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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86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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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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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xT-DrtDw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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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
하느님의 지속적인 은총과 자비 안에서 행복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꿈꾼다면 가장 밑바닥에 기본적으로 ‘쫙~’ 깔고 시작해야 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경한 어조로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경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흔일곱은 ‘완전 중의 완전’을 뜻합니다. 그러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를 할 때 적당이 용서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두 번, 열 번 스무 번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끝도 없이 용서하라, 틈만 나면 용서하라, 용서를 습관화, 생활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밥 먹듯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있군요.
삼시세끼 밥 먹듯이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용서하고 말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호흡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내 삶의 모토처럼 여기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매일 매순간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평생 씻지 못할 모욕, 깊은 상처를 안긴 그 사람을 어떻게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소중한 인생에 맵디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큰 해를 끼친 그, 그러나 절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습관처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서에 앞선 마음의 정리가 요구됩니다. 때로 합당한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 습관적인 용서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결국 참된 용서를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힘겹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그 어렵던 용서가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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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월 12일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ane Frences de Chantal)기념일' 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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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운명, 원치 않았던 고통의 순간은 다시 한 번 삶을 재구성하라는 초대입니다!
400여년 전인 1600년대 이미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열린 영성을 앞당겨 살아가셨던 두 탁월한 성인·성녀가 있었으니,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1567~1622)와 성녀 요안나 드 샹탈 수녀(1572~1641)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머릿 속에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무척이나 어렵고 좁은 길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성화 여정은 하루 온종일 깊은 관상 기도에 전념하는 수도자들의 전유물로 여겼습니다.
성덕의 길은 세상의 쾌락을 뒤로한 금욕주의자들, 탁월한 영성가나 고위 성직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요안나는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괘변입니까? 성인의 길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왕은 왕궁에서, 농부는 밭에서, 군인은 망루 위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함을 통해 누구든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며, 성덕의 보편성을 강조했습니다.
사실 요안나의 경우, 당시의 잣대라면 절대로 수도생활을 꿈꿀 수없었습니다. 성화의 길로도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찌감치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었습니다. 6명이나 되는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오랜 세월 한 가정의 어머니요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기구하게도 남편 바롱 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이 불의의 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고, 며칠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부간의 금슬이 무척이나 좋았었기에, 요안나가 당시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그저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요안나는 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요안나가 33세 되던 해 그녀는 친정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갔었는데, 거기서 당대 유명한 설교가이나 살아있는 성인이라 불리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강론을 듣게 된 것입니다.
따뜻하고 매력적인 성품에, 수려한 외모, 깊은 감동과 위로를 주는 명강론 앞에 요안나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뿅 가버렸습니다. 이분이야말로 내 미래(특히 영적인)를 책임져 줄 분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요안나는 겸손하면서도 간절하게 영적 지도를 청했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기꺼이 응답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탁월한 영적 지도와 자상한 배려에 힘입어, 요안나는 남편을 죽게 만든 사람도 기꺼이 용서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의 딸 세례식 때 대모를 서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성화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나중에 그녀의 성덕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안나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을 뒤로 하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도움에 힘입어 거룩한 과부들로 이루어진 방문 수녀회(Congregation of the Visitation of Holy Mary)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수도회의 초대 총장 수녀로서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살아생전 기회 닿는대로 설립한 수녀회 분원수는 76개에 달했습니다. 요안나의 기구하면서도 독특한 성소 여정은 오늘 우리에게 큰 깨달음 하나를 선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그녀의 인생을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요, 6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어머니로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던 그녀에게 남편의 사고사라는 엄청난 충격이 다가왔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평생 울고불고, 탄식하고 원망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안나는 즉시 잠시 일그러진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고, 새롭게 마음을 무장하고, 성화의 길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순하고 겸손함 자세로 영적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요안나는 교회 안에서 빛나는 큰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자주 기구한 운명과 마주합니다. 수시로 전혀 원치 않았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순간은 어쩌면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라는 초대입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라는 요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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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 용서!>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ULiGiyd3E0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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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용서’는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렇더라도 용서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죄를 용서받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용서하려고 하니 용서가 매우 혹독한 고난의 길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용서할 기회를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묵상하면, 감히 ‘나도 용서할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튜브에 나오는 어느 결혼식 축사의 주요 내용을 약간 각색해 보았습니다. 동업자이며 한 살 어린 나이지만 삼 년 전 결혼한 선배의 결혼식 축사입니다.
