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29 일은 제2연평해전 7주기 기념일이었다.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이 지금 엄연한 휴전 상태이고 조국보위에 몸바친 분들로 부터 크나큰 신세를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하 일본경찰의 서슬이 시퍼렇을 때도 무속인들은 굿이나 제례에 반드시 군장걸이라고 하여 나라와 마을을 위해 전사한 (조선)장병들의 혼백을 천도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러나 망국과 식민지 과정을 한세대 이상 지나며 민족의 얼은 일제의 계략대로 슬금 슬금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 한 예가 어른- 즉 기성세대의 비겁성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하기야 일제 통치세력과 가까운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그들 2세들은 공부를 더 시켰으니 국권과 역사 회복에 그들이 앞장 설리가 없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3.1운동 부터 6.25 전쟁, 민주화 투쟁 등 모두 어린 학생, 청년들이 앞장서고 때묻은 세력가들은 뒤에서 권력, 자본의 맛을 즐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나마 군출신들이 리더쉽으로 사회 운동을 만들어 가고 엘리뜨 관료들의 마님들이 경쟁에서 지지말라고 출근 가방에 자료 더미와 코피에 대응할수 있는 안약과 탈지면을 필수품으로 넣어주었든 그 시기에서 부터 점차 행정 경험과 전문성이 쌓이고 국부가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큰 문제는 과도한 평등의식이 지배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 조정과 대한제국 내의 친일파들이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정감록, 격암유록, 요한계시록 등 현실부정, 이상추구로 기존 질서 타파의 바람을 일어키면서 성이 없었든 상당수의 천민들에게 발달한 인쇄술로 족보를 만들어 주고 제사, 장례식, 혼인식까지 하게 하면서 신분해방을 주도하게 되자 망국의 경지에 가도 전국적인 충혼의 의병이 일어날수가 없었다.
상류층의 leadership 과 하류층의 followership 이 맞아야 성공도 승리도 가능하나 한국은 식민지를 거치며 유럽처럼 전통있는 윤리적 상류층은 박약하고 신분의 부침, 혼란으로 책임의식 있는 하류층도 적은 바 정신문화적으로 기형적 신생국 구조를 보여 주게 되었다.
지금 혼란한 정국, 내부 갈등도 면밀히 살펴 보면 우익의 비겁성, 좌파의 위선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만약 일제가 한반도 곳곳에 신작로(新作路)를 만들어 전국을 식량기지, 병참기지화로 바꾸어갈 때 기존 양반 계층이 몰락한 그자리에 신양반 계급이 형성되어 명예, 의무, 모범, 선행 등 건전한 가치관이 상류층에 형성되었다면 한일합방상태에서도 두뇌와 체력이 우수한 조선의 핏줄이 일본을 이끌어 갈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의 기회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될 때였다. 이때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전지역 개조운동과 함께 새마음운동을 병행하여 한민족 행동 내규(內規)를 만들어 뇌리에 각인시켰드라도 적어도 유태나 화교 다음가는 모범적이고도 세계적인 생활공간 network가 가능했을 것이다.
무척이나 아쉬운 긴 시간의 과거이지만 6.29 해전 7주년에 즈음하여 희망을 갖는 것은 바로 한민족의 젊은이들이 아직 살아 있고 대륙을 호령했던 그 기상의 유전인자가 나타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참수리정의 조타장 ㅡ 한상국 중사는 허파를 관통하는 상처를 입고도 수동으로 조종간을 다루다가 점차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도 배가 남쪽으로 가도록 조종간을 몸무게로 걸어 숨져 갔다. 침몰한 357함의 조타실에서 40일간 있다가 해군해난구조대(SSU)에 발견되었는 데 이때도 조종간을 움켜잡고 있었다.
물속에서 구조대원이 당기려해도 손이 펴지지 않아 신체훼손을 우려한 구조대원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제 전투는 끝났읍니다. 부모님계신 고향집에 가셔야죠" " 불편하지만 포대에 들어 가십시요" 라고 이야기하지 손이 풀려지고 머리가 포대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가 숨이 멎으면서도 배를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 수심27미터 5노트 이상의 해저의 급류에도 배가 똑바로 서있었다.
그는 하사관 계급을 달고 짧은 한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직업정신과 투혼, 전우애는 명군주와 제왕에 버금하고 우리 사회가 식민지 때를 벗을 수 있는 영원한 신양반으로서 귀감을 보여 주었다.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 북한군 하사관 김명희 포반장도 있다. 북한 방송과 노동신문에 같이 나온 여군 포반장이야기는 가슴을 저리게 했다. 내용인즉 고사포반이 훈련을 마치고 귀대 중 산비탈 급경사 지점에서 포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나자 포반장이 운전석에서 나와 뒤에 견인한 포 바퀴의 수동 브레이크를 직접 걸고자 시도했다가 자신의 몸이 바퀴 틈으로 으스러지면서 탄력이 줄게되어 부하의 생명과 장비를 온전히 구했다는 게 요지이다.
전쟁사에 알렉산드 대왕이 전투에는 이기고도 고게를 떨군 바, 페르샤 다리우스 대왕의 친위대들이 죽으면서도 일렉산드 대왕 전차의 수레바퀴를 잡고 죽어가기 때문에 추격을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 강대국의 정신사에는 이처럼 무언가 다른게 있다.
포병 장교 시절 포차의 브레이크 라이닝이 닳아 위험할 때가 적지 않아 휴가를 가면 개인 경비로 라이닝을 사서 귀대한 적이 있었다. 70년대 후반 우리 군이 이럴 진데 북한군의 보급실태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개인적인 희생은 가슴아프지만 그들이 있기에 이 민족의 장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부패하고도 사이코패드 처럼 비정상적인 상층부의 입지와 정략적 목적때문에 건전하고도 성성하디 성성한 한민족의 귀한 젊은이들이 희생당한 사실에 단군성조(檀君聖祖)께서는 얼마나 분노하고 슬퍼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