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1-9)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던 중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며
불과 같은 성령이 각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죠.
여기저기서 방언을 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전도했습니다.
그러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이 임한 그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고,
이걸 성령강림절로 기념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였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도 성령의 임재가
충만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민족과 열방을 살리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가 되길 축복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명절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유대교에는 삼대 기념일이 있습니다.
유월절, 칠칠적, 초막절입니다.
본문에 등장한 절기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나와있진 않으나
성경학자들은 유월절이나
칠칠절(오순절)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명절이 되면 고속도로가
사람으로 가득 찹니다.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두 성지(聖地)인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요?
얼마 전 이마트에서 할인행사를 한다고
난리였습니다.
저도 혹해서 가봤는데
주차장까지 가는 길부터 꽉 막힌 겁니다.
한참을 기다려서 주차장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건물 안에는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도저히 물건을 살 엄두가 안나더군요.
결국 다시 돌아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도떼기 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베데스다가
바로 이런 곳이었어요.
이곳에는 전설이 내려왔습니다.
물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고침 받는다는 거였어요.
왜냐하면 천사가 한 번씩 내려올 때
물이 움직이는데,
그러면 신비한 효능이
물에 녹아든다고 생각했거든요.
현대에 와서 이걸 과학적으로 조사해보니
뜻밖에 결과가 나왔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천입니다.
비가 오면 물이 차서 연못 역할을 하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점점 매말라 가죠.
그런데 이게 하늘에서 내리는 물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땅에서 솟아나는 물로 인해
연못이 되는 구조입니다.
가끔 물이 땅 속에서
‘푸슉’하고 솟아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밖에서 볼 때는
천사가 왔다 간 것처럼 물이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그때를 기다리며
모두 베데스다 곁에 진을 치고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베데스다의 뜻이 뭔지 아십니까?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환자와 병자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어떻게 자비가 있겠습니까?
물이 한 번 움직이면
너도 나도 달려들 것입니다.
머리채 잡고 싸우겠죠.
여기저기 오물이 가득했을 겁니다.
서울역 노숙인들이 사는 곳보다
더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
바로 베데스다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누가 오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문이 어딘지 아세요?
바로 ‘양문’입니다.
영어로 ‘sheep gate’죠.
제사를 드리러 갈 때 양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 양이 들어가는 문이 양문이었습니다.
또한 양문 곁에는
양을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양 전문 시장(market)도 있었다고 해요.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양문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베데스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당첨될지 모르는
로또를 안고 사는 사람들처럼
전설을 따르며 살았습니다.
이들에겐 베데스다가 생명의 근원,
인생 역전의 포인트였던 셈이죠.
이들 중에 삼십팔 년동안이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무명의 환자를 향해
예수님이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님은 먼저 물어 보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저는 처음에 본문을 보고
‘너무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삼십 년 넘게 병이 낫길 간절히 원하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낫고 싶었겠죠.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걸까요?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상태를 진단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에게는 크게 두 가지 상처가 있었습니다.
먼저는 육신의 장애입니다.
그는 중풍병이라고 추정되는
질병에 걸려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물이 동할 때
내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육체적인 한계를 가진 그는
좌절감에 깊이 빠져 살았습니다.
또 다른 상처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지난 삼십팔 년동안 병을 앓다보니
주변에 사람이 남지 않았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가족들, 친구들, 친척들 모두 그를 떠났습니다.
사람이 병을 오래 앓다보면
거의 다 우울해 집니다.
그러면 작은 일에도 예민하고
쉽게 짜증을 냅니다.
그의 부모들은
당시 평균 수명에 따르면 다 죽었을 것입니다.
남는 사람은 친구나 친척, 이웃들일텐데
그의 모든 불평을 감내하긴 힘들었겠죠.
점점 외톨이가 된 그는,
극심한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야했습니다.
외로움은 그의 인생 전부를 갉아 먹었습니다.
소망 없는 마음이
그의 말에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요.“
이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나의 상처들을 고쳐줄 방법은
당신이 나를 물에 넣어주는 것 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 그는 여전히 전설만 믿고
그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이라는
프로그램에 젊은 부부가 나왔습니다.
아직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부부였습니다.
남편은 배달대행 일을 했습니다.
문제는 남편이 사행성 게임,
즉 도박에 중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스포츠 토토와 같은
도박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런 남편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술로 매일 밤을 보냈습니다.
아내의 문제는 알콜 중독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엔 고성만 오갔습니다.
이 둘의 모습이 마치
삼십팔 년된 병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본인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래서 한탕 주의와 같은 도박에
인생을 거는 것 아닙니까?
또한 그런 남편 때문에 하루하루를 술로 버텨가는
아내도 마음의 상처로 가득한 환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이 땅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외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춘기 청소년들만 외로운 게 아니죠.
청년들도 외롭습니다.
중년도 외롭습니다.
노년은 더 외롭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술로 마음을 달래는 거 아닙니까?
가정의 경제적인 짐을 홀로 져야 하기에,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말입니다.
아내들은 어떤가요?
남편의 축처진 어깨를 보며
같이 힘이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억지로 웃어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자녀들은 커가면서 자기주장이 강해집니다.