“진이 형. 십 년 전 우리는 결혼을 못 하든지, 아니면 축의금도 못 받고 몰래 결혼하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 했었지. 그때는 풀리는 일이 없었어. 그런데 결국 나도 삼 년 전에 결혼하게 되었고, 형도 지금 축의금 많이 받고 결혼하네. 앞으로 우리 열심히 일하며 갚아나가자.
형이야 당연히 잘하겠지만, 결혼 선배로서 하나만 얘기할게. 형수랑 싸우면 대체로 형이 잘못한 경우가 많으니까 일단 사과해. 혹시 형이 생각했을 때 형 잘못이 하나도 없는 것 같으면, 그래도 사과해. 그게 남자고 남편이고 가장이며 우리 같은 사람과 결혼해주는 아내에 대한 보답이야. 좋은 기회잖아.
그동안 한 번도 얘기 못 했었는데, 이 자리 빌어 이제야 얘기한다. 십 년 전에 나 오토바이 사고 나서 한 달 병원에 누워있을 때, 병원비 없어서 퇴원 못 하고 간호사들 눈치 보던 그때, 형이 친구니까 도울 수 있으니까 돕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었던 그 봉투, 내가 오늘 다시 가져왔다. 그때의 나는 어리고 철도 없고 자존심만 세서 고맙단 말 못 하고, 그렇다고 안 받겠다는 말도 못 했지. 나중에 열 배, 백 배도 갚겠다고 큰소리만 쳤었는데, 딱 열 배 넣었다. 백 배는 앞으로 같이 벌자. 내가 책임지고 벌게 할게. 진짜로 고마웠다. 그동안 한 번도 잊어버린 적 없다.
형, 형은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다. 주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고 그런 형이 선택한 형수라, 형수도 같은 사람인 거 같네. 여태 그래왔듯이, 세상 밝게 비추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 잘 살아. 2020년 5월 30일, 형 덕분에 이 자리에 서게 된, 00으로부터.” [출처: ‘신랑을 울게 한 친구의 반전 축사’, 유튜브 채널 ‘삼남 2인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은혜를 갚을 기회만을 노릴 것입니다. 축사한 동생은 십 년 전의 자신들의 처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시집와 주는 것도 고맙고 그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분들께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십 년 전 자존심 때문에 고맙단 말도 못 했던, 그러나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그 은혜에 대해서 형의 결혼식은 정말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당연히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피로 그 지옥 불을 꺼주셨습니다. 만약 이 죄의 용서의 은혜를 믿기만 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제발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 좀 있어라!’ 하면서 기회를 노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기회가 있으면 주님께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기쁘게 용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이 나옵니다. 백 데나리온이 약 천만 원이라고 하면 일만 탈렌트는 육조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당연히 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을 주님은 하늘 나라에 사시게 할 수 없으십니다.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자기만 아는 사람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있지 못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유튜브에 보면 하부리그 축구 경기에서 결승 골을 넣은 선수가 하나뿐인 관객 앞으로 달려가 구십 도로 인사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4시간 동안 응원하러 왔던 그 관객은 엉엉 웁니다. 바로 고양 시민축구단이 평창에 와서 경기할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일곱 경기 연속 패하기만 하던 고양 시민축구단을 응원하러 혼자 평창까지 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라대관 씨는 먼 길을 혼자 달려와 목이 터지라고 북을 치며 응원했습니다. 선수들은 골을 넣자마자 하나뿐인 그 관중에게 달려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억지로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도 분명 큰일입니다. 그러나 평소 주님의 은혜에 대해 깊은 묵상을 했다면 용서를 할 기회를 찾는 것은 더 큰 일일 것입니다. 어차피 용서할 것, 주님께 더 보답해드리기 위해 ‘용서를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로 노리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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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21-19,1 : 매정한 종의 비유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여섯이라는 수는 창조활동을 암시하므로 수고와 노동으로 가득함을 의미하지만, 일곱에는 용서를 가리키는 휴식의 의미가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일흔 일곱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주어진 용서를 모든 세대가 다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 준다. “일흔 일곱 번”이란 무슨 의미인가? 루카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의 족보를 역으로 기록하였다. 루카가 꼽은 세대는 바로 일흔 일곱 세대이다.(루카 3,23-38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대를 모두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만큼 모두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한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종은 많은 돈을 빌리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이익도 주지 못하고 모두 잃어버린 것 같다.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26절) 이 말씀은 종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종은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26절). 주인은 종이 청한 것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주인은 그 종이 이 일을 통해서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또한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이 용서의 조건은 우리 동료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백 데나리온이란 사소한 잘못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 동료 종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우리도 같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 말은 그 종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묘사하는 비유이다. 이제 이 사랑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주인이 종에게 자신과 가족을 팔라고 했을 때, 분노에 찬 말은 아니었다. 자비의 순간이었다. 