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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일하심 『때를 쏟아지는 은혜』를 읽고서
프롤로그
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도 ‘은혜 아니면 살라갈 수가 없네.’ 라는 고백이 나올 때가지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느낄 때까지 섣부르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 드리겠다는 교만이 꺾이고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이 절로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통곡하듯 우리의 입에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여,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라는 고백이 절절히 흘러나오는 때가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 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서 은혜 베 푸시기를 원하며.>(민수기 6:24〜25)
이 책이 지금도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이 땅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위로의 편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까지 시마다 때마다 쏟아지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끝까지 기다려주신 두란노서원의 변함없는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부 은혜가 내게로 왔다. 구원의 순간
은혜란 받는 이에게는 값없는 것이지만 주는 이에게는 전 소유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필립얀시)
1. 처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십니까?
큰 선물을 받은 사람
비록 아내는 선물로 받은 좋은 가방을 무려 5년 동안이나 밖에 들고 나가지 못하고 집에 모셔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좋은 가방을 볼 때 ‘나도 있다.’ 생각하면 전혀 부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큰 만족이 작은 불만족들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큰 만족을 맛본 사람은 작은 불만족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온 선물
우리가 받은 구원은 너무나 비싼 값을 지불하고 얻은 선물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구원이 ‘은혜의 선물’ 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엡2:8)
하나님이 아무런 공로 없는 자에게 부으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싼 선물,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아카시아 같은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은 짝에도 쓸모없고 단지 땔감으로 적격인 우리를 구원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지성소 안의 법궤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조각목을 그냥 쓰지 않고 금을 입히셨듯이 우리에게 금 면류관을 씌워주시고 금빛 가득 품은 세마포로 둘러 주셨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조각목 인생을 금을 입힌 법궤인생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십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2.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고 있다면
우리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스케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더 컸습니다.
따라서 새벽에 안전한 증축을 기도하던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큰 노스교회를 찾아가 교회를 팔라고 하자 그 교회 목사님께서 이사를 가야하는데 무조건 이사오라고 하여 이사를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 역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그릇에 미처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가?
어느 날 에베소서를 읽다가 하나님의 스케일을 만났습니다.
저는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만큼 주시고 내 생각의 크기만큼만 채워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찾는 자가 자기 찾는 것을 찾게 되고 구하는 만큼 얻게 된다고 여겼다가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의 스케일은 우리의 스케일을 압도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때는 구하는 것을 주시지만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스케일에 닿지 못할 때는 구한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면 생각의 그릇을 넓히신 후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이 지혜와 더불어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왕위의 안정까지도 허락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왕상 3:4〜14)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은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이끌어 그분의 뜻 가운데 있게 한다. (제럴드 싯처)
3. 차마 하나님께 간청할 수 없을 때
쌓아 두신 은혜
시편 31편 19절에 기록된 “쌓아 두신 은혜”입니다.
이 말씀을 만났을 때 저는 더 이상 성경 읽기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 단어 하나를 붙잡고 살았습니다.
통장에 돈이 쌓인 모습을 본 적이 없고 뒤주에 벼가 가득한 광경도 별로 본 적이 없고 오히려 늘 부족함뿐이던 제 삶에 “쌓아 두신 은혜”는 이렇게 반갑게 다가왔습니다.
<시편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살려 주시는 은혜
지금 당신의 삶이 더도 덜도 아인 급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주저앉아 울지 말고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나오십시오.
하나님은 급하게 달려 나온 인생을 향해 절대로 헌금 기록부터 검사하시거나 사역 경력부터 훑어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은혜의 날개 아래로 담대히 나오십시오.
하늘을 여는 암호
우리는 “돈을 다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로버트 제프리스 목사님은 회중에게 “돈을 다 지불하라.” 는 암호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원하신다면 지금 여러분의 주보에 받아 적으십시오.
제가 한 자 한 자 불러 드리겠습니다.
이 암호는 바로 J.E.S.U.S입니다.
이 말 끝에 회중은 일제히 “아 〜” 하는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우리 인생의 암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에 쌓여 있습니다.
쌓아 두신 은혜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할 한 가지도 없습니다.
다만 은행으로 달려갔듯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쳐야 합니다.
하늘의 문을 여는 암호 J.E.S.U.S 이 다섯 글자만큼은 평생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은혜의 세계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실패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4. 다시 시작하기에 늦지 않았습니다.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
좌판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종류의 과일 중에서 단연코 때를 맞추어 나온 제철 과일이 가장 깊은 맛을 내듯 365일 임하는 은혜이지만 하나님이 대에 맞게 주시는 은혜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 은혜를 일컬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세상에서 자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의 필요를 정확히 알고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는 설명 뒤에 “하물며”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더욱 반가운 것은 이 말씀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버려도 될 날은 없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만물에게 시와 때를 정하셨습니다.
