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고두현의 아침 시편』2024.05.06.
“윤동주 시집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
병원 /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가 처음 준비한 시집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습니다. 아픈 시대 상황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제목이었죠.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아홉 자의 긴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연희전문(현 연세대) 4학년 때인 1941년, 윤동주는 자선 대표작 19편을 묶어 시집을 내려고 했지요. 먼저 필사본 3부를 만들어 한 부는 자기가 갖고, 나머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영문학, 수필가)와 가장 가까운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습니다.
△ 세상이 온통 앓는 사람들로 가득
정병욱은 훗날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이렇게 회고했지요.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을 계획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 건네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서시’가 완성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동주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병원으로 상징했습니다. 폐결핵 환자인 젊은 여자는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존재이지요. ‘나’도 그렇습니다. ‘아픔을 오래 참다’ 이곳에 왔지만 ‘늙은 의사’는 병명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른바 시대적 고통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죠.
‘나’는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봅니다. 여자와 나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부분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동일시(同一視)의 메타포이지요.