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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쇄신되어야 한다면 뭐가 쇄신되어야 할까?
안철수는 올듯말듯하며, 안철수계열의 분들은 계속 안철수를 부르지 말고 먼저 민주당이 쇄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항상 둘이다.
1) 기득권을 내려 놓아라.
2) 정치를 혁신하라.
그런데 지금은 곁을 떠났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싫어했던 화법이 바로 이런 식의 화법이었다. 운동권출신들이 항상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데, 그때마다 노대통령은 이런식의 의견과 함께 반려시켰다고 한다.
"대통령에게 그 기득권들이 뭔지를 스스로 연구하게 하고, 정치 혁신을 스스로 계획하는 부담지우는 것 보다는, 무슨 지시와 무슨 결정을 원하는지 적시해서 주세요."
그러니 안철수의 멘토 분들은 저런 선문답 하지 말고, 예를 들면 3대영역 12과제와 4단계 로드맵, 이런 시의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기 바란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구체적인 안은 그 안에서 실제로 부딪치며 고민하고 싸운 사람들이라야 생각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경험이 없는 관료들의 교육혁신안이 공허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도한 민주화운동의 물결 근처에도 없었던 사람이 그 과정속에서 생겨난 어느 정치집단의 혁신안을 구체적으로 만들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때는 배워야 한다. 정당정치의 혁신을 꿈꾸었던 노무현의 실패로부터
저번에 민주당의 역사(전편 보기)에 대해 보았다면, 이렇게 이합집산을 거듭하다보면 자연히 그 내부에 파벌들이 생길수 밖에 없음은 쉽게 짐작할수 있다. 그리고 그 파벌들에는 보스가 있다. 민주당은 일종의 연맹왕국 혹은 중세 봉건왕국 같아서 이 파벌에 속한 정치인들은 중세때 기사들처럼 당대표(국왕) 보다는 자기 계파의 보스에게 직접적으로 충성한다. 그러니 언제든지 계파 보스가 "당 깨고 나가자!" 그러면 우르르 몰려 나가는 것이다.
노무현이 이런 계파정치의 폐해를 가장 뼈져리게 느낀것이 바로 3당 합당때였다. 김영삼은 지금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한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다. 엄밀히 말해 김대중은 유신정권 내내 국외에 있었고, 국내에서 유신과 전두환 독재의 칼바람에 온몸으로 맞선 사람은 김영삼이었다. 아래 사진을 보라. 경찰에 끌려가는 김영삼의 굳세게 깨무는 입. 솔직히 요즘 민주당
당연히 김영삼과 계파원들인 상도동계 정치인들 역시 유신과 5공 독재의 모진 탄압에 함께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이랬던 사람이 유신의 박정희의 2인자인 김종필, 전두환의 2인자인 노태우와 합당을 하곘다고 한다고 하면, 이걸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이건 평생의 삶에 대한 부정이며, 자기 자신을 모욕하는 일이며, 따라서 인간성을 모욕하는 일이다.
굴욕적인 3당 합당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통일민주당의 국회의원 59명중 8명만 빼고 평생 싸워온 상대인 군부독재의 똘마니가 되는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 왜? 계파 보스인 김영삼이 선택했으니까. 그러니 이들은 김영삼이 반독재 투쟁을 했기에 싸운 것이고, 김영삼이 독재에 투항했기에 같이 투항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소신도 판단도 없다. 그리고 이런 식의 메카니즘은 3당합당에 참가하지 않은 평화민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김대중이 노태우와 손을 잡는 선택을 했다면, 호남기반의 평화민주당 70명 의원들 역시 기꺼이 광주학살 주범의 똘마니가 되는 길을 군말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지금 민주통합당에서 이런 모습이 그나마 덜 보이는 것은 당이 개혁되어서가 아니라 당시 김영삼, 김대중 같은 절대적인 보스가 없어서, 여러 군소 계파들이 할거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스정치, 이게 바로 60년 된 정통 야당 민주당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이다. 그런만큼 이런 보스 계파정치에도 불구하고 보스가 아닌 대의를 선택했던, 그래서 김영삼의 명령을 거부하고 군부독재의 하수인이 될수 없다고 버틴 8명의 이름은 기록해 둘 만하다.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그리고 노무현. 이 중 끝까지 지조를 지킨 인물은 장석화, 이철, 김정길, 노무현이다.