때를 따라 피고 지게 하셨고 때를 기다렸다가 피고 지는 꽃을 가장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에 아름답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때는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기한이요 선물입니다.
범사의 기한과 천하만사의 때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이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가장 아름다운 은혜의 선물을 주십니다.
모세의 인생을 우리는 아무도 80년을 버린 시간이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 80년이 하나님이 쓰려고 준비시키신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려도 될 날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주님이 주신 아름다운 날을 힘 있게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제2부 쏟아지는 은혜를 누리자. 회복의 순간
우리가 무지개 아래에서 찾는 것들은 여행하기에 더 쉬운 길이 아니라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그 여행길에 함께해 줄 하늘의 자비다.(켄 카이어)
5. 지금 이 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현실과 믿음의 결여
오늘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내가 한 일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서 원하는 일을 이룬 것 같아도 여전히 그것은 내 노력이나
수고가 아닌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울처럼 “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과거의 믿음도 좋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 것이라는 미래의 믿음도 좋은데 지금 살아나리라는 오늘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르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간증하고 앞으로 인도하실 하나님도 확신하는데 지금 내 삶에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 믿음의 결여가 모든 성도에게 뚜렷이 보이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지금 이 자리에도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친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야곱아 나는 너와 함께 하며 너를 지켜주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너를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름도 모르는 빈들에서 홀로 두려움 가운데 돌베개를 베고 잠든 야곱이 잠에서 깨자마자 내뱉은 고백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현상과 감정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와 언제나 동행하고 계십니다.
유진 피터슨이 말했듯이 『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계신 것처럼 살아 내는 것이 바로 현실에 뿌리내린 영성이요 믿음입니다.
공동묘지에서 울다.
제가 공동묘지 벤치에 앉아 마음을 쏟아 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그 묘지 위로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함을 느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영적 발돋움』에서 하나님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이 ‘외로움’ 이라면 혼자 있어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은 외로움이 아닌 ‘고독’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메마른 제 심령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는 제 모든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로 이끌었습니다.
외로울 때 구해야 하는 은혜는 “함께해 주소서”라는 간구가 아닙니다.
이미 함께 하신 하나님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모든 사람이 당신을 떠나고 홀로 남았다고 생각될 때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고백을 드려 보십시오.
<시편 25: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믿음은 사람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죠지뮐러)
6. 주저앉은 자리에서 쏟아지는 은혜
은혜 안에 있다.
수족관에서 상어가 달려들어도 안전한 것처럼 아무리 환경이 우리를 위협하고 삼키려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두려워하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 환경을 감상할 여유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도 불에 그슬리지 않았습니다.(단3장)
자신들을 보며 깜짝 놀란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자가 경험하는 놀라운 세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엇이 강하지도 않은 바울을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바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그 비법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디모데후서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약함이 은혜를 만나면 강함이 됩니다.
그렇기에 약함을 약함으로 방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그 은혜를 뿌리치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은혜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약함은 더 이상 약함이 될 수 없습니다.
비결은 은혜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기쁨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라는 똑같이 기쁨을 말하는 헤도네와 달리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기쁨을 말합니다.
‘헤도네’가 외부적 환경에서 기안한 것이라면 카라는 내적인 기쁨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상태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내적 기쁨이었습니다.
약함이 사명을 만났을 때
카타콤베에서 어린 소녀가 지하 무덤의 통로를 로마 군사들 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이 소녀에게 준 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각 장애입니다.
소녀에게는 지하 무덤이 전혀 새로운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시력을 가져가신 하나님이 다른 신체 감각을 주셔서 지하 무덤길을 다 기억하게 하셨고 위험이 닥칠 때마다 믿음의 공동체를 피할 길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기하시지 않은 인생을 스스로 포기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약함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할 때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서운하고 실망해서입니다.
그런데 고통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CS루이스가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 이라고 했던 것일까요 약함을 방치하면 비루한 인생이 되지만 하나님께 드리면 곧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당신의 빈 잔이 은혜로 가득 차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때 은혜도 더욱 깊어진다. (필립 헨리)
7.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는 것
은혜의 때를 기다림은 저를 은혜 안에 머물게 했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을 가져다주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는 겸손함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시편 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 이다.>
<전도서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디모데전서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저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응답이 지연될 때마다 시편 102편 13절에 제 이름을 넣고 기도합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병락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병락을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 이다.