그때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분노와 처벌과 응징이 담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사악하고 악독한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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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에제키엘은 상징적인 행위를 많이 보여 주는 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거슬러 심판을 선언하는 예언자의 활동에서 우리는 이 행위들을 만납니다. 특히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의 행위 가운데 하나인 ‘유배 짐’을 언급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충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면서, 그들이 다시 계약에 충실하도록 에제키엘을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쓰십니다. 에제키엘은 이 불충의 결과 가운데 하나로, 유배 짐을 싸서 어두울 때 도시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그리고 그분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 땅에서 내쫓기게 되리라는 암시를 시각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사실 ‘예표’란 어떤 중요한 면을 쉽게 이해하고 파악하게 하는 ‘무엇’입니다. 이스라엘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표, 곧 행동으로 보일 예언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명령을 받은 대로 반드시 실행해야 하고 이를 지켜본 이들은 변화하는 반응을 보여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규범입니다. 먼저 수도 없이 용서하라는 용서의 빈도를, 다음으로 하느님께 엄청난 용서를 받았으니 동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라는 용서의 당위성을 ‘매정한 종의 비유’로 알려 줍니다. 물론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종은 매정한 인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먼저 무한한 자비를 베푸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용서하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 매정한 종처럼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옹졸하기만 하면, 그 인생이 어두워질 무렵 유배 짐을 싸서 어깨에 메고 이 세상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결국 예표이든 비유이든 주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깨닫고 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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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로 고백소에서 성사를 보는 일이 중단 되었습니다. 가끔 제가 있는 신문사 사무실로 성사를 보러 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오십니다. 성사를 보시고, 환한 모습으로 가시는 걸 보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기도는 이론과 방법을 설명해서는 그 깊이와 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도는 체험을 통해서 그 깊이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호수가의 새끼 오리들이 제법 깊이 물속으로 자맥질하는 걸 봅니다. 가르쳐주지 않고, 배우지 않았어도 새끼 오리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알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몰입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느낀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알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믿으면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알아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선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은을 제련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숙련된 제련사는 용광로 위에 있는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고 합니다. 은이 얇은 막이 되어서 제련사의 얼굴이 비출 정도가 되면 은은 불순물이 다 빠지고 온전한 은이 된다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불을 끄고 은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련사가 용광로의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까요? 숙련된 제련사처럼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분노, 원망, 불신, 미움,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빠지면 마음은 호수처럼 맑아질 것입니다. 호수처럼 맑아진 마음은 굳이 용서를 말하지 않아도 용서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게 되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주게 되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주게 되고, 어둠에 빛을 주게 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용서(Forgive)는 '위하여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주는 것일까요?
첫째, 나를 위하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 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한’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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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죄>
마태오 18,21─19,1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사람과 죄>
사람이기에
죄를 짓습니다
죄를 보면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지으니
사람입니다
사람을 보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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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용서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욕과 비방과 무례한 언동 앞에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본때를 보여 주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가장 일반적이고 더 쉬운 것은 원한을 품고 있을 때 때맞춰 복수하는 것입니다. 복수는 모욕당한 사람의 쾌락이자 즐거움이고, 원한으로 가득 찬 증오는 나약한 이들의 유일하고 확실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은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하고 진실한 사랑과 화해로 폭력의 악순환을 없애는 것입니다.
