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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맞붙은 공명(孔明)과 중달(仲達) -
한중(漢中)으로 돌아온 공명(孔明)이 장군들을 불러 모아 앞으로의 계획(計劃)을 의논(議論)하려고 할 때였다. 공명 앞으로 급보(急報)가 날아들었다. 병석(病席)에 누워 있던 관흥(關興)이 세상(世上)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이럴 수가 있나...! 그 충의(忠義)로운 사람에게 하늘은 모질기도 하시지... 관흥(關興)에게 목숨을 길게 주지 않으셨구나...!" 공명(孔明)은 한(漢)의 부흥(復興)을 위해 함께 애썼던 관운장(關雲長)의 아들 관흥(關興)이 젊은 나이에 세상(世上)을 떠나자 크게 슬퍼하였다.
공명(孔明)이 관흥(關興)을 잃은 슬픔을 간신(艱辛)히 수습(收拾)하고 출정(出征) 길에 올랐다.
공명은 모두 삼십사만(三十四万)의 군사(軍事)를 다섯 길로 나누어 기산(祁山)으로 진군(進軍)하도록 하였다. 선봉(先鋒)은 강유(姜維)와 위연(魏延)으로, 그 둘은 바로 기산(祁山)으로 향(向)했고, 이회(李恢)는 군량(軍糧)을 가지고 사곡(斜谷)으로 가는 길 어귀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공명(孔明)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향한다는 소식(消息)은 위주(魏主 : 조예)에게도 알려졌다. 소식(消息)을 듣자마자 조예(曺叡)는 초조(焦燥)함을 감추지 못하고 사마의(司馬懿)를 불렀다.
"얼마간 잠잠(潛潛)하더니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기산(祁山)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오. 어찌하면 좋겠소?"
걱정스러운 조예(曺叡)의 물음에 사마의(司馬懿)는,
"폐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신이 지난 밤 천문(天文)을 보았더니, 중원(中原)에는 왕성(旺盛)한 기운(氣運)이 가득하고 규성(奎星)이 태백(太白)을 범(犯)했으니, 이는 서천(西川)에는 불리(不利)하다는 뜻이옵니다. 그런데 제갈량(諸葛亮)은 건방지게도 제 재주만 믿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려 하고 있으니 스스로 패망(敗亡)의 길로 들어선 것이지요. 신(臣)이 폐하(陛下)의 큰 복(福)을 등에 업고 제갈량(諸葛亮)을 물리치도록 허락(許諾)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자신만만(自信滿滿)하게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한다.
"좋소. 그대가 제갈량(諸葛亮)을 상대相對)해 보시오."
조예(曺叡)의 허락(許諾)이 떨어지자 사마의(司馬懿)는,
"제가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 넷이 있습니다." 하고, 조예(曺叡)에게 청을 한다.
"그들이 누구요?"
"죽은 하후연(夏侯淵)의 네 아들입니다. 맏아들은 패(覇), 둘째아들은 위(威), 셋째아들은 혜(惠), 넷째아들은 화(和)입니다. 첫째 하후패(夏侯覇)와 둘째 하후위(夏侯威)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솜씨가 빼어나고, 셋째 하후혜(夏侯惠)와 넷째 하후화(夏侯和)는 병법(兵法)에 조예(造詣)가 깊습니다. 이들은 부친이 한중(漢中)에서 촉병(蜀兵)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촉(蜀)에 원한(怨恨)이 깊습니다. 제 아비의 원수(怨讐)를 갚기 위해 틀림없이 이를 악물고 싸울 것입니다. 하후패와 하후위를 선봉(先鋒)으로 삼고, 하후혜와 하후화를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았으면 합니다."
사마의(司馬懿)의 말에 조예(曺叡)는 미심(未審)쩍은 표정(表情)으로 사마의에게 묻는다.
"지난날 하후무(夏侯楙)가 군사전략(軍事戰略을 잘못 써서 인마(人馬)만 허다하게 잃고, 그 자신(自身)은 면목(面目)이 없어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데, 하후 가문(夏侯家門) 사람들을 믿어도 되는 것이오?"
"제가 말씀드린 네 사람은 하후무(夏侯楙 : 하후돈<일명 애꾸장수>의 차남)와 비교(比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마의(司馬懿)는 빙그레 웃으며 여유(餘裕)있는 태도(態度)로 조예(曺叡)를 안심(安心)시킨다.
"알겠소. 내 그대를 대도독(大都督)으로 삼고 모든 장수(將帥)들의 임명권(任命權)을 줄테니 잘 싸워 보시오. 내 경(卿)을 깊이 믿고 있소."
"충성(忠誠)을 다하겠습니다!"
사마의가 출정(出征)하는 날이 되었다.
조예(曺叡)는 사마의(司馬懿)에게 손수 조서(詔書)를 내려 당부(當付)의 말을 전(傳)하였다.