그렇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가능하게 한 계파정치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둘이 조합한 연립방정식이다.
1) 계파는 특정한 지역(동교동계는 호남, 상도동계는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2) 계파의 보스는 국회의원의 공천과 정치자금 조달의 전권을 쥐고 있다.
이 둘이 결합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부산 경남에 김영삼의 추천을 받은 후보라면 막대기를 꽂아 놓아도 당선이다. 반대로 호남에 김대중의 추천을 받은 후보라면 강아지도 당선이다. 따라서 부산 경남, 혹은 호남에 공천을 받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이 바뀐다. 그렇다면 공천권을 쥐고 있는 계파의 보스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되는 공식은 그것 뿐이다.
게다가 정치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유명한 정치인일수록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 계파의 보스라면? 이 돈을 신진 정치인에게 적절히 나누어 주는 것 역시 보스 권력의 원천이다. 신진 정치인은 보스가 지역구에 공천해주고, 또 보스가 지역구 관리할 실탄도 분배해 주니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눈 밖에 나면 지역구도 날아가고, 정치자금도 끊긴다. 보스를 거역하고 3당합당에 참여하지 않은 8명은 이후 정치활동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게 보스의 권력이 크다보면, 당연히 계파원들을 관리하고 자금 및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측근 그룹이 생기기 마련이다. 김영삼 옆에는 항상 돌격대 역할을 하는 김동영, 최형우, 각종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서석재, 김덕룡, 책사 황병태 같은 가신들이 있었다. 김대중 옆에는 정치자금 및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권노갑, 돌격대 김상현, 한화갑, 잡다한 일을 해결해주는 한광옥, 그리고 책사 박지원이 있었다.
이 측근 그룹이 또 세월이 지나면 중간보스급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 중간보스들에게 줄을 대는 자들이 나타나고, 결국 당은 여러 작은 계파들간의 이전투구의 장으로 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공천권을 보스가 쥐고 있는 한, 아무리 까불어 봐야 별 볼일 없다. 김영삼, 김대중이 모두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자기 당의 총수 자리를 내어놓지 않고 공천권을 행사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은 가족같던 가신 김상현을 내치는 비정한 모습도 보이고, 한화갑등 옛 동교동계 가신보다 박지원, 이해찬 등 신진 세력을 중용하면서 서로 견제하게 하는 등 절대 2인자가 나오지 못해게 했다. 반면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뒤 계파 관리를 소홀히 하면서 중간보스들이 통제 불능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상도동계의 좌장인 김동영이 사망하고, 때맞춰서 또다른 좌장인 최형우가 맛이 가면서 김덕룡, 서석재, 서청원, 강삼재 등의 중간 보스들이 각개 약진하면서 오랜 역사를 지닌 민주계(상도동계)는 계파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럼 이런 보스정치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1) 정경유착의 가능성: 보스는 자금을 관리해야 한다. 계파원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보스는 계파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런 목돈은 자본가가 아니면 내어놓기 어렵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정경유착의 고리가 형성된다. 당시 재벌들은 항상 야당에도 "보험"을 들어놓기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 같은 유력한 야당 지도자들은 잠재적 대통령으로써 넉넉한 자금을 구할 수 있었다.
2) 민주화에 대한 절박성 상실한 기득권그룹 발생: 보스에 대한 충성이 확인된 의원들은 이제 당선이 확실시되는 지역에 안정적으로 공천받게 된다. 즉 김영삼의 측근은 부산 경남에, 김대중의 측근은 호남에, 또 수도권에서도 전통적인 강세지역에 안정적으로 공천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3선, 4선, 5선, 거의 무한대선 의원이 가능하다. 그러니 이들이 보수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김대중의 계파 호남지역 국회의원들이 바라는 것은 특별히 야심이 없다면, 이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민주당이 권력을 잡지 못해도, 민주당이 소수정당으로 전락해도, 민주당 당적을 유지하고, 호남에 공천이 되는 한 그의 권력은 영원하다. 마침내 이들은 그 지역의 호족이 된다.
