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석의 축구스타 클래식- 36. 독일 월드컵 기간 중에는 역대 월드컵에서 멋지고, 인상 깊은 축구로 세계 축구팬을 매료시켰던 감독 세 분도 다루려고 하는데 먼저 '토탈사커의 창시자' 리누스 미셸 감독에 대해서 논해 보려 한다.
1928년생인 리누스 미셸은 현역 시절(50년대)네덜란드 대표팀 센타포오드로서 명성을 날렸다. 당시 아약스(당시엔 아마추어팀)소속이었던 미셸은 ‘헤딩의 명수’로 불리우며 아약스에서 총 260시합/122골을 기록했을 정도로 탁월한 득점 능력을 자랑하는 골게터였다. 미셸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고, 스스로 강인한 훈련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책임감까지 강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미셸은 1958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고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스포츠 지도자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후에 청각 장애인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했다. 그러다가 1962년에 암스텔담 아마추어 팀인 JOS 감독을 맡게된 것이다.
3년 뒤인 1965년에 프로 지도자 라이센스를 취득한 미셸은 곧바로 아약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유럽의 경우 아마추어팀 감독이 느닷없이 국내 톱팀 감독이 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문 케이스라고 하는데 미셸의 성격과 인품을 잘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인해 아약스 감독으로 부임한 거라고 한다.
그 무렵 아약스는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최강팀 중 하나였으나 유럽에서는 2류팀에 지나지 않았다. 네덜란드 국내에서도 페예노르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팀이었는데 미셸이 부임한 이후 국내 무적이 되면서 66년부터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69년엔 챔피언스컵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비록 결승전에서 AC밀란에게 4대1로 패했지만 미셸의 지도력은 유럽 전역으로 알려졌다.
이 패배를 기점으로 미셸 감독은 과감한 팀개혁을 시도했다. 미셸은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들을 과감히 제외시키고 니스켄스, 아리에 한 등의 가능성 풍부한 젊은 선수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미셸은 팀을 71년 챔피언스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해에 미셸이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아약스는 72, 73년에도 챔피언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역시 미셸 감독이 틀을 만들어 놓은 덕분이었는데 그 핵심에는 요한 크루이프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있었다. 미셸 감독과 요한 크루이프는 뗄레야 뗄 수없는 관계였다.
상승세의 미셸은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으로 74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리누스 미셸의 토탈사커는 이미 60년대 말부터(아약스 감독 시절)유럽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었는데 전세계에 알려진 건 74년 월드컵 때부터다. 네덜란드는 1차 리그 첫 게임에서 스웨덴과 0대0 무승부를 기록했을 뿐 그 후 불가리아를 4대1, 우루과이를 2대0으로 누르고 2차 리그에 진출했다. 2차 리그에서도 네덜란드는 전대회 우승국인 브라질을 2대0, 동독을 2대0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4대0으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아쉽게도 결승전에서 주최국인 서독에게 2대1로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그 대회에서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의 '토탈사커'는 세계 축구계에 큰 충격을 던져줬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주전 멤버 11명 중 크루이프를 비롯한 나머지 네 명의 선수(니스켄스, 크롤, 아리에 한, 레프 슐비아)가 아약스 소속이었다. 미셸 감독은 이들을 축으로 토탈사커를 구사한 것이다. '토탈사커'란 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전원 공격, 전원 수비'라고 할 수 있는데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수들이 자유스럽게 포지션 체인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싱을 걸어서 상대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사실 '토탈사커'라는 단어는 리누스 미셸 감독이 만들어낸 단어가 아니다. 