“경(卿)이 위수(渭水)에 이르거든 성벽(城壁)을 높이 쌓은 후 굳게 지키기만 하고 함부로 나서서 싸우지 말라. 촉군(蜀軍)은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짓으로 물러나는체하며 우리 군(軍)을 유인(誘引)하려 할 것이니, 그대는 신중(愼重)히 생각하고 함부로 뒤쫓지 않길 바란다. 그들의 양식(糧食)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물러가려 할 때 그 틈을 노려 공격(攻擊)하면 큰 어려움 없이 승리(勝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 군마(軍馬)도 피로(疲勞)가 덜할테니 이보다 좋은 계책(計策)은 없을 것이다.”
사마의(司馬懿)는 위와 같은 조예(曺叡)의 조서(詔書)를 받고 그날로 낙양(洛陽)을 떠났다.
장안(長安)에 이르러 각처(各處)의 군사(軍士)를 불러 모으니 사십만(四十万) 대군(大軍)이었다. 사마의(司馬懿)는 이들을 데리고 위수(渭水)에 당도(當到)하여 영채(營寨)를 세웠다. 그리고 사십만(四十萬) 대군(大軍) 중(中) 오만(五萬)의 군사(軍士)를 공병대(工兵隊)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위수(渭水) 상류(上流)에 아홉 개의 부교(浮橋)를 놓도록 하였다. 그런 뒤 선봉장(先鋒將) 하후패(夏侯覇)와 하후위(夏侯威)에게 강(江)을 건너가 서쪽 강(江) 안쪽에 영채를 짓고 진(陳)을 치게 하였다. 게다가 만일(萬一)의 경우(境遇)를 대비(對備)하기 위하여 후방(後方)에는 성(城)을 새로 쌓아 올렸다. 방어(防禦)에 치중(置重)했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積極的)인 공격(攻擊) 자세(姿勢)를 취(取)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공명(孔明)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기산(祁山)에 다섯 개의 진(陳)을 구축(構築)하였다.
그리고 사곡(斜谷)과 검각(劍閣) 사이에 열네 개의 진영(陣營)을 구축(構築)하고 그곳에 군마(軍馬)를 주둔(駐屯)하게 하여 장기전(長期戰)에 대비(對備)하였다.
어느날 정탐(偵探)을 나갔던 병사(兵士)가 돌아와 급(急)하게 알린다.
"손례(孫禮)와 곽회(郭淮)가 농서(隴西)의 군사(軍士)를 이끌고 와서 북원(北原)에 영채(營寨)를 차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명(孔明)은 재빨리 전략(戰略)을 떠올린다.
그리고 장수(將帥)들을 모두 소집(召集)하여 계획(計劃)을 상세(詳細)히 설명(說明)한다.
"위군(魏軍)이 북원(北原)에 진(陳)을 쳤다고 한다. 우리에게 농도(隴道)를 끊길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잘 된 일이다. 우리는 북원을 칠 것처럼 행동(行動)하면 된다. 우리가 공격(攻擊)하는 곳은 본진(本陣)인 위수(渭水)가 될 것이다. 먼저 뗏목 백여 채를 만들어 그것들을 엮고 그 위에 건초(乾草)를 얹어라. 내가 한밤중에 북원(北原)을 공격하면 사마의(司馬懿)는 위수(渭水)를 비우고 북원을 구하러 나올 것이다. 저들이 물러나는 기미(幾微)가 보이면 후군(後軍)이 먼저 강을 건너고 뗏목을 풀어서 강물에 흘러가게 하고 뗏목 위 건초(乾草)에 불을 놓아라. 강(江) 위에 놓은 위군(魏軍)의 부교(浮橋)가 모두 탈 것이다. 그런 뒤에 후군(後軍)은 당황(唐慌)하고 있는 위병(魏兵)의 뒤를 치면 된다. 우리가 이렇게 하여 위수(渭水) 남쪽을 얻고나면 앞으로 진군(進軍)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공명(孔明)의 계획(計劃)대로 촉(蜀)의 장수(將帥)들은 일을 시작(始作)했다.
정탐병(偵探兵)은 촉(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촉병(蜀兵)들이 뗏목을 만들고 부지런히 싸우러 갈 채비를 하는 것을 위(魏)의 정탐병이 유심(有心)히 보고 그대로 사마의(司馬懿)에게 알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마의(司馬懿)는 선봉장(先鋒將) 하후패(夏侯覇)와 하후위(夏侯威) 형제(兄弟)를 불러 비밀(祕密)스럽게 명(命을) 내린다. 하후패(夏侯覇)와 하후위(夏侯威)가 명을 받고 물러가자
다음에는 곽회(郭淮), 손례(孫禮), 악침(樂綝), 장호(張虎)를 불러 그들에게도 비밀(祕密)스러운 명령(命令)을 내린다.