더 탁월한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는 체험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로서 사랑을 받고 자유를 누리며 권리를 회복한 이들임을 느끼려면 용서를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사랑으로 용서받았다는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동태 복수법과 증오의 법을 용서와 사랑의 법으로 바꿀 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면 용서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용서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주님의 기도를 통해 가르쳐 주셨고 우리는 계속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빚)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빚을 갚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빚)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른 우리는 속량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코린 6,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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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호균 마르코 신부님]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는 마음이 남긴 것>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한 분이 약을 먹고 죽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남편은 냉담신자였습니다만 여자관계가 복잡했고, 경제력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경제적인 부분을 아내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철없는 자녀들까지 카드빚을 지면서 여러 차례 어머니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하는 가족들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밝게 웃으며 생활해왔습니다. 사제인 저에게도 속사정을 숨기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출한 남편이 돌아올 날을 10년 넘게 기다리다가 너무 힘들고 지쳐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이 가족들에게 발각되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지만 어렵게 직장을 잡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맏며느리 역할까지 감당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다시 재결합을 바랐지만 자녀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증이 왔고, 잠이 오지 않은 관계로 과다한 수면제 복용이 죽음을 불러들였습니다.
남겨진 것은 자신을 쫓아낸 자식들에게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남겨줄 전세금 이 천만 원과 현금 천만 원이 유서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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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용서와 하늘나라>
진정한 용서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를 용서했다고 말을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섭섭하고 억울한 감정, 울분과 울화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서하긴 했지만 내 방식대로 용서했기 때문에 가슴 속에 앙금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용서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임금은 일만 달란트나 빚을 졌지만, 갚을 능력이 없는 종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줍니다.
“너는 갚을 능력이 없구나.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인정하고 받아주마.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윽박지른다고 일만 달란트가 어디서 나오겠느냐?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
임금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은 그는 더 이상 빚에 짓눌리지 않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어 새 삶을 시작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옹졸함은 친구를 감금하고 끝내 자신도 감금당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소나무를 느티나무가 되라 하지 않습니다. 잔디를 클로버가 되라하지 않습니다.
수국에서 장미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기에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대로 아름답고 늠름합니다.
하느님은 때 묻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깨끗하게 되라 하시거나 깨끗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비의 손길로 감싸 어루만져줍니다. 그 순간 나의 더러움은 씻겨나가고 상처는 깨끗이 치유됩니다. 여기에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용서하는 당신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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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수도원에 밥을 하루에 한 그릇만 먹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한편 그와 달리 늘 두 그릇을 먹는 수도자도 있었지요. 이 수도원에서는 절제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기에, ‘두 그릇 수도자’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비난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두 그릇 수도자’가 먼저 주님 곁으로 갔고, 그로부터 몇 년 뒤에 ‘한 그릇 수도자’도 하늘 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 ‘한 그릇 수도자’가 보니 ‘두 그릇 수도자’가 하늘 나라에서 큰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자신에게는 별다른 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해진 그는 하느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하느님! 저 수도자는 세상에 살 때 절제하지 못해서 밥을 늘 두 그릇씩 먹었는데, 왜 한 그릇만 먹은 저보다 더 큰 상을 받습니까? 불공평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얘야! 저 수도자는 본래 밥 세 그릇이 정량이었다. 그런데도 두 그릇만 먹느라고 무척이나 참고 절제했다. 하지만 너는 너의 정량인 한 그릇을 빠지지 않고 먹지 않았느냐?” 누가 더 절제의 생활을 했을까요? 이처럼 나의 기준이 그리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함부로 판단했다가는 오류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분노할 시간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딴 생각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돈을 갚을 방법을 지시합니다. 이는 종이 얼마나 큰 빚을 탕감받은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그도 동료 종들에게 더 자비롭게 행동할 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큰 용서를 받고서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은 그 종은 자기 동료 종의 멱살을 잡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함부로 판단하는 오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용서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남에 대한 자기의 용서는 합당할 때에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조건 용서부터 하라고 하시는데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간절하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약점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려고 또 그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나약해지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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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심>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은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이해인 수녀님의 ‘어떤 결심’이라는 시입니다. 하루씩, 한 순간씩만 남 탓 안 하고 산다는 결심. 그리고 이 결심이 지켜질 때 분명히 행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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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覺)의 여정>
-모두가 은총의 선물이다-
‘국제적 수도승 삶의 연대’란 영문 소식 책자의 제목이 반가웠습니다. ‘수도승의 이상적 삶과 죽음(The Monastis Ideal of Life and Death)’이란 제목이었습니다. 저는 강론 원고중 마음 깊이 각인 시키고 싶은 중요한 말마디에는 때로 반드시 괄호를 열고 한자나 영어를 집어 넣습니다.