미셸 감독은 당시 '프레싱 사커'라고 표현했는데 축구 기자들이 '토탈사커'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리누스 미셸의 토탈사커가 뿌리 내리기까지는 수년이란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 정말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당시 미셸 감독과 선수들이 여러 차례 충돌을 했다고 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강도 높은 훈련 때문이었다고 한다. 토탈사커를 제대로 구사하려면 시합 중에 선수들이 포지션 체인지를 쉴세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체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다보니 기술 축구를 구사하는 선수들은 자기의 특기와 개성을 전혀 살릴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일부 선수들이 크게 반발했던 것이다. 그 때 그들의 스트레스는 엄청났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팀의 핵심 선수였던 요한 크루이프의 말은 조금 다르다. 크루이프 말에 의하면 '미셸 감독의 토탈사커는 피지컬 보다는 고난도의 테크닉과 위치 선정이 우선이었다. 다만 자유스러운 축구이면서도 거기엔 반드시 책임이 따랐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크루이프가 요령있게(?)훈련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진정한 축구팬이라면 이쯤해서 당시에 요한 크루이프가 없었다면 리누스 미셸 감독의 토탈사커가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없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도 이 부분을 오래 전부터 궁금해 했었는데 이 궁금증을 상당 부분 해소 시켜준 분이 일본의 고토 타케오 씨다. 작년 여름, 서호정 기자가 일본 최고의 축구 저널리스트인 고토 다케오 씨와 단독 인터뷰(인터뷰 내용은 축구협회 홈페이지에 실려 있음.)를 가졌었는데 그 때 서호정 기자가 이에 대한 질문을 고토 타케오 씨에게 한 적이 있다.(고토 타케오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고의 축구 저널리스트로서 74년 서독 월드컵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월드컵을 비롯한 굵직굵직한 대회를 현지에서 직접 관전/취재해 오고 있는 분이다. 고토 씨는 유럽 및 남미 축구에 대단히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고토 씨는 서호정 기자의 질문에 이와 같이 답변했다. '조심스럽게 접근하겠습니다. 1974년 월드컵에서 크루이프가 있어서 토탈사커가 성공했다고 볼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78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크루이프 없이도 토탈사커를 보여주며 준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토탈사커의 힘이 무엇인가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토탈사커는 전술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갑니다. 그런 다양하고 세밀한 전술들을 하나하나 수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죠. 20년 뒤에 아리고 사키 감독은 AC밀란에서 압박의 개념을 도입하며 당시의 토탈사커를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토탈사커는 굉장히 수비적인 축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74년 토탈사커는 분명 재미있었죠. 그 이유는 역시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토탈사커를 공격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요한 크루이프 때문일 겁니다.'라고...... 너무도 명쾌한 설명이다.
'장군'으로도 불리운 리누스 미셸은 대단히 엄격하고 냉정한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FC쾰른 시절 리누스 미셸 감독 밑에서 플레이를 했던 독일의 피에르 리트바르스키(80년대 서독 최고의 테크니션)는 미셸 감독이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미셸이 어느 정도로 엄격하고 무서운 감독인지 리트바르스키 자서전(자서전 제목: Litti)에도 실려져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리누스 미셸 만큼 엄격한 감독을 본 적이 없다. 그는 군대 장교 보다 더 엄한 지도자다. 미셸이 추구하는 축구는 직선적이고 스피디한 축구다. 그는 모든 페인팅과 드리블은 축구에 방해가 되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치밀한 전술가임이 분명하다. 현대 축구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당시 그가 추구한 축구가 현실이 됐다. 그러나 나와 같이 개인기에 의존하는 타입의 선수에게 있어서는 그는 치명적인 지도자였다. FC쾰른 시절 그는 나를 전투머신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나를 개조하려고 했고, 나를 다른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미셸은 뛰어난 심리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축구 철학에 반발하는 이들을 용서치 않았다. 미셸에 있어서는 개인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선수는 평등했다. 트레이닝 때도 선수의 개성을 생각치 않고 모두 균등하게 트레이닝 시켰다. 결국 11명의 로봇을 만들었다.
