급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된 서산대사의 도총섭 교지를 만력 30년, 즉 선조 35년(1602)에 재발급한 것이다.
서산대사 화상당명은 정조 18년(1794)에 해남 대흥사에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지는 것을 계기로 정조가 친히 지은 '서산대사 화상당명'과 그 서문을 써서 대흥사에 내려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꽃, 구름무늬 채화가 그려진 담황색 비단에 내용이 적혀있고, 끝부분에는 정조의 친필임을 상징하는 '홍재(弘齋)'라는 도장이 찍혀있다. 글의 내용은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