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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8 / ‘그리하면 살리라’의 은혜 (암5:4-6)
예전에 병원 원목으로 사역할 당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시던 분이 뇌출혈 후유증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왜 그분을 기억하는가 하면 그분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 다 불신자들이었는데 가장에게 어려움이 닥치니까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남편과 아버지가 믿었던 하나님을 자신들도 믿기로 하고는 입원 중에도 병원 교회에 나와 기도에 의지하더라고요.
안타깝게도 환자분은 소천하셨지만, 남은 가족들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고인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르겠다며 저를 찾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고인이 돌아가신 건 분명 슬픈 일이지만 그 이후로 남은 가족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 모습을 보며 그분의 죽음은 그야말로 믿음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었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그분과의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 나 없이, 살다 보면 누구라도 원치 않는 형편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형편이 질병이든 가난이든 실패든 뭐든, 그런 상황들을 맞닥뜨리는 걸 좋아할 사람이 없기에 누구라도 그런 일들이 없기를 고대하며 또 나름 대비하는 삶을 살아들 갑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대비를 한다고 해서 대비가 되던가요?
사람들 각기 나름대로는 이런저런 대비를 한다고는 하지만 막상 그런 일들이 닥쳐오면 피할 곳이 없습니다. 세상일이란 게 언제든 내 생각이나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하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이사야 55:8절 말씀을 보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역시도 매번 내 생각이나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나 안 믿으나 결국은 사는 게 다 똑같다는 말이네요?’라고 반문할 수가 있겠으나 둘 다 내 생각이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선 같지만, 세상일과 하나님의 역사 사이에는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일은 내 생각이나 내 뜻대로 되지 않기에 늘 시련이 있게 되고 막힌 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내 생각이나 내 뜻대로 되지는 않을지라도 결과는 항상 나를 살리는 길이고 나를 부요케 하고 만족케 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에서도 보면 하나님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당시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벧엘로, 길갈로, 브엘세바로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왜들 그랬을까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잘살아 보겠다며 농촌을 떠나 도시로만 몰려들었듯이 당시에도 다들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그리들 했던 것인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지 말라!”고.
이유는 5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사람들 생각엔 남들 하는 것처럼 하면 나도 남들처럼 잘 살 수 있겠거니 했지만, 이는 요즘의 유행어에 빗대 말하자면 ‘그건 니 생각이지!’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매번 ‘하지 말라.’는 말씀만 하신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되 죽겠는 길이 아니라 살겠는 길로 나아가는 비결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최종적인 성공과 실패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결정됩니다. 물론, 사람의 수고와 노력만으로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결론적인 성공’을 좌우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도와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땀 흘려 김을 매고 논밭을 가꾸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는 망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성공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람마다 애쓰고 노력은 해야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을 찾아야만 원했던 결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게 믿음이고, 이런 사실에 소위 콧방귀를 뀌는 것이 불신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제부터는 어떤 일을 하든 그것에서 원했던 결과를 얻고 누리고자 한다면 그 일을 위해 내가 애쓰고 수고할 때면 거기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기도의 애씀과 노력도 빠지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각 사람이 일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같은 노력과 같은 애를 쓴다 할지라도 어떤 분은 그나마 제대로 된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간혹 어떤 때는 잘못된 방향으로만 애만 쓰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이럴 땐 노력하는 방향이 잘못됐다 보니 결과도 원했던 것이 아닌 잘못된 것들만 있게 되는 게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노력이나 시도를 하든 그런 것들과 함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노력과 시도를 병행한다고 하면 그 결과는 설사 사람이 애쓴 결과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향해 가는 것이었다 해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애씀과 노력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 쪽으로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 룻기를 보면 흉년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민 간 엘리멜렉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잘살아 보겠다고 옮겨간 그곳에서 느닷없이 집 안의 남자 세 명이 모두 죽고 아내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이 남게 됩니다.
우린 이 이야기를 보며 하나님 없이는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성공이나 행복은 얻지 못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 전체를 봐도 ‘승리와 기쁨의 이야기’도 있지만 ‘패배와 고통의 이야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모든 이야기의 결론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믿음은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으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이제부터라도 결국에 가선 성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면 지금은 당장엔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들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을 이기지 못하도록 더 힘써 믿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시련의 때엔 당장의 형편이 괴롭고 견디기 힘들 것이란 건 이해가 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인생의 괴롬’'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야 합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어렵고 힘들기에 더 하나님을 찾고 더 믿음의 자리를 지켜내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복 받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수용소 벽에는 ‘하나님! 저는 태양이 빛나지 않아도 태양이 있음을 믿듯이 비록 지금은 침묵하신다 해도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각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리하면 살리라.’의 은혜를 베푸실 줄로 믿습니다.
이쯤에서, 여러분의 생각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잘될 때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될 때는 차이가 아주 크게 납니다. 똑같은 시련의 자리일지라도 불신은 불신일 뿐이지만 믿는 자에겐 하나님이 여시는 살 길이 열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구멍이란 게 어디 있는지를 여러분은 아시나요?