이날, 본진(本陣)을 떠난 촉군(蜀軍)은 위수를(渭水) 건너 천천히 진군(進軍)하고 있었다.
위연(魏延)과 마대(馬岱)가 북원(北原)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황혼(黃昏) 무렵이었다. 위연과 마대가 나타나자 영채(營寨)를 차리고 있던 손례(孫禮)는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전쟁(잔뼈)가 굵은 위연(魏延)은 손례(孫禮)에게 뭔가 계략(計略)이 있음을 금방(今方) 눈치챘다.
'이것은 함정(陷穽)이다! 돌아가야 한다!' 위연(魏延)이 급히 돌아가기 위해 말머리를 돌리는 순간(瞬間), 왼쪽에서는 사마의(司馬懿)의 군사가, 오른쪽에서는 곽회(郭淮)의 군사(軍士)가 쏟아져 나온다. 위연(魏延)과 마대(郭淮)의 군사는 죽을 힘을 다해 맞선다. 하지만 적(敵)의 위력(威力)은 너무나 강(强)하다. 위병이 휘두른 창에 찔린 촉병의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맞서는 것보다 얼른 그곳을 벗어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위연과 마대는 겨우겨우 살아나왔다. 함께 갔던 군사들은 대부분이 창(槍)에 찔려 죽거나 물에 빠져 죽고 살아남은 자는 절반(折半)도 못 되었다.
오의(吳懿)와 오반(吳班)은 건초(乾草)를 실은 뗏목을 이끌고 위수(渭水)로 내려오고 있었다. 건초(乾草)에 불을 질러서 위(魏)가 애써 구축(構築)해놓은 부교(浮橋)를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뗏목이 부교 미처 도달(到達)하기도 전(前)에 악침(樂綝)과 장호(張虎)가 강(江)을 가로질러 매어 놓은 동아줄에 뗏목이 한데 묶여 버렸다. 촉병(蜀兵)이 뗏목의 흐름이 멈춘 것에 당황(唐慌)하는 사이, 강기슭에 숨어 있던 악침과 장호의 궁노수(弓弩手)들이 속속(續續) 등장(登場)하여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었다.
뗏목은 그저 부교(浮橋)에 불을 지를 용도(用途)였기 때문에 아무런 방어(防禦) 장치(裝置)가 없었다. 뗏목을 끌던 촉병(蜀兵)들은 화살을 맞고 죽거나 물에 빠져 죽는 자(者)가 태반(殆半)이었다.
그 와중(渦中)에 병사들을 이끌던 오반(吳班)이 화살을 맞고 강물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화살이 날아오기 전에 강(江)으로 몸을 던져 헤엄쳐 나온 병사 몇 만이 살아남았다.촉(蜀)이 끌고 갔던 뗏목은 고스란히 위벼(魏兵)의 차지가 되었다.
그 무렵 왕평(王平)과 장의(張嶷)는 북원(北原)의 소식(消息)을 모른 채 위(魏)의 본진(本陣)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위군(衛軍)의 영채(營寨)가 바로 코앞인데 어째 위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적진(敵陣)이 고요한 것이 이상(異常)하다 하며 왕평(王平)이 장의(張嶷)에게,
"우리 군의 소식을 알 수가 없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이곳이 이렇게 조용한 것은... 사마의(司馬懿)가 미리 알고 대비(對備)해 놓은 것이 아닌가 싶소.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작전(作戰)을 망칠 수도 있으니 부(浮橋)교에 불이 붙는 것이 보이거든 그때 적진(敵陣)에 들이닥칩시다." 하고, 말하였다.
왕평(王平)과 장의(張嶷)가 군사들의 진군(進軍)을 멈추고 대기(待機)하는데 급사(急使) 하나가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승상(丞相)께서 급(急)히 회군(回軍)하라 전하셨습니다!"
"회군(回軍)?" 갑작스러운 소식에 왕평(王平)과 장의(張嶷)는 입을 모아 까닭을 물었다.
"북원(北原)에 갔던 군사(軍士)와 뗏목을 몰고 갔던 군사 모두 위군(魏軍)에게 대패했(大敗)다고 합니다."
예상(豫想)하지 못했던 긴급(緊急)한 사태(事態)에 왕평과 장의는 군사를 급히 돌리려고 하였다.
그때 갑자기 지금까지 갈대가 바람에 서로 부딪는 소리만 가득하던 갈대밭에서 위군(魏軍)들이 튀어나와 일제히 촉군(蜀軍)에게 덤벼들었다. 위군(魏軍)이 놓은 불길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위군의 기세(氣勢)는 그 불길보다 더 거셌다.
왕평(王平)과 장의(張嶷)과는 군사들을 이끌어 한바탕 싸움을 벌였지만 위군(魏軍)의 기세(氣勢)에 눌린 촉병(蜀兵)들은 위군의 창(槍)에 쓰러져갔다.
