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향수
“어머니, 결혼도 했으니 고향에 누나네 집에 좀 다녀올게요.”
희연과 길을 나섰다. 중학교를 졸업 맡고 처음 가는 고향이었다.
양동역, 플랫폼에서 중학교를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부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완행열차를 타고 내려가던 일, 열차에서 하드를 팔다 싸움이 붙어 상대녀석을 살려 준 일, 보스들에게 임기응변으로 둘러 대어 위기를 모면했던 일, 잡힐까봐 측백나무 숲에 할딱거리며 숨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런데 모교의 운동장울타리 측백나무너머에서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철길너머의 신혼부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야, 저기가 자기 모교야?”
“응, 꽤 시골이지?”
“좋다, 뭐- 시끄러운 서울보다 훨씬 좋은 거 같아. 이제 그만 상념을 접으시고 가자. 많이 걸어야 한다며.”
준명은 가슴이 뿌듯했다.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희연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대합실을 나와 장마당으로 들어서자 문득 동창, 신현문이가 생각났다. 부모님이 여인숙을 해서 집은 쉽게 찾을 수가 있겠으나 친구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궁금한 생각이 앞섰는데, 사실 준명은 희연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 이게 누구냐? 너 준명이 아니냐?”
“오! 그래 알아보는 구나. 희야, 인사해! 중학교 동창이야!”
현문이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희연을 보고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서울에서 온 영화배우로 착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창들은 다 뭐 하고 지내니?”
“거의 다 서울로 가고 양동에는 몇 명 없어. 남건이가 있고, 최현태 있고, 그리고 여자 애들은 장양옥이가 체육선생하고 결혼을 해서 살아.”
“뭐야?”
“놀라긴 뭘 놀라냐?”
“아니 그럼,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이시우 체육선생은 애인도 없었어?”
“없었나봐. 너도 몰랐었어? 너네 매형과 초등학교 동창이라며.”
이야기가 좀 길어지고 있었다.
“희야, 가서 음료수 좀 사와.”
희연이 땅에 닿을 듯 말듯 치마를 끌며 자리를 비우자 현문이는,
“야, 준명이 너 재주 좋다. 어디서 저런 애를 꼬셨냐. 혹시 배우 아니냐?”
“아니야. 학생 교복잡지 모델로 한번 나간 것 밖에 없어.”
“집이 잘 나가는 모양이구나.”
“뭐 그럭저럭.......”
준명은 이때 혼자 좋아하던 순원이가 떠올랐다.
“순원이는 어디서 뭐 해?”
“서울 코스모슨가 어디 백화점에 근무한다고 들었어. 16회 동창회가 일 년에 한 번씩 서울에서 모임을 갖고 있어. 너도 나올 수 있니?”
“직업 때문에 안 돼.”
“뭐 하는데?”
“운전해.”
“응, 그렇구나.”
장마당을 뒤로하고 희연과 준명은 아홉 해를 걸어 다닌 고향 길을 걸었다. 초등학교에 들러 문창두 선생님의 근황을 물었으나 알 수는 없었다.
“희야, 여기가 섬실의 부처바위라는 곳이야.”
“뭐하는 데야?”
“저 위에 올라가면 어른 키만 한 부처 석상이 있거든. 그래서 그렇게 부르나 봐. 이 동네의 우상이니 잘 모르지 뭐. 그런데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엄마가 신기한 얘기를 많이 들려주곤 했어.”
“무슨 얘기? 근데, 자기야 금왕리가 아직 멀었어?”
“이제 시작이야.”
“어휴.......! 그럼 그 얘기 해 봐. 부처바위.”