설사 그런 구멍이 있다 해도 나에겐 언제쯤이나 열리게 될까요?
이제 우린 그동안 알았던 속담을 약간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세상이 무너져도 하나님껜 솟아날 구멍이 있다.’로 바꿔서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살리는 구멍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4절의 말씀처럼 “그리하면 살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라야만 우리는 살고, 살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우린 ‘하나님을 아는 자’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을 아는 것까지는 잘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을 믿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사탄이기에 하나님을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사탄에게 있는 약점이고 그런 약점을 이용하여 우리가 사탄의 시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탄이 못하는 것을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육신으로 연약한 우리지만 영적으로 강한 마귀를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탄보다 잘할 수 있는 게 뭘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전에 새벽 기도회 때 여집사님 한 분이 고개를 자꾸 도리질을하며 기도를 하시는 걸 보고는 기회가 돼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자기는 기도하다가 가끔 의심이 생기고 불안해지게 되면 ‘이러면 안 되잖아.’라고 하면서 의심을 부정하고 불안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믿습니다.’라는 기도만 반복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마귀가 주는 것은 의심이고, 하나님을 향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이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만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살 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믿으려고 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기 위해 당연히 성경 말씀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내용을 알려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위해 읽으려고 하면 성경이 말씀을 전달하는 패턴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그 패턴들 중에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것이 ‘Because ~ therefore’라는 패턴입니다.
우리말로는 ‘왜냐하면 ~그러므로’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이란 말보다는 ‘때문에’로 번역하는 게 이해하기엔 더 쉽습니다.
어쨌든. ‘때문에’에 해당하는 것이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 상황이고 형편이라 한다면 ‘그러므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믿는 자에게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패턴이 왜 중요한가 하면, ‘때문에’와 ‘그러므로’에서 우리의 믿음이 있어야 할 지점이 바로 ‘때문에의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에겐 실패가 있었으나 실패라 여겨졌던 그 인생을 들어 하나님은 모세가 출애굽의 승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셉에게도 시련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시련의 한복판에 있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인생 역전의 은혜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를 ‘때문에 ~그러므로’의 패턴에서 보자면, 모세는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됨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된 것이고, 요셉도 숱한 시련 ‘때문에’, 하나님만 믿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보면, 모세와 요셉의 경우에는 ‘때문에’와 ‘그러므로’ 사이에 무엇이 들어갔습까?
“믿음으로!”가 들어간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고난 중에서도 승리하는 인생이 되고자 하면 언제든 우리의 믿음은 당면한 일들 ‘때문에!’, 그다음엔 우리의 ‘믿습니다!’가 있어야 하고, 그 뒤엔 하나님의 ‘그러므로!’의 순서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게 성경을 읽으며 우리가 우리 각자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 믿음의 패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에게 있는 가난이나 실패나 낙심이나 괴롬, 답답함 등등 때문에 하나님만 믿기를 더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시련 ‘때문에’ 믿음을 굳게 붙잡고 산다고 하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형통함과 만족하게 하심의 은혜가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리 말씀드리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있게 됩니다.
성경의 ‘때문에 ~그러므로’의 패턴으로 보나, 본문 4절 말씀처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신 말씀들로 보건대,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을 살리신다 했으면서 왜 꼭 ‘왜냐하면’이나 ‘때문에’의 단계를 거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하여 그리하신다.’라고만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현 상황에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기회나 기대조차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런 나이기에 나에게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도록 자식을 갖지 못했을 땐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찾아와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전까지만 해도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라고 했던 아브라함이 천사들이 돌아간 직후에는 그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를 대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할례를 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패턴을 깨달았기에, ‘때문에’의 단계에서 ‘믿음으로’를 발동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러므로’의 때를 준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결과를 보면 ‘때문에’의 형편에서 그렇게 믿음으로 기다린 아브라함이었기에 ‘그러므로’ 그의 나이 백 세에 하나님이 주시는 아들을 얻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게 됩니다.
늘 기억하셔야 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때문에!’ ‘믿었더니!’ ‘그러므로!’의 역사는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패턴입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하나님은 짧은 구절 속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씀을 거듭 반복하시면서 현재의 고난과 시련과 세상의 불신 풍조 ‘때문에’ 너만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권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가 그리할 때면,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있게 되는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약속이 무엇이라고 했던가요?
“그리하면 살리라!”입니다.
믿으세요. 우리가 살되 인생에서 잘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현재의 상황과 형편 때문에 낙심하고 고민하는 대신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만 믿기로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했습니다.
세상에는 ‘인생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공식’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있습니다.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을 전해주는 패턴입니다.
성경을 통해 ‘왜냐하면 ~그러므로’나 혹은 ‘때문에 ~그러므로’의 패턴을 찾아내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도 그 패턴 그대로의 믿음을 적용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언제든 우리의 믿음은 항상 결과가 있기 전의 상황인 ‘왜냐하면’이나 ‘때문에’의 단계에서 발동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오늘도 힘들고, 한 치 앞을 모르며 살아가는 삶이지만, 항상 하나님이 주실 ‘그러므로’의 결과를 소망하며, ‘지금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