두 장수(將帥)가 간신히 적(敵)들의 포위(包圍)를 벗어났을 때에는 이미 촉병(蜀兵)의 반(半) 이상(以上)이 부상(負傷)을 입거나 죽음을 면(免)치 못한 상태(狀態)였다.
공명(孔明)은 기산(祁山)으로 돌아와 살아남은 군사(軍士)들을 수습(收拾)했다. 헤아려보니 이번 싸움에서 잃은 군사는 일만(壹萬)이 넘었다.공명(孔明)에게 이렇게도 비참(悲慘)한 패배(敗北)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생애(生涯) 마지막 기회(機會)라는 심정(心情)으로 여섯 번째 기산(祁山) 출정(出征)을 나섰던 것이기에 마음의 괴로움은 계속(繼續)해 커져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큰 패배(敗北) 이후(以後) 공명(孔明)은 군사(軍士)들을 다독이며 군사들의 시름 뿐만 아니라 본인(本人)의 시름 또한 걷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느날, 양의(楊儀)가 공명을 찾아왔다. 양의는 공명(孔明)의 기분(氣分)이 어떤지 살피고, 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周圍)를 한 번 돌아보고는 조용히 말을 꺼낸다.
"승상(丞相), 요 근래(近來)에 위연(魏延)이 승상의 뒷공론(空論)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냥 두어서는 안 될 일 같아 말씀드립니다."
공명(孔明)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음... 나도 알고 있다. 위연(魏延)의 불평(不平)은 근간(近間)의 일이 아니지." 하고, 말한다.
"그걸 알고 계시면서 왜 가만히 두십니까? 승상(丞相)께서는 군율(軍律)에 엄격(嚴格)하지 않으십니까."
공명(孔明)은 뒷짐을 지고 먼 곳을 응시(凝視)하며 서성이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고,
"인재(人材)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지. 위연(魏延)만큼 용감(勇敢)하고 쓸만한 장수가 없어. 위연(魏延)의 태도(態度)와 행실(行實)을 알면서도 내가 그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理由)지." 하고, 한탄(恨歎)하듯 말한다.
"......" 공명(孔明)의 말에 공감(共感)하는 양의(楊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실(實)로 상황(狀況)이 그랬다. 수십(數十) 년간(年間) 역적(逆賊) 토벌(討伐)을 위해 촉(蜀)이 위(魏)와 싸우는 동안 나라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을 바탕에 두고 용맹(勇猛)하게 싸우던 많은 장수(將帥)들은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나이를 먹어 노환(老患)으로 세상(世上)을 뜨기도 했고, 전장(戰場)에서 싸우다 적(敵)에게 희생(犧牲)되기도 했다.
이제 공명(孔明)의 수하(手下)에 남은 용장(勇將)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위연(魏延)이 그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용장(勇將)이다보니, 공명은 위연(魏延)이 군기를 문란(紊亂)하게 하는 것을 알면서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인재(人材) 기근(飢饉)이 중원(中原) 정벌(征伐)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공명(孔明)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가운데 성도(成都)로부터 비위(費褘)가 찾아왔다.
마침 중요(重要)한 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必要)했던 공명은 그 일을 해줄 만한 사람이 나타나자 반가이 맞이한다.
비위(費褘)와 인사(人事)를 하자마자 공명(孔明)은,
"그대에게 부탁(付託)이 있소. 동오(東吳)의 손권(孫權)에게 서신(書信)을 한 통 보내고 싶은데 동오(東吳)로 가서 서신을 전달(傳達)해 줄 수 있겠소?" 하고, 묻는다.
후주(後主)의 명령(命令)으로 기산(祁山)의 분위기(雰圍氣)를 살피러 왔던 비위(費褘)는 동오(東吳)에 서신(書信)을 전달(傳達)하고자하는 공명(孔明)의 의중(意中)을 금방(今方) 파악(把握)하고,
"승상(丞相)의 명을 제가 어찌 거역(拒逆)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한다.
공명(孔明)은 동오(東吳)에 전달(傳達)할 서신(書信)을 써서 비위(費褘)에게 건낸다.
"이 편지(便紙)로 손권(孫權)의 마음이 움직였으면 좋겠군. 그대가 노력(努力)해주길 바라오."
공명이 쓴 서신 들고 비위(費褘)는 동오(東吳)로 떠났다.
공명(孔明)은 서신(書信)을 들고 동오(東吳)로 향(向)하는 비위(費褘)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사마의(司馬懿)에게 모든 것을 간파(看破) 당(當)했던 직전(直前)의 전투(戰鬪)를 꼽씹었다.
그리고 부디 자신(自身)과 손권(孫權)의 뜻이 같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삼국지 - 389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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