어느 시합에서 패한 후 그 다음 날 연습장에서 그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의 불성실한 자세가 마음에 안들어서 나는 어젯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희들이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 보다 더 힘들어야 한다."면서 선수들을 쓰러질 때까지 뛰게 했다......‘
이 정도면 대략 리누스 미셸이 어떤 스타일의 감독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FC쾰른에서 한 시즌 동안 미셸의 지도를 받았던 일본의 오쿠데라(FC쾰른 77/80시즌)역시도 리트바르스키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재미난 건, 리누스 미셸 감독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했던 제자 중의 하나가 바로 차범근이라는 것이다. 미셸 감독이 88-89시즌에 레버쿠젠 감독을 역임한 적이 있는데 당시 부임한 후 선수단 기념 촬영이 있을 때 미셸 감독이 ‘세계적인 스타 차붐 옆에서 찍고 싶다!’고 하면서 친근감을 나타냈고 그 후에도 차범근을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차범근은 체력이 좋고, 빠르고 또 열심히 뛰는 선수 아니었던가. 게다가 차범근은 경기 중에 볼을 길게 소유하지 않는 선수였다. 차범근은 미셸 감독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선수였을 것이다. 미셸 감독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차범근은 지금도 미셸 감독을 은인(恩人)으로 생각하고 있다.(현 한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인 아드보카트도 미셸 감독의 제자이고 또 미셸 감독 아래서 코치를 한 적도 있는 걸로 필자는 알고 있다.)
미셸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격 그대로 전략이나 전술을 짤 때 무척 과감하다는 것이다. 감독들이 새로운 전술 및 포메이션을 짤 때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반해서 미셸 감독 만큼은 그런 거 없이 단호하게 결단을 내린다고 한다. 그의 과감한 용병술은 EURO88 때 빛을 발했다. 그 대회에서 미셸 감독은 팀의 키플레이어인 루드 굴리트를 주로 오른 쪽 미드필더로 기용했다. 굴리트는 전형적인 공격형 미드필더이면서 경우에 따라 센타포오드, 쉐도우 스트라이커, 플레이메이커 그리고 스위퍼까지 가능한 만능 플레이어인데 그는 전술 및 한 포지션에 얽매이게 되면 제 기량을 발휘 못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굴리트가 AC밀란-삼프도리아 등에서 뛸 때 감독들은 그에게 딱히 포지션을 정해주지 않고 그라운드 전체를 휘젖게 놔둔 것이다. 그러나 EURO88에서는 굴리트가 미셸 감독의 명령(?)에 군소리 없이 복종하면서 결국 우승에 크게 기여를 했다. EURO88은 미셸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닿게 해준 대회였다.
리누스 미셸은 누가 뭐라해도 역대 세계 최고의 명장이다.
전 이태리 대표팀 감독인 아리고 사키 감독도 미셸 감독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데 사키는 리누스 미셸에 대해서 이렇게 평을 했다. ‘미셸 감독은 위대한 지도자다. 세계 축구계의 분기점이 있다고 한다면 미셸이 출현하기 이전과 이후가 될 것이다. 세계 축구사에 있어서 이렇게까지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은 그 외에 없다. 미셸은 혁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미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라고. 수제자인 수퍼스타 요한 크루이프도 미셸 감독을 존경하고 있고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세계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리누스 미셸 감독. FIFA로부터 20세기 최고의 감독상까지 수상한 리누스 미셸 감독은 안타깝게도 작년 3월 벨기에의 알스토 시립병원에서 7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마리누스 리누스 미셸(Marinus "Rinus" Micheles) 국적: 네덜란드 나이: 1928년생 현역 시절 포지션: 센타포오드 소속팀: 아약스 아마추어팀(1945~1958년)
- 감독 경력 - 62~65년 JOS(아마츄어팀) 65~71년 아약스 71~74년 바르셀로나
74년 네덜란드 대표팀 74~75년 바르셀로나 76~78년 바르셀로나 78~80년 LA 아즈텍
80~83년 FC쾰른 84~88년 네덜란드 대표팀 88~89년 바이엘 레버쿠젠 90~92년 네덜란드 대표팀
- 감독으로서의 주요 타이틀 - * 아약스 66, 67, 68, 70년 리그 우승 67, 70, 71년 네덜란드컵 우승 71년 챔피언스컵 우승
* 바르셀로나 74년 리그 우승 78년 국왕배 우승
* FC쾰른 83년 서독컵 우승
* 네덜란드 대표팀 74년 월드컵 준우승 EURO88 우승
|
첫댓글 이 사람이 아드보카트의 스승이구나.
히딩크에게도 영향을 준사람이고 차범근축구에게 영향을 준사람이기도함..
센타포오드~ ㅋㅋ
센타포오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