준명의 사촌형은 서울 종로구청 앞 세탁소에서 점원으로 꽤 오랫동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설과 추석, 일 년에 두 번씩만 고향을 다녀가곤 했다. 그런데 장가를 갈 나이가 넘었지만 도대체 장가갈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형은 마음이 너무나 착했고, 동생인 준명이 가난한 집에서 공부를 잘한다며 너무나 예뻐했었다. 웃을 때는 조금 긴 보조개가 양쪽으로 들어갔다. 늘 명절 때면 시골에서 크는 동생이 불쌍하다며 매번 종합선물세트를 빼놓지 않았고, 형이 와야 준명은 여러 가지 과자 맛을 볼 수가 있었다. 형은 또 하모니카를 기가 막히게 불었다. 추석 때나 설에 마루에 앉아 노란 달을 쳐다보며 옛날 노래를 불어대면 준명은 해죽이 웃으며 형의 양 볼이 들락날락 하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는데, 그 때마다 멈추어진 시간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고, 그래서 준명도 형에게 하모니카를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준명네가 이사를 가기 전, 형은 명절에 시골집에 내려올 때마다 청량리에서 꼭 안동행 막차를 타고 왔는데 양동역에 내리면 밤 아홉시였다. 장날이 걸리면 동네 사람들을 만나 같이 올 수가 있었지만 평일에는 캄캄한 밤길을 꼭 혼자 걸어야했다. 열차를 타고 오면서 양동에서 누군가 만나기를 기원했지만 생각으로 그쳐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꼭 부처바위가 있는 이곳에 도착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바위를 지나 어두운 밤길을 걷다보면 뒤에서 무슨 발자국 소리가 간간이 들렸는데,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어릴 적에 어른들은 늘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밤길을 걷다가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던 간에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도깨비에게 홀릴 수가 있어.”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그런 말을 수없이 들으며 컸고, 그에 얽힌 전설 같은 얘기들은 그리 녹슬지 않은 것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은 뒤를 돌아보지 못했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무슨 발자국소리인가를 들어보면 네발 가진 짐승의, 즉 개 가따라오는 소리였으며, 달빛이 으스름 한 날은 어떤 때는 안 보려 해도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럴 때는 틀림없이 개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동무를 해주며 따라오던 개가 워리터의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논길을 들어서서 준명아버지가 떠내려가던 큰 개울을 건너 성황당 벚나무 근처에 오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성황당에서 형네 집까지는 오 분이면 닿는 거리였다.
이야기 속에 빠져들던 희연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뭐였어?”
“응, 엄마와 아버지는 그게 산신이 보낸 호랑이였을 거래. 형이 너무나 마음이 착해서 산신이 도와주는 거래. 무섭지 말라고.”
“진짜야?”
“이런, 하고는........ 내가 뭐 생기는 게 있다고 자기에게 거짓말을 꾸며 내냐?”
“재밌다. 지금도 그렇대?”
“홍천으로 이사 간 후로는 한 번 밖에- 아, 우리 결혼식 때도 왔었으니까 두 번 밖에 못 봤구나.”
“아주버님 한 번 뵙고 싶다.”
“일부러 만나기 전에는 힘들 거야.”
그렇게 도란거리며 둘은 시오리 길을 걸어 큰 고개에 도착을 했다.
“저기 저 동네가 내 고향이야. 좋지?”
“와! 정말 아름답다. 세숫대야 안에 집들을 지어 놓은 거 같아.”
“가만, 옛날 우리 집이 안 보이는 거 같은데?”
“왜?”
“모르겠어, 헐어냈나? 무서운 집이었었는데....... 다리 아프지. 일단 좀 쉬었다 갈까?”
“자긴 참, 한복을 입고 땅에 앉냐? 호호호! 그냥 가 다 왔는데 뭐.”
“빤히 보여도 오 리는 돼.”
“자기는 이런 아름답고 아늑한 동네에서 커서 그런가 보다.”
“뭐가?”
“자기는 늘 자연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도 정서적이고 낭만적이잖아.”
“추켜세우긴.......”
“내 낭군 내가 안 추켜세우면 누가 비행기를 태워 주냐?”
희연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립스틱이 묻지 않도록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천천히 이십여 분을 걸어 마을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