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집 외 1편
자 하
종각역 부근에 그런 집이 있다
무엇이 된 집
무엇이든 되는 집
무엇이든 되려는 집
내 발밑을 벗어나려면 다른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큰 트렁크 안에 든 소지품이 나를 보장하지 않는다
샌드위치 한 조각이 집을 바꾼다*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 오는
초승달부터 보름까지의 기간 27.3일
로셀의 비너스가 들고 있는 뿔잔에 생리 주기가 그려져 있다
구석기에 이미 항성월**을 알았다
한밤중 예산 장례식장에 다녀온다
다시 태어나면 참새가 되고 싶다는 고인 관에
참새 모형을 넣어드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죽음과 삶이 집을 바꾼다
나는 되는 사람인가
무엇이든 되는 집을 가진 사람인가
문을 밀고 들어가는 사람과
문을 밀고 나오는 사람
집의 부분이 사라져도
되는 집인가
되는 집은 살아 있어 씨앗을 품고 있다
집의 이름 위에 달이 걸려 있다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줄거리 참고
**천구상에 있는 임의의 항성을 기준으로 하여 달의 주기를 측정한 것, 지구가 가만히 정지해 있을 때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종이 인간, 종이 마사지*
문장이라고 할 수 없는 몸이 소리 없이
발바닥을 주무르며 지나간 자리
기억과 영화는 사라졌고 바스락바스락
종이꽃이 피었다
종이 성곽에 남은 손 글자들이 역사가 된다
약탈과 저주를 덮고
박물관 창고 속에서 누군가 와서 읽을 때를 기다린다
처음엔 종이였으나 나중은 종이가 아니기도 했고
물고기처럼 어깨를 타고 넘어
동서남북으로
늪이나 연못이 되기도 하는,
부서지기 쉬운 흰 종이가 나를 덮자 종이 밑의 나도 구겨진다
종이 위에 팔도 자라고 다리도 생겨 구부리고 있는 모습
종이 인간을 슬그머니 빠져나와 누운 형상을 보니
꽃이
울컥, 피었다
힘들지,
너를 사랑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종이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자 불꽃 같은 물이 떨어져
종이를 적시고 듣고 싶은 말을 지우고
보고 싶은 얼굴로 번진다
꽃은 지워진다
*인천문화재단 주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몸으로 만드는 예술품,종이인간> 체험 후
자 하
1967년 강원 태백 출생, 본명 정운자.
2013년 계간 다층 등단.
수채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