3) 이러한 상황은 지방자치제와 함께 보스가 해 줄수 있는 자리가 엄청 늘어나자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니 이런 상태로는 어떤 개혁도 혁신도 불가능하다. 김대중 역시 이를 깨닫고 김근태 등 재야 운동권과 386학생 운동권 출신의 젊은 피를 대거 수혈하는데, 이렇게 들어온 운동권 출신들은 당연히 김대중을 보스로 모시는 기존 정당정치에 기겁할수 밖에 없었고 이후 동교동계와 계속 갈등한다. 대표적 사례가 이들 운동권 출신들이 김대중의 정책을 비판하자 동교동계에서 "어떻게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라며 반발한 부카닉한 사건이다. 사실 어찌 보면 김대중은 노회하게 보자면 이 갈등을 이용해서 동교동계의 중간보스들, 특히 한화갑이 지나치게 성장하는 것을 견제했다고 볼 수 있고, 좋게 보자면 동교동계는 더 이상 개혁세력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서서히 무게중심을 옮겨갔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민주당은 기존의 호남 기득권층(한화갑 등), 민주당 신파(정동영), 중도개혁파(어거지로 이인제 등), 그리고 386 운동권층(김근태 등)의 대결장이 되었고,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바로 이들이 승부를 겨루는 장이었다. 당시 최대 계파는 중도개혁파였다. 그리고 예전처럼 대통령 후보가 당 대의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선이었다면 이인제는 무난히 후보가 되고, 그를 중심으로 한화갑, 정동영이 연정을 구성하고, 김근태를 왕따시키는 구도가 만들어 졌을 것이며, 민주당은 또 그렇게 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 실시한 국민참여 경선(이것도 계파후보는 조직력으로 동원가능하다고 믿음)에서 계파 조직을 무력하게 만든 시민들의 물결이 엉뚱하게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다. 이건 계파정치 조직동원 정치 보스정치에 신물난 시민들의 반란이며, 최근 안철수 현상의 원조, 더 강력한 원조다.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은 민주당의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였고, 계파들은 혼란에 빠졌다. 만약 노무현이 이 중 몇 정파, 예컨대 정동영계와 김근태계를 친위대로 삼아서 공천권을 무기로 보스역할을 했다면 이인제가 날아간 중도개혁파는 철새집단이기 때문에 그 밑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걸 예상했고, 보스정치에 익숙한 기존 정치인들은 심지어 그렇게 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노무현은 대통령과 의회 권력의 분할이 민주주의의 원칙임을 강조하며 국회의원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고, 당 총재 등을 맡지도 않았다. 불행히도 민주당은 보스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경험을 한 적이 없는 당이다. 민주당은 이름과 달리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당인 것이다. 그 결과는 우왕좌왕, 그리고 이전투구. 아무래도 재야 운동권 출신인 노무현과 그나마 코드가 맞았던 계열은 김근태 계열인데, 이들은 또 불행히도 "밀당"할줄 모르는 우직한 운동권 집단이라 기존 당권파인 동교동계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 갈등은 결국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로 이어졌고, 이후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점거해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되는 호남기반 정치인들과 개혁을 밀어붙이고 싶었던 운동권간의 갈등은, 당 지도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당내 보수파(선대인 말대로 이들의 보스가 김진표였는지는 알수 없다)들이 미온적으로 움직여서 개혁입법의 힘을 빠지게하는 형태로 나타나면서 열린우리당을 허접한 당으로 망가뜨리고 말았다.
자, 이쯤되면 민주당이 쇄신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
1) 계파의 중간보스들의 권력을 내려놓아라. 신파인 이해찬도, 구파인 김한길도, 그외 호남 지역 토호들도 모두
2) 아직도 전략공천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는 중앙당의 공천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각 지역당에서 당원들이 후보를 선출하게 하라.(사실 이것도 시작단계에선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관리도 서투르고 부정의 유혹도 많다. 경험이 없으니)
3) 당의 대표와 당직자들을 시민들이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상시적인 시스템을 마련하라.
4) 당의 정체성을 다시 선명히 하고, 미래의 전망을 열수 있는 정책개발 체계를 갖추어라.