참으로 살기위해, 참으로 죽기위해 이상적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는 필수이겠습니다. 모든 시험이 날짜가 있지만 일생일대 최종의 마지막 시험인 죽음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벼락 공부는 어불성설이고 늘 깨어 삶과 죽음을 공부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느 수도원이든 찾을 때 마다 우선 살펴 확인해 보는 것이 수도원 묘지입니다. 유럽 수도원들은 광대하고 수려한 터전에 자리잡고 있으며 내부의 한적한 자리에 수도원 묘지가 있습니다. 찾을 때마다 고향에 온 듯 편안함을 느낍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마음도 정리되고 참 홀가분해지는 느낌입니다. 자기비움의 수련에 수도원 묘지는 참 좋은 공부의 장입니다. 흡사 성지 순례의 느낌입니다.
왜관 수도원에 머물 때도 수도원 외곽의 낙동강 변, 산비탈에 위치한 수도원 묘지를 찾았고,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뉴턴 수도원에 2차례 얼마 동안 머물 때도 매일 수도원 묘지를 찾아 순례하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눈에 밟히는 그리움의 처소가 수도원 묘지입니다.
삶과 죽음의 파스카 신비의 묵상과 삶에 참 좋은 공부처가 묘지입니다. 일반인들과 달리 묘비석에 묘비명은 없고 이름과 생몰연대만 나와 있는 수도원 묘지입니다. 일반인들의 묘지 역시 방문시에는 늘 확인해 보는 것이 생몰연대와 묘비명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참 귀한 하느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수도원 묘지 순례가 심기일전, 역설적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를 살아도 평생을 살 듯 샘솟는 열정으로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요즘 산책시 자주 불렀던 동요와 더불어 생각나 부르기 시작한 아주 예전 즐겨 불렀던 ‘일터로 가자’ 노래입니다. 8.15이후 농촌 계몽과 동시에 ‘상록수’와 ‘흙’이라는 소설이 유행하며 4H운동과 함께 농촌에서 즐겨 불렀던 민요풍의 노래입니다. 가사도 곡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의 배밭 농사가 주업인 요셉 수도원 분위기에도 참 잘 어울리는 노래 1절과 3절을 소개합니다.
-“저건너 푸른봉에 구름헤치고 태양이 솟아오니 어화 새날이로구나
시냇물이 굽이굽이 감도는 들에 이슬맞어 젖는 흙은 향기를 풍긴다
(후렴) 어화 어화 어화데야 일터로 가자 이나라의 주인인 너와 나로구나
낙원이 어데냐고 묻지말게나 심으며 웃는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가슴엔 비가개어 하늘 푸르고 내가슴엔 봄바람이 언제나 분다”-
얼마나 아름답고 흥겨운지요. 그대로 은총 넘치는 찬미가 같습니다. 여기 수도원 산책중 가끔 부르다 요즘은 매일 부릅니다. 이제는 동요와 더불어 성가의 좋고 쉬운 찬미가부터 배우는 마음으로 부르려 합니다. 사실 성가책 없이 제대로 끝까지 부르는 성가가 거의 없어 보지 않고도 외워 부르기 위함입니다.
하루 삶의 모든 계기를 깨달음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모두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찬미와 감사의 삶의 생활화, 일상화와 더불어 행복한 깨달음의 여정을 살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하느님과 나에 대한 앎도 깊어져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점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온 행복기도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모두가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늘 나라 천국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하늘 나라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낼 때 ‘무지의 늪’은 ‘지혜의 숲’으로 변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도대체 예나 이제나 무지의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만이 무지에서 해방된 자유인이자 현자입니다.