이 구절을 몇 번이고 되뇌이다 보면 조급함이 사라지고 소망이 응답 먼저 배송되어 옵니다.
그 소망을 붙잡고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때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헬라어로 시간을 뜻하는 말을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인간의 시간을 ‘크로노스’ 하나님의 시간을 ‘카이로스’ 라고 합니다.
오스카 쿨만은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역사는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만날 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필립 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이 가라앉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까지 찾아온다.
동시에 은혜는 우리를 그 자리에 두지 않고 새로운 고지로 이끈다.“
진짜 베데스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하나의 징조가 비쳐옵니다.
바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입니다.
어떻게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것일까요?
이유는 그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힘도 없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일어설 수 없는 혼자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갈 수 없는 그 한 사람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사람을 기다리는 연못이라면 진짜 베데스다이신 예수님은 직접 찾아오시는 연못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힘이 있고 돈이 있고 도와줄 사람이 있는 곳을 위한 곳이 베데스다라면 가장 힘이 없고 돈도 없고 도와줄 사람 한 명 없는 사람을 위한 진짜 베데스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은혜는 자연 적인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다.
8. 눈을 들어 보니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법칙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씩 만나게 되는 보석 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하박국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회초리로 때리실 때 도망갈 문을 슬쩍 열러 놓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우리를 향한 긍휼을 잊으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남원 뱀사골에서 버스를 내려 산장까지 목표를 하고 떠났습니다.
중간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캄캄해 오고 짐승우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힘이 빠졌을 때 가방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초코파이가 하나 있었고 얼마나 감사하였는지 모릅니다.
다시 일어날 힘을 얻고 가까스로 산장을 찾았습니다.
실날같이 작은 은혜라도
저는 살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큰 은혜를 구할 때도 있지만 잠시 베푸시는 은혜를 잘 활용합니다.
‘실낱같은 은혜’ 라고 할까요?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긍휼을 베푸사 잠시 베푸시는 실날같은 은혜라도 좋사오니 저에게 그 은혜를 주셔요.
제가 이 고비를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거짓말처럼 어디선가 잠시 주시는 은혜의 공급자가 등장합니다.
큰 은혜만 볼 줄 아는 눈에서 잠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볼 줄 아는 눈이 열린다면 그 영혼은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큰 바위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큰 은혜 대문에 살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상에서 베푸시는 작은 은혜들 때문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금 당장 은혜가 필요하다면 하나님 앞에 눈을 감고 잠시라도 베푸시는 은혜를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3부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하다. 성숙의 순간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은혜로 인도되지 않으면 어리석을 뿐이다.
9. 날마다 은혜가 머물러 있습니까?
은혜가 쫓아오는 삶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을 때 제일 부러운 것 중에 하나가 은혜가 머물러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은혜를 쫓아다닌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밟는 땅을 그에게 축복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요셉은 형통을 쫓아가지 않았고 그가 가는 곳마다 형통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8:6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은혜는 살면서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받은 은혜를 머물러 있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32:26) 라고 말했던 은혜에 대한 목마름, 은혜를 머물게 하는 영적 기백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든지 은혜가 머물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 하나님 앞에서 순종입니다.
돌아가는 지름길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키우던 말이 집을 나갔으니 불행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말이 돌아왔는데 한 마리를 더 데리고 왔으니 복입니다.
그 말을 타고 놀던 아들이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불행입니다.
전쟁이 나서 징용에 끌려가지 않았으니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불행 속에 행복이 숨어 있는 일들이 늘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8∼9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것이 ‘도리어’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자꾸 절망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해도 추락하는데 더듬어 보니 날개도 부러져 있는 상황이라 해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절벽을 행해 전력질주 하고 있는 것처럼 삶이 자꾸 꼬이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어도 은혜가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것이 ‘도리어’의 역사를 만들어 낼 줄 믿습니다.
리처드 로어가 쓴 『위쪽으로 떨어지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우리는 떨어져도 하늘로 떨어지는 존재입니다.
<빌립보서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욥의 고난이 도리어 그가 정금이 되는 과정이었고 요셉의 고난이 도리어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고 다윗의 엔게디 광야에서의 도망 다녔던 세월이 도리어 블레셋 전쟁터를 익히는 수업 시간이 되었고 모세의 40년 광야가 도리어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훈련이 되었고 넘실거리는 요단강이 오히려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세우는 기회가 되었던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에게 닥친 모든 일은 도리어 복이 되어 돌아올 줄 믿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로 겸손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언제 누구에게 어떤 은혜를 주실 것인지 정하실 수 있습니다.