5) 기초자치단체장의 정당공천을 폐지하라는 안철수측의 요구가 있는데, 이는 후보의 부담을 너무 키우기 때문에, 이 역시 해당 자치구민의 경선을 통해 후보를 정하면 무난하다.
그 밖에도, 앞에서 분석했던 지점들을 잡아낸다면, 여기서 어떤 방향의 혁신 방안을 찾을수 있는지는 금방금방 나올수 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6) 당 혁신위원회 같은 기구를 설치해서 이후 당의 전망을 설계할 전권을 주고, 시민들의 브레인 스토밍을 받도록 하고, 그 위원장에 안철수를 추대하는 것이다.
아이고, 지친다. 이제 다음 편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작성자: 부정변증법 시간: 오전 11:53 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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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쇄신을 바란다면, 먼저 민주당을 알고, 그 다음에 무엇을 바꾸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라
안희정 충남지사는 이명박이 당선되고 나서 친노를 폐족이라 칭하며 용서를 구했다. 물론 그가 실패했다고 주장한 것은 조중동의 말처럼 "국정을 망쳤기 때문" 이 아니라 "기대한만큼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진보개혁진영의 단결마저 무너져서 정권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참여정부, 혹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있다. 이명박의 경우는 통상적인 수준의 국정마저도 농단해 버렸기에 실패한 정부이지만, 참여정부는 엄밀히 말하면 실패한 정부가 아니라 "개혁에 실패한 정부"다. 그런데 진보진영 특유의 자학 성향이 이걸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 폐족이다.
그냥 "5년만에 개혁이 되리라 믿은 것은 너무 순진했다. 그리고 권력 앞에서는 진보, 개혁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쉽게 변한다는 것, 그리고 국민이 원하는 개혁의 우선순위와 운동세력이 원하는 개혁의 우선순위, 또 경제가 원하는 개혁의 우선순위 간의 조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 정도만 말했어도 그만인 것을 무슨 을사늑약이라도 맺고 오는 사람처럼 반성을 오버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폐족이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지금 그 시절보다 더 영전해서 충남감사 대감이 되어 있으니, 참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참여정부와 민주당이 비판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민주당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민주당을 비판하고 민주당이 바뀌려고 해도 그 비판의 방향과 영역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오랜 세월 정말 끈질기게 살아남아온 민주당은 문재인 후보의 캠프이름처럼 담쟁이, 아니 잡초같은 정당이라 그 정체성도 모호하다.
안철수의 민주당 쇄신론이 허공에 뜬 공허한 구호로 끝난것도, 민주당의 이런 복잡한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최근 1년간 보여준 민주당의 모습을 보고 민주당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80년대때 이른바 사회과학 학습을 한 사람이라면 결코 범하지 않을 오류였다. 그러니 안철수와 또 새정치, 정치쇄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추상적인 민주당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파악된 구체적인 민주당을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가 열라 복잡하고 기니, 인내심을 갖기 바란다. 아니면 적절히 몇 편으로 잘라 보겠다. 이것도 뭐, 일종의 사회수업이다.
민주당의 뿌리
이승만 독재시절을 이야기하면 항상 나오는게 여당인 자유당의 횡포, 그리고 맨날 얻어터지는 야당 민주당이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는것과 달리 민주당은 이승만정권 내내 있었던 당이 아니라 이미 이승만 정권 말기로 들어선 1955년에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창당된 당이다. 그 창당 과정을 보면 다음 그림과 같이 무지하게 복잡하다.
이승만 정권 시절의 민주당
일단 민주당에서 제일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은 민주국민당 계열이다. 이들을 일컬어 민주당 구파라 부른다. 이들의 뿌리는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있다. 한민당은 엄밀히 말하면 친일지주, 친일자본가들이 해방직후 가장 크게 떠오르던 좌파 여운형, 민족주의 김구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정당이다. 이들이 여운형, 김구의 대항마로 이승만과 연대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야당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이들 중 그나마 진보적이었던 송진우, 장덕수 등이 연달아 암살당하면서 참, 그저 그런 정당이 되었다. 김구를 누르면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한 정당도 한민당이다.
