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가 미우라 가즈요시에게 편지를 보냈더군요.
스포츠 잡지 Number 609호(지난 주 발매 됐습니다.)에 실린
이 내용을 이번에도(굴리트-최영일에 이어...)제가 우리 말로
풀어봤습니다.(이 코너 있다는 거 몇 차례 말씀 드렸죠?)
친애하는 가즈에게.
미우라!
그동안 잘 지냈는가?
원래는 작년 12월, 한국에서 있었던 자선시합에서 자네와
오랜만에 재회하는 거였는데......
내가 주최한 [소아암 박멸 자선대회]에 자네가 쾌히 참가하겠
다는 답변을 준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정이 맞질 않아 자네가 내한(來韓)을
못했지. 그렇지만 1월에 이하라 은퇴 시합에서 재회할 수 있어
서 무척 기뻤다네.
그 때 내가 무엇보다 놀란 것은 자네의 젊음이었어!
드리블, 패스, 슛팅! 그 모든 플레이가 37세라고는 도저히 믿어
지지않을 정도로 날카롭더군.
내가 처음으로 자네의 플레이를 본 것은 92년 다이너스티컵
대회였지. 자네와의 대결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게임은 역시
93년에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졌던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일세.
그 게임에서 한국은 자네의 골로 인해 패했지.
한국에 있어서 일본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당시에 큰 쇼크였네.
도하에서 패한 이후부터 한국 대표팀은 누구 보다도 자네를
경계했네. 나 또한 자네를 의식 했지.
J-리그에서 대결할 때 조차도 대표팀 시합 때와 같은 마음
가짐을 갖고 경기에 임했을 정도니까.....
그 후, 韓日戰이 있을 때 마다 느낀 것은 일본 축구가 확실히
성장 했다는 거였네. 첫 대결 때와 비교하면 일본 축구는 대단
히 강해졌어. 선수 층도 두터워졌고.....
그것은 역시 J-리그의 존재가 크다고 생각하네.
지금의 일본 축구는 세계 축구 강국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 2002년 韓日월드컵에서 일본의 16강 진출이
그것을 증명 했다고 생각하거든.
韓日월드컵에서 자네의 모습을 볼 수 없던 것이 유감이었지만
자네가 일본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한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한국에서도 ‘미우라 가즈요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네.
내가 일본에 있었을 때 자네가 크로아티아 리그에서 건투하는
영상을 카시와의 자택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큰 감명을
받았네. 도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가 전해져 왔거든.
자네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 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나 역시도 도전을 계속 하고 있고.
미국에 진출해서 작년부터 LA 갤럭시에서 뛰고 있지.
여기서는 선수로 뛰면서 영어를 배우고 클럽 운영과 마케팅
등을 배우고 있네.
원정 시, 이동할 때 언제나 햄버거에 고전하고 있지만 일본
에서 많은 것을 배웠듯이 여기서도 많은 것을 배워가지고
그것들을 한국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축구 발전을 위해서 쓰
고 싶네.
어쨌든 우리 서로 현역 생활 최후의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세.
그리고 은퇴 시합 할 때는 언제든지 초대해주게.
나도 다음 번 자선시합에 자네를 꼭 초대할 테니까....
그 때는 꼭 참가해주길 바라네.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자네의 건투와 행복을 비네.
洪明甫
다음은, 미우라 가즈요시가 홍명보에 대해서 평을 한 것입니다.
[홍명보는 아시아의 보물이다.]
이번 아시안컵은 정말 흥분했다.
나는 언제나, 대표팀 시합은 선수로서의 객관적 시각을 갖고
관전하는 편인데 지난 요르단전과 바레인전 만큼은 마치 서포터
와 같은 기분으로 지켜봤다. 소리를 질러가며!
내가 출전했던 92년 히로시마 아시안컵이 생각났다.
그 때도 쉬운 게임은 단 한 게임도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승승장구 해나가니까 일본 전체가 열광에
휩싸이게 되더라.
아시아팀과의 대결은 독특한 열기가 있다. 아마 그것은 아시아
라고 하는 공통의 토양 위에서 나름대로의 축구를 구사 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그 대표적인
예라는 것은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홍명보가 늘 일본을
가로 막는 벽이었다는 것도.....
'한국 선수' 라고 하면 지난 번 편지를 보내 주었던 최영일
처럼 투쟁심이 강한 선수들이 대부분인데 반해서, 명보 상은
두뇌를 사용하는 스마트한 플레이 스타일로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 늘 잰틀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명보 상은 다른 한국 선수들 보다 오히려 더 왕성한
투쟁심을 내적으로 갖고 있어 한국 선수들 모두 홍명보를 존경
하고 또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대결하면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다만, 日韓戰이 벌어졌을 때, 나는 사실 명보 상과 직접 맞서는
경우는 그렇게 많질 않았다. 언제나 나는 최영일을 상대 하기에
바빴으니까...
그래도 J-리그에 와서는 몇 차례 맞설 기회가 있었는데 중요한
찬스에서 항상 명보에게 볼을 빼앗겼다. 명보는 보란치 보다
레베로로 있을 때가 힘을 더 발휘했다. 명보는 위치 선정이
대단히 뛰어난 선수다.
명보는 21세 때 90년 이태리 월드컵에 출전한 이래, 33세에
맞이한 2002년 日韓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런 선수 좀처럼 없다!