10. 무릎으로 구하는 은혜
<욥기 33: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시편 30: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우리는 은혜의 새로운 차원을 만나게 되는데 ‘구하는 얻는 은혜’입니다.
<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성경은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빌립보서 4:6〜7절의 말씀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성령의 간구하시는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기도가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착각해 기도하기를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는 구원의 은혜가 있지만 보좌 앞으로 달려가야만 얻을 수 있는 ‘구하는 얻는 은혜’ 가 있습니다.
구하여 얻는 은혜는 기도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구하는 것을 주실지 더 나은 것을 주실지 지금 주실지 나중에 주실지 그 모든 결정은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있어야 할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찾아온 천사
5년 만에 잘 모르는 사람이 다른 장소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이 종을 사용해 주옵소서.
수많은 닫힌 창문을 열어 주십시오.
수많은 창문이 보이는데 그 창문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
핸드폰 창문, 인터넷 창문, 텔레비전 창문, 나라들의 창문을 열어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십시오.
인종의 창문이 열리고 이 종의 사역을 통해 모든 민족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저는 그 기도에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느껴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아멘” 으로 응답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그는 다시 이 한마디를 하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해 주신 하나님은 그날 이후 세미한 교회가 아름답게 세계, 미국,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고 닫힌 창문을 여는 사역에 적극적으로 쓰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가장 주린 제비 새(끼)처럼
제비 엄마의 기억력 때문에 제비 새(끼)들에게 공평하게 음식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먹은 새(끼)는 입이 적게 벌어지고 가장 배가 고픈 공복의 새(끼)가 입을 가장 크게 벌린다고 합니다.
제비 엄마는 단지 입이 제일 크게 벌어진 놈에게 먹이를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저는 왜 예수님이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눅 6:21)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생긴 부족함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한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그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고 이전에 없었던 하나님과의 사귐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실 분비가 되었는데 구하지 않아 아직도 하늘에 은혜가 쌓여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다. (제럴드 싯처)
11. 은혜를 더 풍성상하게 채우는 비결
마중물 같은 은혜
<요한복음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 위에 은혜” 정말 매력적인 표현입니다.
구원이라는 공평한 은혜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에게 임하는 은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은혜를 아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중 나가는 물이 없이는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땅속의 물이 솟구쳐 오르지 않습니다.
물을 맞이하러 온 물, 이것이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닐까요?
우리교회에는 왜 은혜가 없을까? 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세가족부에 ‘천은혜’ 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우리 교회에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천은혜 성도님이 등록하셨습니다.
종말로 신기한 것은 천은혜 자매를 통해 하나님이 교회에 은혜를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선교의 열정을 가진 자매는 선교 훈련을 받고 선교지로 떠났고 교회는 자매가 돌아올 때까지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자매는 교회에 은혜를 가지고 온 마중물 역할을 하였습니다.
은혜의 기억 장치
은혜를 키워 은혜 위에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의 일주일을 보면 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마중물을 간직하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은혜의 마중물은 기억력과 비례합니다.
지금 은혜가 필요합니까?
이미 주신 은혜를 먼저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더 큰 은혜를 맞이하는 마중물로 사용하십시오.
은혜 위에 은혜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은혜는 나를 교정하고 성숙시킨다.
12. 은혜 받은 이후의 삶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은혜 받은 이후
바울은 사람들을 향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여러분 다음 안식일까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영어 성경에는 “그들에게 반드시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권했다.”는 뜻입니다.
다행히도 성경을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바울의 권면을 듣고 은혜 안에 거하다가 그다음 안식일이 되자 그 성에 있는 사람 거의 대부분이 회당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13:44)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를 키운 사람들로 비시디아 안디옥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단편으로 “그날 이후” 라는 글은 은혜를 받는 것보다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매우 잘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를 소홀히 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김으로 방치해 우리의 삶의 문제가 찾아왔다면 하나님은 무작정 연장통을 들고 고장 난 은혜를 고치지는 않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채우는 은혜
은혜의 사후 관리를 잘하려면 믿음의 좋은 친구들을 만나야 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고 은혜가 은혜를 키우듯 우리 주님의 은혜 가득한 좋은 친구들은 나를 은혜 안에 머물게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함께 함의 능력을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가복음 12:43〜45)
우리가 아무리 큰 은혜를 받고 우리 내면의 상처가 치료를 받고 상담가로부터 완치 판정을 받아도 우리 속을 비워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야만 우리 마음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텅 비워 두지 않고 은혜로 가득 채우는 철저한 사후 관리가 우리 인생을 복되게 만들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