그러다 이승만이 자기 친위 정당인 자유당을 창당하자 하루아침에 배신을 당했다. 그래서 이승만에게 배신당한 또 다른 구여당인 대한국민당과 연대해서 민국당을 만들었다. 민국당은 그러니 이승만에 대항하는 야당이라기 보다는 이승만에게 버림받은 구여당이다. 물론 대한민국 건국초기에는 지금처럼야당과 여당이 홍어조 처럼 싸우던 시절이 아니었다. 한민당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좌파인 조봉암 같은 사람도 이승만 정권에서 장관으로 임명되곤 했으니, 사실 요즘보다 훨씬 나은면이 있다.
사형당하는 진보정치인 조봉암
그러다 여야의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한것은 이승만이 임기를 마치고 나서도 헌법을 뜯어고쳐가며 대통령을 계속 해먹으려 할때 부터였다. 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정말 어이없는 사건인 사사오입개헌 을 계기로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민국당은 이제 이승만과 대립하는 그야말로 야당이 되었으며, 재야 세력과 연대하여 "야권 단일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진보세력이 배제되면서 보수야권만의 단일화를 이루어 만들어진 정당이 바로 민주당이다(1955년). 그리고 한민당에서 민국당을 거쳐온 세력을 민주당 구파, 나중에 재야세력까지 포괄할때 들어온 세력이 민주당 신파다. 한편 진보세력은 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당의 창당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이들 역시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625 전쟁 직후기도 하고 해서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심지어 진보당도 요즘의 진보정의당이나 통합진보당보다 훨씬 온건했다. 옛날 열린 우리당의 김근태계 정도 위치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런 진보당의 리더인 조봉암이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당하는 세상이었다.
조봉암 사형후 진보당은 지리멸렬해졌고 결국 보수야권 총단결체인 민주당이 이후 몇년간 이승만 독재와 싸워왔다. 그리고 419 혁명이 일어났고, 마침내 민주당이 정권(1960년)을 잡았으며, 구파인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윤보선은 신파인 장면을 총리로 임명하였는데, 당시 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였기 때문에 장관을 임명할 수 있는 장면 총리가 오히려 권한이 더 강했다. 그래서 알맹이 좋은 장관자리를 놓고 구파와 신파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틈을 타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민주당의 정권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박정희는 모든 자유당, 민주당 계열을 모조리 구태정치로 몰아붙이면서 국회의원, 정당인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안철수가 여야 가리지 않고 구태정치 쇄신하며, 쌈질하는 국회의원 줄이겠다고 말했을때 진보지식인들이 경악했던 이유가 다 있는것이며, 그런 말을 쉽게 한걸로 볼때 안철수는 아직 대한민국 정치사에 대한 의식이 충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서 2년이 지나 박정희가 정치활동을 허용했으나, 이미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골이 깊고, 힘도 빠져서 야권은 여러 정당이 지리멸렬하는 상황이 왔다. 하지만 이승만 시절보다는 비교적 단순한게 계속해서 민주당 구파와 신파가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형국이다.
이때 제일 먼저 민주당 재건에 나선 사람은 민주당 신파의 여장부인 박순천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구파의 민정당(전두환의 민정당 아님)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여전히 화합하지 않았으나, 1965년 굴욕적인 한일외교 조약 반대투쟁(63항쟁)을 계기로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당이 민중당이다. 그러나 63항쟁 도중, 선명야당을 내걸면서 국회의원직 총사퇴등 강경투쟁을 외쳤던 세력이 민중당의 소극적 투쟁에 반발하여 뛰쳐나가게 되는데 이들이 세운 정당이 신한당이다. 명분은 그러하지만 실제로는 민주당 신파인 박순천이 대표인 민중당에서 윤보선등 구파가 운신하기 쉽지 않아 일어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1967년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또다시 야권 단일후보를 만들기 위해 다시 뭉치게 되는데 이때 만들어진 당이 신민당이다.
유신 이전 박정희 시대의 야당
유신 직전의 신민당
이후 김영삼, 김대중이 활약하고, 유신과 참 힘겹게 싸웠던 그 야당이 바로 신민당이다. 그리고 신민당 이전까지만 해도 야당은 다만 권력에서 배제된 정당일뿐,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차피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집합인 야당을 투쟁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유신 독재, 즉 박정희에 대한 반작용이다.