오늘 복음은 무자비한,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정말 인정머리없는 인색한 무지한 종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마디도 있지만 정말 ‘자기인식(self-knowledge)’에는 빵점입니다. 만 탈렌트 천문학적 빚을 탕감받은 자가 조족지혈鳥足之血, 고작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하다니요. 아, 바로 무지의 탐욕에 눈멀 때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바로 만탈렌트 빚진 자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백탈렌트 빚진 자는 내 주변의 가난한 형제들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무자비한 무지한 종에 대한 호된 질책이 우리의 ‘무지의 눈’을 활짝 회개의 깨달음으로 이끌어 삶의 실재와 진실을 보게 합니다. 깨달을 ‘각覺’자 한자 안에 ‘볼 견見’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만탈렌트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은총의 선물로 가득한 인생임을 깨달아 안다면 저절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요 형제들에 대한 온갖 맺혔던 것도 저절로 다 풀리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동병상련의 연민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평화공존의 삶을 살 것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의 무한한 용서도 저절로 가능해 집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입니다. 무지로 인한 문제라 깨달아 알게 되면 해결이 아닌 저절로 용서요 해소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전에는 하느님의 행동이 곧 예표였다면, 이사야 이후부터는 예언자 자신이 하느님께서 장차 이루실 일에 대한 예표가 됩니다. 오늘날도 눈만 열리면 주변에서 ‘회개의 예표’같은 사건들이나 형제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바이러스 감염병도 일종의 회개의 예표같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바로 ‘반항의 집안’으로 지칭되는 무지의 죄악으로 눈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질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 대한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새삼 무지의 죄악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해도 보지 못하는, 육신의 귀는 멀쩡해도 듣지 못하는 무지의 죄악에 병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회개의 은총을 위해 하느님을 향해 마음의 눈을, 마음의 귀를 활짝 여는 한결같은 의도적 노력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함은 물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어 자유로운 현자가 되어 찬미와 감사의 삶에 전념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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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혜를 기억하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나 스승의 은혜뿐 아니라 이웃의 은혜도 큽니다. 그리고 자연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의 은혜는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움에 대하여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니 마음이 박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만큼 “네가 그럴 수 있나?”하는 서운함만 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눈감아 주고 참아줄 수 있는 한계를 일곱 번으로 표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은혜를 입었고, 앞으로도 입게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은 원수를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하고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주님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34,6-7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실 용서는 사랑의 핵심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은 사랑과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에게 관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에 있어서도 허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칭찬 받고 싶은 마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2-13)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19-21)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받을 은혜를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할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아니, 용서를 먼저 청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셨으니 인간이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의 은혜를 돌 판에 새기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3항).
교황께서 선출되고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교황께서는 "저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는 죄인입니다."하고 대답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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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용서의 이유와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용서할 수 있는 최대치의 횟수를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숫자 7이 두 번 반복되었으니, 말하자면 계속, 쭉, 끝까지, 영원히 용서하라는 뜻이지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마태 18,33)
예수님께서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종이 훨씬 적은 빚을 진 제 동료를 감옥에 보냈다가 혼쭐이 난' 비유를 들려주시며 용서의 이유를 밝히십니다. 부족한 죄인인 우리는 늘 아버지의 용서를 받으며 살고 있으니 우리도 용서를 하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은 이의 의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서받는 것은 상대에게 영적 빚을 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용서를 할지 말지 결정할 때 구속력이 되는 것은 외부적인 것보다 마음에 쌓인 바로 그 빚의 무게가 될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마태 18,35)
용서의 방법입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용서는 겉으로, 번지르르한 말로 때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마음과 영혼, 전 존재가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힘 들여 용서한 일이 자꾸 기억과 감정에 소환되어 마음을 어지럽힐 때가 종종 있지요. 아직 그 일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해서 그럴 것 같습니다. 상처는 아물었어도 흉터가 남듯이 고통도 남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혹 용서가 단 한번으로 되지 않으면 떠오를 때마다 주님께 의탁하며 마음으로 되풀이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치유의 주도권은 주님께 넘어갑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다 왕국의 몰락과 유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에제 12,6)
에제키엘 예언서를 읽다보면 그의 기이한 행동을 자주 만납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그렇듯, 예언자의 말과 삶과 행동이 백성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지요. 예언자들이 주님께서 일러 주시는 대로 한 행동들은 곧잘 백성의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지만,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에제 12,11)
예표는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 영향을 미칠 실마리도 됩니다. "예표"와 "하느님의 실행" 사이에 회개와 용서가 끼어든다면 하느님은 언제라도 당신 계획을 돌이키실 것이니까요.