더구나 2002년 월드컵에서는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멋지게
리드하며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고 뿐만 아니라 올리버 칸,
호나우도에 이어 우수선수로 선정되면서 브론즈 볼까지 수상했다.
명보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활약은 같은 아시아인의 일원인 우리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선수가 J-리그에 진출했다는 의미는 정말 크다.
이미 노정윤 상등이 J-리그에 와서 활약했다고는 해도, 한국
을 상징하는 선수가 일본에서 플레이 하는 거에 대해 한국
국내에서 반발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러했기 때문에
홍명보는 일본을 선택했다고 나는 본다.
물론 「日韓」이라고 하는 벽을 넘어, 프로 축구 선수로서
선택한 것이긴 하겠지만, 日韓이라고 하는 엷지 않은 벽을
스스로 넘어보려고 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신천지를 미국으로 정한 것은
역시 홍명보 다운 선택이다. 축구 뿐 아니라 영어, 클럽 경영,
마케팅 등 그는 시야가 그라운드 밖으로도 뻗어있다.
내가 볼 때 축구 선수의 미래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넓은 의미로 축구 비즈니스 세계, 바로 명보 상이 지금
목표하고 있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축구 지도자의 세계로 뛰어드는 일. 감독이라던가
아니면 코치가 되어 ‘현장’에서 일하는 길이 있는데 나는
아마 이 쪽 일을 할 것 같다.
어찌됐든, 이제는 日韓 관계만 생각할 수 없는 시대다.
이번 아시안컵에서는 중국 서포터들의 행동이 큰 문제가 됐는데
나는 원래 스포츠에 정치를 연관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관되는 부분은 있겠지.
그러할 때 아시아를 리드해 온 일본과 한국이 아시아 나라들과
어떻게 호흡을 맞춰 나갈지를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안컵은 대단히 중요한 대회다.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아직은 조금 경시하는 감이 있긴
한데 진정으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주위의 라이벌들과
‘절차탁마(切磋琢摩)’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예를 들면, 한국 선수가 J-리그에 진출하는 것은 흔한 일인
반면에 그 반대의 경우는 아직 드문 형편이다.
이상(理想)을 말하자면, 아시아 선수는 외국인 선수에 포함
시키지 않는 시스템 비슷한 걸 만들어 아시아 각국끼리 선수
교류가 활발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명보 상은 아마도 이러한 일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명보는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축구에 있어서 보물이기 때문에...
명보 상!
대단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이렇게 정중히
편지까지 보내줘서 정말 고마우이.
지난 번, 자선대회는 나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일정이 맞질 않아 참가하지 못한 걸 유감스럽게
생각하네.
그래도 명보 상과 나의 생각은 같다고 생각하오.
축구 비즈니스도 그렇고 축구 전문인으로서도 그렇고....
우리 서로 축구를 통해 세계가 조금이라도 평화로와 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봅시다.
이상입니다.
이번 글을 우리 말로 풀면서 아쉬운 부분이 몇 군데가 있었
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이상(理想)을 말하자면 ~ 선수 교류가 활발
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 부분 있지 않습니까.
그 부분을 번역 하기가 조금 난해하더라구요. 무슨 의미인 줄
은 대략 알겠는데....(요런 게 몇 군데 있었습니다.)
이게 다 저의 일본어 실력이 형편 없어서 그런 것이니 만큼
그냥 가볍게 넘어가 주시기 바랍니다.(이런 건 이수덕 박사
님이 번역 하셔야 되는데....워낙 바쁘신 분이라. 악기에
빠지셔가지고....)
최영일 이후에 가즈에게 편지를 보낸 유명 축구인은
가모 슈 감독과 펠레더군요.(와~~펠레까지!!)
Number에서 이 연재 코너를 언제까지 지속할 지 모르
겠으나 아마 제 생각엔 로베르토 바지오가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바지오와 가즈는 친분도 두텁고 또 일본에서는 바지오의
인기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 같은 예상이
들거든요.(물론 순전히 제 예상이니까 너무 믿지는 마시길...)
만일 바지오가 가즈에게 편지를 쓰게되면 그 때가서 그 내용
을 제가 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지겨우시지용~~?)
P.S: 미우라는 67년 생이지요. 이하라-나카야마와 같이요.
그런데 미우라는 빠른 67년 생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하라-나카야마 보다 1년 선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선수가 미우라에게 깍듯이 존대말을
쓰는 걸로 알고 있어요.
미우라는 고정운 코치(66년 생)와 같은 연배라고 보시면 됩니다.
첫댓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선수요..
미우라가 명보형보다 나이가 많은데....... 바로 "자네"로군.ㅎㅎ 역시 홍카리스마.......
역시 스포츠의 우정은 나라간의 감정따윈 허물어 뜨리는군요.^^ 우리나라 국민들도 옛날일은 잊되 까먹지는 말아야 될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로시마 아시안겜은 94년 아닌가요? 암튼 잘봤습니다..ㄳ
이런글을 번역까지 해주다는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예전에 자주 붙었던 선수들하고 편지 주고 받는구나.. 최영일도 그렇고
싸우면서 정들었나봐요...보기 좋네요..
한때 일본 최고의 테크니션 아니었나 미우라.ㅋ 유니폼에 KAZU라고 써있어서 왜 쟤는 미우라라고 안할까 라고 맨날 생각했는데.ㅋㅋ
미우라가 홍명보선수가 바르샤에서 뛰는거 보면서 도전을 느꼇어야 하는데 ㅠㅠ
일본 최고의 축구스타.. 미우라 카즈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