유신시대는 신민당이 끝까지 간다. 오늘날의 민주당의 전신인 야권이 이렇게 오랫동안 당이 깨지지도 않고, 이름도 바꾸지 않고 오래 유지된 것은 유신시대 뿐이다. 그만큼 박정희 독재가 가혹했기 때문에 꽁꽁 뭉쳐서 단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만 하나로 유지가 되었을 뿐, 그 내부에는 여러 계파가 나뉘어져 있었다.
그 놈의 신파, 구파는 뿌리깊게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신파의 리더는 이철승, 구파의 리더는 유진산이었다. 그리고 신파계열의 떠오르는 지도자 김대중, 구파계열의 신성 김영삼도 나름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선거가 문제였는데, 과거 여러 정당으로 나누어졌다가 야권단일후보를 만들때는 담판으로 결정 지었지만, 이제 야권이 당으로는 하나인데, 그 안에 계파가 나누어져 있다 보니 처음으로 내부경선이란 것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김영삼이 유리했다. 유진산이 일찌감치 민주당 구파의 좌장 자리를 젊은 김영삼에게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이철승도 출마했기 때문에 김대중과 표를 나눠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영삼이 1차 투표에서 1위는 했으나, 과반을 득표하지 못했다는 것. 결국 결선투표에서 이철승이 김대중에게 신파를 넘겨버리면서 판세가 뒤집히고 말았다. 그리고 김대중이 1970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되었다. 매우 근소한 차로 지고 말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체크 포인트.
1) 다 잡은 대권후보를 놓친 김영삼의 충격! 그런데 김영삼은 오래 칩거하지 않았다. 즉시 승복하고, 김대중의 선거운동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김대중이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게 된 것도, 김영삼이 열심히 영남권에서 뛰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뭐라 해도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 할만한 그릇이었다. 야권의 어느 후보도 새겨 들어야 한다.
2) 민주당 신파, 구파 계파에 호남, 영남 지역구도가 결합해 버렸다는 것(최악!). 이 악몽은 이제 수십년간,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유신 시대... 무시무시한 시대였다. 그리고 신민당은 그 전신인 한민당, 민주당 등이 보여주지 못했던 투쟁성을 강요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나라는 한 마디로 공포의 나라였다. 야당은 무론, 여당까지도 공포에 떨었다. 몇가지 적어볼까? 요즘 세대들은 상상도 못할 일들. 이걸 보면 박정희 향수를 느끼는 노인들을 경멸할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1) 대통령 선거가 없다. 1500여명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서 한다. 보통 현 대통령이 90% 이상의 득표로 당선된다. 대위원들이 모여서 90% 이상 찬성해서 지도자 뽑는 나라, 현재 우리나라 아주 가까이에 하나 있기는 하다. 딱 그 나라 꼴이다.
2)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임명한다.
3)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수도 있다.
4)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을 국회가 해임결의하자, 여당(야당도 아니고) 대표 4명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고, 수염도 뽑히고 불구자가 되어서 나온 뒤 정계를 은퇴한다.
5) 그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낸 자가 그만둔 뒤 외국에서 반 박정희 활동을 하자, 정보부요원들을 풀어서 폐차장에서 압착시켜 죽였던가, 양계장에서 그라인더로 갈아서 죽였던가 한다.
6)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을 요원들이 납치해서 배에 태운뒤 바다에서 집어던져 죽이려다 미국, 일본정부에게 들켜서 개망신 당하고, 김대중 구사일생한다.
7) 야당 당수인 김영삼을 어거지로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한뒤 쫓아내버린다.
그 밖에도 유신시대의 어이없는 이야기 시리즈로 늘어놓으라면 책이 몇권 나온다. 딱 김정일 부칸에서나 들을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래서 bbc같은 외국 방송이 그 박정희 딸이 대통령 선거에 나온것을 신기하게 보도한다.
이 암흑기를 버티면서 비로소 신민당은 야당=저항, 희망 이란 공식에 얼추 맞춰들어갔다. 물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유신이 워낙 드세니...