사실 우리에게는 이미 완전한 예표가 주어졌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예표, 완전한 희생의 예표, 완전한 용서의 예표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희도"라는 말씀 안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을 완전한 예표로 세우실 주님의 비장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예표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탐욕과 위선의 예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예표 말입니다. 조금 손해를 보아도, 상처 받고 아파도, 심지어 바보 취급을 받아도 희생하고 용서하는 사랑의 예표가 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닮았구나!" 하며 기뻐하시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무르익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부와 권력을 거머쥔 유력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은 작고 겸손한 용서의 달인, 사랑꾼의 모습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참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이 좁은 길에 들어선 여러분을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나아가는 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격려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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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감정의 변덕이 죽 끓듯 하나요?
*만성적인 공허감과 지루함을 호소한다.
*쉽게 우울해하고 불안정하며 절망감, 무력감을 호소한다.
*지나치게 감동하거나 반대로 무감동하다.
*동일한 사람이나 사건에 대하여 감정의 기복이 심하며 변덕스럽다.
*자기 파괴적이고 충동적 행동을 한다.
*분노 발작이 있다.
*반복되는 자살 제스처를 취한다.
*타인을 과대평가했다가 과소평가하기를 빠르게 반복한다.
*타인에게 의존적이며 애정과 관심을 추구하지만
정작 타인을 신뢰하지 못한다.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타인을 조정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타인을 쉽게 의심하며, 일시적으로 편집증적 증세를 보인다.
♣위 항목에 해당되면, 왜곡된 성격을 바로 잡는 훈련을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첫째, 불편함을 참는 법을 배워서 연습해야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도 세상 속에 섞여 살아야 합니다. 싫고 불편해도 참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내 안의 삐딱한 시선이 조금씩 바로잡힐 것입니다. 둘째, 인내심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일이 내 맘대로 안 되기에 조급함은 화만 키울 뿐입니다. 셋째, 억지로라도 감사할 일을 찾고 그것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습니다.
※이렇듯 불편함을 견디는 훈련을 통해 내면의 왜곡을 잘 다스린 분들의 얼굴에선 평온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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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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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특성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것이요, <셋째>는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무한히, 계속해서,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혹은 몇 번 용서해보고 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는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잘못했노라고 인정하기도 전에,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내 형제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혹은 비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용서에 참여하게 되고, 그 용서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 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이는 용서의 태도를 밝혀줍니다. 곧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심 쓰듯이 혹은 값싼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의무감이나 보상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가 아니라, 남의 시선이나 평가 또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이 있는 용서입니다.
결국, “용서”란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러한 용서와 자비를 이웃과 형제들에게 베풀어야 할 일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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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꺾이고 또 꺾이어도,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게 하소서.
또한, 먼저 용서를 청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받았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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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3)
<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나!>
'용서'라는 언어는 '하느님의 언어'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나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달려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성찰과 통회와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당신의 자녀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십니다.
반복되는 넘어짐이 있더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다시 일어나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나 받아주십니다.
저는 이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저는 이런 하느님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이런 하느님께서 늘 제 곁에 계셔서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런 하느님께로 달려갑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바로 이런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너의 죄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바로 이런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저마다 나의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의 20년 월급에 해당되는 '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고작 100일의 월급에 해당되는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매정함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용서'는 모두에게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용서'는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만 탈렌트를 탕감 받았고, 또 탕감 받고 있다는 사람들, 곧 믿음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언제나 나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나의 믿음이 더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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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RpJw247_A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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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 21)
수 없이
용서의 강과
용서의 고개를
건너고 넘어갑니다.
삶의 끝에는
언제나
용서를 청하는
기도가 있고
관계의 끝에는
욕망이 아니라
용서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되돌려 놓는
용서이며
서로를 살리는
용서입니다.
한 번도
용서한 적 없는
우리들에게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거울 앞에서
우리에게는
낯선 용서이지만
아버지 하느님께는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가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용서를
이야기하는 곳에
용서가 없습니다.
용서의 시작은
죄의 빚을
탕감해 주시는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써내려 가시는
역사는 용서의
역사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의 밥이 되는
삶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긴 용서의
복음입니다.
죄에서
돌아오게 하는
용서입니다.
용서로 돌아가는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의 사람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용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가는
가장 위대한
실천입니다.
완전한 용서보다
더 값진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라는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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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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