자꾸 엄마의 손을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기 잘못 같다고 여기죠.
그뿐입니까?
힘들게 밖에서 일하고 오면 끝이 아니에요.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집안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빨래는 왜 이렇게 해도 끝이 없고,
설거지는 방금 했는데 또 나옵니다.
이 고통 속에 남편의 뒷바라지까지 하면
자기 삶은 없습니다.
결국 우울증이 찾아오죠.
우리 노년의 분들은 어떤가요?
자식 키우느라 수십 년을 고생했는데,
이제는 손주를 키우고 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젊은 시절 앞뒤 안 가리고 뼈 빠지게 살았는데,
남은 건 닳아버린 무릎 관절과
노후에 대한 걱정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의 장애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만이
해결책이라고 여깁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우리 함께 8절을 읽어보자.
요한복음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저는 못해요!"라는 병자의 외침에
주님은 곧바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에게이레’라고 합니다.
”일어나라“, "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일어나서
나에게 오라고 하시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나에게 오라.“
이와 더불어 주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상처 받은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상처가 우리를 짓누르면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집니다.
아프고 쓸린 그 상처 속에
머물며 살고 싶어합니다.
마치 결혼지옥 프로에 나왔던 아내가
알콜 중독에 빠져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에 대한 순종이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루는지 아십니까?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겉으로 볼 땐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많은 젊은이들이
'나도 나아만 장군처럼 유명한 사람이 될거야'라며
도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갑옷과 달리,
그의 속은 완전히 썩어 문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문둥병, 즉 한센씨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엘리사를 찾아가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화를 가득싣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마중 나오기는커녕 종을 보냈습니다.
그리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처음엔 성질이 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죠.
그러나 부하들의 만류로 인해
요단강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아이의 피부처럼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만약 나아만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엄청난 기적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삼십팔 년 된 병자도 똑같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지나가는 이상한 소리로 여기고 무시했다면,
그는 고침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묵상하다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의 종을 통해
매주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말씀을 무시하고 지나간다면
우리는 말씀이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아멘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말씀에 반응하여
기적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 본문을 보며
38년 된 병자의 치유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정확하게 보면
요한복음 5장 전체입니다.
오늘 이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안식일은 유대교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날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안식일에 맞는
규례를 정해 놓고 삽니다.
제가 예전에 성지순례로
이스라엘을 간 적이 있습니다.
호텔에 가보니
신기한 엘리베이터가 하나 있었어요.
누르지도 않았는데
모든 층마다 서는 겁니다.
알고 보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기를 작동시키면 안 된다고 해요.
그래서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알아서 각 층마다 서는
엘리베이터를 쓴다고 합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해서는 안 될 것들이 많은 날입니다.
그중 하나가 자리를 들고 가는 일입니다.
이걸 노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병 나은 사람에게 잘못한 거라며
시비를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등판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하물며 아들인 예수님도 당연히 일을 하셨죠.
병을 고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관심은
약하고 소외된 영혼에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율법에 얽매여 영혼을 구원하기보단
내 의를 드러내기 바쁜
종교지도자들을 질책하십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베데스다에 모인 수많은 병자들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안식일을 구뱔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고 보여주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가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남을 정죄하기 바쁘진 않습니까?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는
사람들이 복 받기만을 바랬습니다.
사랑과 관용보단 율법과 비판만 존재했어요.
우리가 베데스다에서
경험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세상의 전설만 믿고 무턱대고 기다리며
시간과 삶을 낭비하기보단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매주 교회를 나오면서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종교 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저 주일이니까 교회에 가는 거죠.
그러면 안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쉬지 않고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고
열어드리지 않는다면,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없어요.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강제집행을 행하시지 않아요.
무단 점령을 하지 않아요.
반면 사탄은 법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예수 믿는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무단침입을 하죠.
두려움을 줍니다.
죄를 짓게 만듭니다.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자기 변명만 하며 신세 한탄을 하게 하죠.
남들이 도와줘서
내가 이런 식이라면서 말입니다.
우리도 여기에 속아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겪습니다.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리고 싶죠.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ex) 대표적으로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40세에 바로를 피해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느끼는 그 때,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십니다.
"내가 너를 이집트로 다시 보내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낼 거야."
모세는
"저는 할 수 없어요.
제가 누구이기에 그런 대단한 일을 합니까?"
라며 반문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함께 출애굽기 3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믿었던 사람도 떠나고,
건강도 잃었던 모세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
"내가 너와 함께할 거니까 가라."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다시 일어서라고 하십니다.
지금 좌절의 자리에
앉아 계신 분 있습니까?
변화되지 않는 배우자와 자녀들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시는 분 있나요?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그게 수십년 지속되었어도,
주님은 아십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그 자리를 툭툭 털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떠오른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입니다.
1)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않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2)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3)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주님은 오들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내가 새 힘을 줄 거야.”
마음의 문을 활짝 연 사람에게
성령의 은혜를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그분과 동행하면 우리 삶은
반드시 변화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게 하십시오.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우리의 삶의 자리로 나아가
변화된 모습으로 승리하시는
성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