그리고 10.26으로 박정희가 죽었으나 12.12., 5.17로 전두환이 또 쿠데타를 일으켜서 제5공화국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신민당은 또 "구태 정치" 로 몰려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민한당이란 어용 야당이 형식적으로 있는 가운데 전두환의 민정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가고, 김영삼은 집밖으로 못나오고 통신도 두절되는 사실상 감금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1985년 정치활동 금지가 해제되고(김영삼, 김대중은 여전히 금지) 옛 신민당 정치인들이 다시 뭉쳐서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신한민주당은 1987년 6월항쟁을 맞이하여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는데, 이때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강경투쟁에 손을 모았다. 마침내 김영삼, 김대중 계열만 따로 튀어나와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신민당 내 온건파(결국 전두환 앞에 쫄은)는 소수파만 남아 있다가 민정당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리고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단일화를 염원하던 국민들을 배반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반목하다가 김대중이 뛰쳐나가서 평화민주당을 세우면서 다시 야당이 둘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각자 대통령으로 출마했으나, 결국 노태우에게 지고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당시 노태우의 별명이 36% 대통령인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가 얼마나 애석한 일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두개의 민주당(통민당과 평민당)은 각자 자기 지역에서 선전했다. 그리하여 1988년 선거에서 민정당이 원내 소수당이 되는 개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역사상 최대의 여소야대 국회를 국민들이 만들어 주었는데, 그만 김영삼이 놀라운 결정을 한다. 1990년에 바로 3당합당. 이로써 김영삼이 통일민주당의 대부분의 의원들을 몰고 민정당과 합치면서 민주자유당(민자당)이 만들어졌다. 둘로 갈라졌던 민주당 중 하나만 남았고, 이로써 부산, 경남이 저항의 거점에서 보수의 거점으로 넘어가게되었다.
하지만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홍사덕 박찬종 등 일부 의원들이 3당 통합에 반대하면서 합류를 거부했고, 여기에 무소속의 이철 의원 등이 합류하면서 이른바 꼬마민주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들이 이들이 1991년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치면서 다시 당명을 민주당으로 정해서 정통성을 과시했다. 이때의 민주당을 통합민주당이라 부르는데, 이 통합민주당은 감히 대한민국 야당 역사상 최고의 정당이라 불릴만큼 역량있고 활기넘치는 정당이었다. 여기에는 꼬마민주당에서 건너온 젊은 피들이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이때 김대중이 이들과 함께 대통령이 되었으면 아마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역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1992년 김영삼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다들 잘 아는 imf다.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선언을 한다. 하지만 김대중이 은퇴한 뒤에도 통합민주당은 별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3당 합당으로 2/3의 의석을 차지했던 민자당을 과반 컷트라인 수준으로 위축시켜 놓았고, 정책 능력도 훨씬 뛰어났다. 잠룡들이 등장했고, 상대적으로 민자당에는 이렇다할 차기 주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김대중이 다시 정계 복귀를 시도하면서 미래를 꿈꾸던 신진세력과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갈등은 결국 다시 분당으로 이어져서 김대중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민주당을 버리고 재야운동권과 연대하여 새천년 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소수파로 남은 민주당은 1996년 총선에서 사실상 소멸되고, 생존다즐은 결국 민자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에 흡수되었다.
이 구도를 보면 계속해서 어디선가 신진 세력을 데려와서 키운 다음에는 원래 있던 세력과 반목이 일어나서 그들을 쫓아내고, 쫓겨난 신진은 결국 여당에 흡수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어쨌든 이 새정치 국민회의를 가지고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 민주당)는 이번에는 386 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수혈(당시 용어로 젊은 피)해서 세를 불린 뒤 당명을 다시 민주당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민주당의 진보색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 진보색을 바탕으로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민주당 내의 보혁갈등이 벌어졌다. 경우에 따라서 이 갈등은 과거 여야 갈등을 방불케 헀다. 물론 이때도 "구태정치 척결"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갈등은 끝내 또 다른 분당 사태로 이어졌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갈라진 것이다. 그리고 잔존 민주당은 노무현 탄핵을 위해 광주학살세력인 한나라당과 손을 잡는 엽기적인 행각까지 벌리게 되었다. 그들의 배신은 응징받아서 열린우리당은 민주당 계열에서 가장 큰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386운동권과 정동영, 천정배, 유시민 등 젊은 피들과 호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동교동계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았다.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성향상 보수야당의 진보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옛 민주당 성향 의원들의 반발로 개혁입법을 거의 해내지 못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다가 대선을 맞이해서 민주당의 탈당파, 그리고 한나라당의 탈당파(손학규 계)를 끌어모아서 외연을 확대한 것이 대통합 민주신당이다.
그러나 이 당은 대통령선거와 이듬해 총선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원내 87석의 소수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예전에 갈라졌던 호남 민주당과 다시 통합하여 민주통합당이 된것이다.
여기까지가 지금 민주당이 있기까지의 긴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계속해서 여러 당파와 파벌의 이합집산의 역사다. 지금도 이 내부에는 여전히 파벌들이 존속하고 있고, 확인했지만, 이 파벌들의 뿌리는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쉽사리 근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파벌이 이합집산하는 정당이다 보니, 정당 전체의 가치나 목표보다는 파벌의 보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조폭적 전근대성을 가지고 있다. 파벌의 보스는 국회의원 공천권과 정치자금 분배권을 움켜쥐고서 소속 의원과 정치인들을 거의 제왕처럼 지배했다. 이것이 바로 민주당의 가장 심각한 구태였다. 이렇게 보스가 소속 정치인을 지배하려다 보니, 비자금이 필요하게 된 것이고, 이게 끊임없는 정경유착의 고리가 되어왔다. 이런 계파정치, 보스정치의 문제점을 가장 강력하게 지적한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김영삼, 김대중과 달리 대통령이 된 이후 당에 대한 통제권을 일체 행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이 대통령의 뜻을 전혀 따르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 연출되었다.
반면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겸 당 총재를 겸하면서 공천권을 행사했다. 그러니 구태정치의 문제점과 해법에 대한 고민은 안철수가 처음이 아니다. 그리고 노련한 대통령도 극복하지 못한것을 정치 신인이 이 복잡한 역사를 가진 정당에게 열흘 남짓한 시간안에 고쳐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당돌한 요구였다.
이쯤 쓰고 나니 머리가 아프다. 출근해야 하는데, 잠은 언제 자나?
워낙 역사가 복잡한 정당이다 보니 중간에 틀린 곳도 많을 것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자.
대략 이렇게 알면 된다.
계보가 열라 복잡하다. 그래서 수많은 계파와 보스들이 이합집산한 과정이 바로 민주당의 역사다. 그래도 유신시절, 5공화국 시절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역사가 있고, 1997년 이후에는 나름 진보적인 색채가 입혀졌다. 거꾸로 말하면 1997년 이전에는 진보와는 거리가 만 정당이었다. 그래서 이 정당 내부에서도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이 있다.
다음에는 이런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민주당이 쇄신되어야 한다면 무엇을 왜 쇄신해야 하는지 살펴보겠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다음편: 민주당은 무엇이 쇄신되어야 할까?
작성자: 부정변증법 시간: 오전 1:46 댓글 없음:
첫댓글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싫어했던 화법이 바로 이런 식의 화법이었다"
님 이말에 대한 근거가 뭔가요?
나도 하나 질문하죠?
본문 읽어나 봣나요?
난
"노무현대통령님이 가장 싫어했던 화법이 바로 이런식의 화법이였다"
에 대한 사실확인입니다
님의 주장의 효과를 위해 노무현대통령님의 이름을 쓰신것같아서요
노무현대통령님의 이야기없이도 충분히 님의 주장이 가능한 내용인데요
글을 제대로 읽엇다면 이런 질문을 할리가 없죠
글 마지막에 보면 퍼온 글이란걸 알앗을텐데
님글을 읽어야하는 이유가 뭔가요?
님글의 목적은 맨 앞 두줄에 나와있는데
난 사실확인만 하는겁니다
님글에 나온 노무현대통령님이 이런 화법을 싫어했다는 거기에 대한 님의 대답만 있으면 됩니다
글도 제대로 읽지도않을거면서
질문은 왜 하나요?
님이 노무현대통령님을 썼기에 그 사실확인차원입니다
내용속에 사실이 들어있다면 모를까
읽어보면 이해될거란 말이 사실이 아니죠
사실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민주화에 대한 절박성 상실한 기득권그룹 발생----> 이 부분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면이 있네요. 어쩌면 인간의 에고의 특성이 아닐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